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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67화 (67/87)

67화

아나샤는 이내 결심한 듯 창문으로 향했다. 어차피 증거도 챙겼겠다, 지금 바로 빠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창틀 위에 올라선 아나샤는 순식간에 밖으로 사라졌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다는 듯 커튼만이 조용히 휘날릴 뿐이었다.

* * *

베렌 상단의 건물 1층에선 한바탕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황실 기사들을 막기 위해 사병들이 검을 겨누면서 시작된 상황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단주 제퍼슨이 황급히 1층으로 내려왔지만 상황은 손쓸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된 상태였다.

로비에 장식되어 있던 조각품들은 산산이 부서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무언가를 찾듯 기사들은 이곳저곳을 뒤지기에 바빴다. 한편에서는 아직도 검이 오가는 광경에 제퍼슨은 호위 기사의 보호를 받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연실색한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제퍼슨은 뒤늦게 집무실에 숨겨둔 계약서를 떠올렸다. 그것만은 반드시 들키기 전에 태워버려야 했다.

“아무도 올라오지 못하게 막고 있어라!”

호위 기사에게 외친 제퍼슨은 서둘러 3층으로 올라갔다. 자신의 집무실로 뛰어 들어간 그는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 들었다.

열쇠 구멍에 열쇠를 끼워 넣고 돌리던 그는 뒤늦게 서랍이 잠겨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퍼슨은 황급히 서류철을 꺼내 계약서들을 세어보았다. 세 장이 부족했다.

‘그, 그럴 리가…….’

아무도 올라오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대체 누가 가져갔단 말인가.

낭패 어린 얼굴로 서류철을 내려다보던 그는 그것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이곳에서 도망치는 게 우선이라 여긴 것이다.

집무실을 빠져나온 제퍼슨이 허겁지겁 계단을 타고 내려갈 때였다. 바로 아래층 계단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에 제퍼슨은 방향을 바꿔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이윽고 2층 위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흙먼지가 묻은 채 잔뜩 흐트러진 백금발과 구겨진 옷매무새가 가장먼저 시선을 끌었다.

바닥이라도 구른 듯 꼴이 말이 아니었으나 제퍼슨은 그자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필이면…….’

손속에 자비가 없기로 유명한 웨일그레슬 공작이 이곳에 있을 건 뭔가 싶었다. 자신을 붙잡기 위해 직접 온 거라 여긴 제퍼슨은 숨을 죽였다.

“아샤!”

그러나 그가 찾는 이는 다른 이였다. 그가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외치며 반대편 복도로 사라지자, 제퍼슨은 그 틈을 노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한편 2층에 남은 리히르트는 여전히 복도의 모든 방들을 수색하듯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샤! 어디 있습니까!”

건물 어딘가에 숨어있다면 제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 그녀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리히르트는 불안한 기분을 애써 누르고서 위층으로 향했다.

숨 한 번 고르지 않은 채 그는 곧바로 넓은 복도 안을 달리기 시작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오기를 서른 번째 반복했으나 어느 곳에도 그녀는 없었다.

리히르트는 더 이상 갈 곳을 잃은 채 복도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췄다. 턱끝까지 차오른 거친 숨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상단 건물의 마지막 층이었다. 한 곳도 찾아보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달러스 때와 똑같았다. 지금껏 억지로 눌러왔던 불길한 기분이 노도처럼 밀려와 그의 머릿속을 좀먹어 가기 시작했다.

“아샤는 찾았습니까?!”

그때, 3층으로 뛰어 올라온 크리스가 그를 발견하고는 빠르게 다가왔다.

아까 멱살을 잡았던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우두커니 서있는 그의 뒷모습에 뭐라도 발견한 거냐고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그의 얼굴을 본 크리스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거의 반쯤 넋을 놓은 듯한 옆얼굴은 핏기라곤 없이 창백해 보였다.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크게 다쳐 피로 물든 아샤를 안아 들고서 어딘가로 급히 향할 때도 저런 얼굴이었었다.

“재수 없는 생각 하는 거 아닙니다.”

크리스는 손을 들어 리히르트의 등을 세게 내리쳤다. 평소에는 표정을 읽기 어려운 사내였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인다고 여겼다.

“하아…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잖습니까? 긴급한 전투 상황도 아니고, 아샤가 조심성 없이 임무에 나가긴 했지만 아기 생각해서라도 무리는 안 했을 겁니다.”

애초에 오늘 청혼을 할 계획이었으니 어쩌면 서둘러 임무를 마치고 먼저 기사단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기사단으로 가보죠. 여기 없는 거 보면 한발 먼저 임무를 끝내고 돌아간 것 같은데.”

크리스의 말에 리히르트는 그제야 조금은 침착함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급히 가야 할 곳이 떠오르자 그는 몸을 돌려 건물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온 리히르트는 말을 몰아 기사단으로 향했다.

기사단에 가까워질수록 초조함은 극에 달해갔다. 그로서는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픈 심정이었다.

이미 그녀가 돌아와 있기를. 단 하나의 바람을 수백 번이 넘게 간절히 생각하는 동안 그는 어느새 황실 제5기사단의 정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제발…….’

리히르트는 본관 건물로 들어가 3층으로 향했다. 집무실까지 뛰어가는 동안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집무실이 나타나자 리히르트는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샤!”

그러나 그의 절박한 기대와는 달리 집무실 안에는 조용한 어둠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히르트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가쁜 숨을 내뱉었다. 산산이 무너져 내린 기대에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일순 멎은 기분이었다.

몇 분간 제자리에 서있던 그는 뒤늦게 걸음을 뗐다. 그는 아직 확인해 보지 않은 곳들을 떠올렸다.

기사단 뒤뜰과 연무장, 식당, 그리고 숙소. 만약 그곳들에도 그녀가 없다면 자신의 저택으로 가볼 생각이었다. 저택에도 오지 않았다면 수도를 전부 뒤져서라도 찾아내리라는 생각뿐이었다.

리히르트는 가장 먼저 숙소 건물로 향했다. 그녀의 방이 어디인지 몰라 1층 복도의 방들을 차례대로 확인하고서 그는 2층으로 올라갔다.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끼며 긴 복도 안을 헤맬 때였다. 리히르트는 어두운 복도 끝에 희미하게 불이 새어 나오는 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복도 맨 끝에 위치한 방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자 리히르트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이미 호흡이 거칠어지다 못해 폐부가 터질 것처럼 고통스러웠으나 그럼에도 내달렸다.

이윽고 도착한 방 앞에서 그는 다급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조명으로 밝혀진 방 안에는 아나샤가 서있었다.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는지 상체는 얇은 속옷차림이었다.

“리히?”

아나샤가 깜짝 놀라 마저 상의를 입고 그를 바라보는 동안, 리히르트는 숨을 가라앉힐 틈도 없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다친 곳 없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진한 안도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리히르트는 긴장이 풀린 얼굴로 아나샤를 끌어안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영문을 모른 채 그의 품에 안겨있던 아나샤는 뒤늦게 그를 밀어냈다.

“자, 잠깐만요. 리히 얼굴이……!”

아나샤는 허둥지둥 그의 팔에서 벗어나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역시나 제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양 경악한 얼굴로 외쳤다.

“세상에! 누가 이런 거예요?!”

입술 끝이 찢어진 건지 입가에는 피가 흐른 자국이 남아있었다. 거기다 본래라면 은은히 빛이 흘러야 할 백금발 머리는 탁한 흙먼지를 뒤집어쓴 산발이었다.

흡사 어디서 둘러싸여 맞기라도 한 꼴에 아나샤는 서운함에 눈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누가… 아니 그보다 괜찮은 거예요? 어디 더 다친 건 아니죠?! 봐봐요.”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은 채 아나샤가 상처를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길고 옅은 속눈썹 아래로 후두둑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작고 투명한 눈물방울에 아나샤는 잠시 멍하니 눈만 깜빡여야 했다.

그가 울고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왜, 왜 울어요? 리히…….”

묻는 말에도 리히르트는 그저 조용히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진 봇물처럼 그의 속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로서는 이렇게 버거운 감정들에 시달려 본 것은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목이 메어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아나샤는 안절부절못하며 발만 동동 굴렀고 말이다.

“마, 많이 아파서 그래요? 제가 지금 바로 황실 의원님을 불러올 테니까 여기 있어요! 알았죠?”

그렇게 외친 아나샤가 황급히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리히르트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아이를…, 가졌다는 게 사실입니까…….”

아나샤는 흠칫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있는 그의 모습에 아나샤는 마치 자신이 울린 것 같은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어… 그게요, 미리 말 못 해줘서 미안해요. 제가 계속 숨기려던 건 아니고…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했는데…….”

당혹스러움에 아나샤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순간 그녀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이 그녀를 앞으로 이끌듯 당겼다. 리히르트는 한 품에 들어오는 작은 몸을 끌어안고서 아나샤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미안함과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그동안 말도 못 하고 혼자 고민했을 그녀가 눈에 선하기만 해서 리히르트는 마음이 무거웠다. 눈치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갑작스러운 임신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기뻤다. 감히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나 싶을 만큼 가슴은 한없이 벅차올랐다.

“사실은 오늘 청혼하면서 말할 생각이었어요. 그러면 리히가 더 기뻐할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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