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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66화 (66/87)

66화

“숙소에서 옷만 갈아입고 바로 갈게요.”

리히르트에게 마저 작전 설명을 들은 아나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서 상단 위치가 적힌 쪽지를 미리 받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녀가 막 단장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뒤에서 갑작스레 붙잡는 손길에 아나샤는 휘청이며 걸음을 멈췄다.

“리히? 뭐 빠뜨린 거 있어요?”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계속해서 제 손을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아나샤가 의아함에 눈만 깜빡이고 있을 때였다.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샤. 임무 중에 절대로 무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그제야 아나샤는 그의 눈동자 속에 자리한 불안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임무에 대해 얘기할 때부터 그의 표정이 내내 어둡던 게 다름 아닌 임무에 나갈 자신을 걱정해서였던 모양이었다.

“걱정 마요. 지난번처럼 무리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아나샤는 두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배 속의 아기 때문에라도 무리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팔을 풀고 고개를 든 아나샤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이느라 아래로 내려온 하얀 금빛 머리카락들을 슥슥 올려 정리해 주고선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춰주었다.

조금은 진정된 듯한 얼굴에 만족스럽게 웃자 곧바로 리히르트가 어깨를 안아왔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복귀해야 합니다.”

“물론이죠.”

“다치지 않게 조심히 다녀와야 합니다.”

“제 실력 알잖아요. 엄청 조심히 잘 다녀올 테니까 걱정 마요.”

아나샤는 그를 토닥이며 제게서 떨어뜨렸다. 다시 다녀오겠다고 말한 그녀는 창문을 열고서 나무 위로 뛰어내렸다. 굵직한 나뭇가지에 매달린 아나샤는 순식간에 나무를 타고 빠르게 땅에 착지했다.

“아, 맞다. 리히!”

무언가 떠올랐는지 아나샤가 고개를 들고서 외쳤다.

“만약 제가 저녁 일곱 시까지 못 돌아오면 크리스 삼촌한테 예약은 내일로 미뤄달라고 말 전해줘요!”

리히르트는 그러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창가에 서있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던 아나샤는 이내 홀연히 사라졌다.

* * *

아나샤가 떠난 후에도 리히르트는 한참을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동안 그녀가 해온 임무들에 비하면 크게 어렵지 않은 임무일 테지만 이상하게도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그 스스로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달러스에서의 일이 여전히 생생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머릿속으로는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의 초조했던 감정들이 다시금 떠오르자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무리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말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리히르트는 고개를 돌려 해가 저물어 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어느덧 저녁 일곱 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녀가 부탁한 일을 떠올린 그는 반도 처리하지 못한 서류들을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히르트는 건물을 나와 곧장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훈련을 마치고 걸어 나오던 기사들은 그를 발견하고는 일제히 예를 차리며 긴장한 기색을 띠었다. 그에 반해 나이가 있는 베테랑 기사들은 심드렁한 눈빛들이었다. 또 아샤를 찾으러 온 건가 싶은 것이다.

그 시선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이 묵묵히 걷던 리히르트는 연무장 중앙에 있는 크리스를 발견하고는 그에게로 향했다.

크리스 또한 그를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그러곤 의아한 얼굴로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아샤와 같이 식당에 가있어야 할 인간이 연무장에 혼자 찾아왔으니 말이다.

“벨덴 경.”

“예. 무슨 일이십니까?”

“예약을 내일로 미뤄달라고 아샤가 전해달라더군.”

“…아샤가 말입니까?”

갑자기 예약을 미뤄달라니, 크리스는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앞뒤 사정 다 잘라먹고 본인 할 말만 하고 가려는 사내의 모습에 황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죄송한데 이해가 안 됩니다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아샤는 또 어디 갔고요?”

“잠시 임무에 나갔다.”

“…뭐?”

툭 튀어나간 반말에 다른 기사들이 일제히 놀란 눈으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크리스는 그걸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방금 뭐랬어! 임무라고?!!”

리히르트의 멱살을 잡는 크리스의 모습에 기사들은 크리스가 갑자기 미쳐버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기사들 사이에서 말려야 하는 게 아니냐는 불안한 시선들이 오갈 때였다.

“이 미친놈이!! 임신한 애를 어딜 보내?!!”

흥분해서 외치던 크리스는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지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사람들이 들었다는 듯 연무장에는 싸한 정적이 흘렀다. 한동안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그곳에서 멍한 중얼거림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방금 뭐……?”

“…내가 잘못 들었나…….”

“아샤가 뭐라고……?”

“아샤가… 임신했다는데?”

누군가의 말을 시작으로 멍한 얼굴들 위로 빠르게 경악스러움이 번져갔다. 기사들은 금방이라도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 두 눈을 뜨거나 조용히 입을 틀어막았다.

“뭐?!! 임신?! 임신?!!”

그에 반해 아나샤의 삼촌들은 우렁찬 비명을 지르는 등 하나같이 맹렬한 반응들이었다.

“크리스, 그게 진짜냐?!!”

“아샤가 임신?!! 아기를 가졌다고?!!”

“임신이라고?!! 오 미친, 세상에 맙소사…….”

삽시간에 주위는 난리 통으로 변했다. 내일 당장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들처럼 그들은 충격에 의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거나 금방이라도 실신할 것처럼 뒷목을 붙잡았다.

“내가 저 새끼 저럴 줄 알았어!!”

그때였다. 이성을 잃은 바론이 리히르트를 향해 달려든 것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그는 크리스에게 멱살이 붙들린 리히르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턱 옆을 강타하는 소리는 제법 살벌했다. 리히르트는 고개가 모로 돌아간 채로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는 아직도 이 거대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다. 사실은커녕 아픔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그저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그가 모든 사고가 정지된 사람처럼 굳어있는 동안, 바론을 시작으로 다른 기사들도 일제히 울분을 터뜨리며 달려들었다. 리히르트를 단숨에 곤죽으로 만들어 버릴 기세였다.

“죽어라!! 이 개만도 못한!!”

“어떻게 책임질 거야! 이 자식아!!”

누군가의 주먹에 기어이 입술 끝이 터져 피가 비쳤다. 그 따끔한 고통에 리히르트는 서서히 현실감을 되찾기 시작했다.

둔하던 머리가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무렵, 시끄러운 소리들이 그의 귓가를 파고 들어왔다.

“보고만 있지 말고 이놈들 좀 말려!!”

“이거 놔! 저 새낀 더 맞아야 된다고……!”

“진정들 좀 해라! 일단 아샤부터 찾아야 될 거 아냐!”

그 외침에 그제야 리히르트는 그녀를 떠올렸다. 임무에 나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그녀를.

‘…아샤.’

당장 찾으러 가야 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기사들의 손에 붙잡혀 있던 리히르트는 단숨에 그들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큰 움직임에 곧바로 전신 곳곳에서 미약한 통증이 일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미 거대한 사실 하나만으로 머릿속이 꽉 차서 다른 것은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황급히 연무장을 벗어나는 리히르트의 모습에 크리스는 검을 챙겼다.

“우리도 가자. 아샤 녀석 데리고 와야지.”

“그래. 저놈을 죽일지 살릴지는 그다음 일이지.”

그 말에 동의하듯 다른 기사들도 재빠르게 검을 챙겼다.

* * *

베렌 상단의 건물은 흡사 거대한 저택을 연상시켰다. 건물 뒤에는 창고로 사용되는 작은 별채들이 붙어있었고, 수십 명의 사병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아나샤는 현재 상단주의 집무실 천장 위에 숨어있었다. 사병들이 워낙 많아 몰래 건물에 잠입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으나 그 뒤는 술술 풀리듯 일이 진행되었다.

1층부터 꼭대기 층까지의 건물 구조를 파악하고서 상단주로 추정되는 인물을 발견하기까지 단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나머지는 천장 위에서 상단주를 감시하면서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찾는 것뿐이었다.

천장의 작은 구멍 틈 사이로 집무실 안을 감시한 지 세 시간 정도 지났을까. 상단주가 책상의 맨 아래 칸 서랍을 열쇠로 여는 것이 보였다.

‘저건가?’

상단주의 머리에 가려져 자세히 볼 순 없었지만 분명 서류철이었다. 아나샤가 감이 온다고 여기며 상단주가 그것을 펼치기를 기다릴 때였다. 문밖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퍼슨 님! 안에 계십니까?”

“무슨 일이지?”

“잠시 나와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상단주 제퍼슨은 급히 서류철을 다시 서랍 안에 넣고서 열쇠로 잠갔다. 그리고 열쇠를 품속 깊이 넣은 채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자리를 비우자 기다렸다는 듯 천장 위에서 검은 인영이 민첩하게 내려왔다.

아나샤는 얇은 쇠핀을 꺼내 들었다. 몸을 숙인 채 맨 아래 칸 서랍의 열쇠 구멍에 쇠핀을 밀어 넣고서 신중하게 몇 번 손을 움직였다.

얼마 안 가 안쪽 잠금장치가 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서류철을 꺼낸 아나샤는 서류철 안의 문서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역시나!’

자신의 예상대로 노예 거래와 관련된 계약서가 맞았다. 뿌듯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아나샤는 계약서 몇 장을 접어서 품속에 넣었다.

그때였다. 아래층에서 수십 명의 발소리와 무기들이 부딪치는 듯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나샤는 빠르게 서랍을 닫고 몸을 일으켰다. 희미하기는 해도 심상치 않은 소음에 도망가야 할지, 아니면 숨어서 상황을 지켜봐야 할지 고민에 빠질 때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복귀해야 합니다.’

순간 머릿속에서 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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