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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65화 (65/87)

65화

“너… 임신이 얼마나 큰 문제인데 그걸 나중으로 미뤄. 청혼을 굳이 해야 돼? 어?”

“임신 사실부터 얘기하면 바로 결혼하게 될 텐데 그러면 뭔가 아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 같잖아. 그런 건 싫어. 암튼 청혼이 우선이야.”

“너는 쓸데없이 그런 거에 고집을 부려……. 아이고. 나 죽네.”

다시 뒷목을 부여잡은 크리스는 비틀대며 걷다가 의자 위에 쓰러지듯 앉았다.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저번에 삼촌이 그랬잖아. 리히도 언젠간 후사를 봐야 될 테고, 언제까지 연애만 할 수 없다고.”

“…….”

“가만 생각해 보니까 일찍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더라고. 리히도 나 아니면 결혼 안 한다고 하고. 어쩌겠어, 내가 책임져야지.”

“그래. 아주 잘했다, 아주 잘했어!”

만성 두통을 앓는 사람처럼 미간을 꾹꾹 누르며 크리스가 외쳤다. 갑갑한 속을 달래려는 듯이 조용히 앉아있는 모습에 아나샤는 입을 다물었다.

약 삼 분 정도가 지나고 크리스가 조금 진정된 기색을 보이자 아나샤는 그제야 슬그머니 운을 뗐다.

“그래서 삼촌, …이천 실루나만 빌려줄 수 있어?”

“이천? 그걸로 뭐 하려고?”

“청혼 반지 사려고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서, 흠흠. 내가 이런 부탁을 할 만한 사람이 삼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아나샤는 작게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다음 달에 봉급 받으면 바로 삼촌한테 줄게. 나 이번에 봉급 좀 올라서 바로 갚을 수 있어.”

크리스는 무슨 말을 하려다 곧 포기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린다고 해서 들을 애도 아니고, 일단은 청혼이든 뭐든 빨리하게 해서 임신 사실을 알리는 게 중요했다.

옷장 문을 연 크리스는 구석 깊숙한 곳에 숨겨둔 가죽주머니를 꺼내었다.

“자. 너한테 뭔 일이 생기면 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줄 줄이야…….”

크게 한숨을 내쉰 크리스는 어서 받으라고 아나샤에게 손짓했다. 아나샤는 제법 묵직한 가죽 주머니의 무게에 놀라서 그 자리에서 바로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이렇게나 많이?! 삼촌 혹시 실성이라도 한 거야……?”

“내 돈 아니야. 리온이 이제까지 너 위해서 따로 모아둔 돈이야.”

그 말에 아나샤가 더욱 놀라 쳐다보자 크리스는 바람 빠지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이 돈이 이렇게 쓰일 줄은 리온 녀석도 몰랐겠지 싶은 것이다.

“너 어렸을 때 같이 나가서 살 집 구하겠다고 모으다가, 네가 조금 큰 뒤에는 아카데미 보내겠다며 모았었지. 뭐 결국 전부 흐지부지되긴 했는데 이렇게 너한테 도움이 되네.”

그렇게 말한 크리스는 코트를 챙기고서 아나샤를 바라보았다.

“반지 살 돈도 있겠다, 이제 청혼하는 것만 남았네. 반지는 어디서 살지 정했어? 청혼은 어떻게 할 건데?”

“반지는 아까 보고 왔어. 그냥 가서 사면 돼.”

“그럼 지금 바로 사러 가자. 일부러 비싼 가격 부른 건 아닌지 내가 같이 가서 봐야겠어.”

“뭐야, 삼촌 보석도 볼 줄 알아?”

“…너는 내가 나이가 몇이라고 생각하냐. 전문가는 아니어도 대충 보석 시가는 알고 있다고.”

아나샤는 작게 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왠지 든든한 기분이 가슴 가득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가죽 주머니를 꼭 끌어안고서 아나샤는 크리스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마차에 올라 보석점으로 향하는 동안 아나샤는 자신의 청혼 계획을 크리스에게 들려주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분위기가 좋을 때 짠! 하고 반지를 주면서 청혼하는 거지.”

“식당은 정했고?”

“수도에 그 큰 레스토랑 있잖아. 예전에 리히랑 갔었는데 거기가 제일 맛도 있고 근사한 것 같아서 거기로 가게.”

“너 거기 예약은 했어?”

“아니? 예약해야 돼?”

마냥 해맑은 물음에 크리스는 잠시 마른세수를 했다.

“거기는 보통 예약하려면 한 달 이상은 걸리는 곳이라고. 네가 갔을 때는 단장님이 함께였으니까 바로 들어갈 수 있었을진 몰라도.”

“한 달?! 그렇게나 오래 걸려……?”

“식당은 거기 말고도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데 많으니까 내가 최대한 빨리 예약되는 곳으로 알아봐 줄게.”

“진짜?”

“그래.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청혼하고 너 임신한 것부터 말해. …하아,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

앓는 소리를 내며 크리스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다시 한번 올라오려는 깊은 한숨을 억누르고서 그는 슬쩍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청혼할지 신이 나서 떠들어 대는 아나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보통은 갑작스러운 임신 사실에 며칠 동안 충격을 받기 마련일 텐데 그저 들떠 보이는 모습에 크리스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어떤 걱정도, 불안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 다행이라면 다행인 걸까.

저렇게 행복해 보이니 결혼을 반대할 수도 없고, 애당초 아이를 가졌으니 결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은 지금쯤 아무것도 모른 채 업무나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속에서 은근한 화가 끓어올랐다.

‘그놈은 이제 죽었다.’

크리스는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을 떠올리며 싸늘하게 조소했다.

* * *

모든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청혼 반지를 구입한 바로 다음 날, 아나샤는 크리스의 도움으로 식당 예약까지 마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실행에 옮기는 것뿐이었다.

아나샤는 오늘 퇴근하자마자 그를 예약한 식당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평소에도 이런 식의 갑작스러운 저녁 데이트를 했던 적이 많아 자연스럽게 행동할 자신이 있었다.

“가면서 무슨 대화를 나눌지는 생각해 봤어? 괜히 분위기 깨는 말을 해서 망치지 말고 대화 주제 같은 것도 미리 생각하고 가.”

크리스 삼촌의 충고만 없다면 더 완벽할 것 같다고 아나샤는 생각했다.

청혼할 자신은 태연하기만 한데 정작 삼촌이 더 난리였다. 마음의 준비는 됐냐, 반지는 잃어버리지 않게 잘 챙겨라, 등등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는지 귀가 다 따가울 지경이었다.

“너 청혼할 때 무슨 말 할지 제대로 생각해 둔 거지?”

“아예 대본을 써줄 테니까 외우라고 하지 그래?”

“그래. 너의 주둥이를 믿을 바에야 차라리 내가 대본을 써주는 게 낫겠다. 저녁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지금부터 쓰면…….”

아나샤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크리스를 쏘아보았다.

“삼촌, 진담으로 하는 소리야?”

“그럼 진담이지, 내가 지금 농담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아?”

그렇게 말하는 크리스는 답지 않게 긴장한 기색이었다. 본인이 더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아나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삼촌이 말 안 해도 어떻게 말할지 다 생각해 뒀다고. 날 믿고 기다리기나 하셔. 삼촌이 자꾸 옆에서 이러면 다른 삼촌들이 의심한단 말이야.”

이제 그만 연무장으로 돌아가 보라고 아나샤는 크리스의 등을 밀었다. 크리스는 연무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그보다 너, 오늘 저녁에 어디 가자고 얘기는 한 거야? 혹시 모르니까 미리 얘기는 해둬. 선약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알겠으니까 걱정 말고 훈련이나 하셔!”

아나샤는 힘껏 등을 밀어내고서 연무장으로 걸어가는 크리스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자신이 못 미더운지 연신 뒤를 돌아보는 삼촌에게 가기나 하라고 팔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후 하고 숨을 내쉰 아나샤는 뒤늦게 몸을 돌렸다.

단장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아나샤는 품속에 넣어둔 작은 반지함을 꺼내었다. 반지함을 열자 은은한 푸른빛을 띠는 반지가 나타났다.

드디어 오늘이구나. 아나샤는 꿀꺽 침을 삼켰다. 크리스 삼촌에게서 긴장감이 옮은 건지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아나샤는 혹여 누가 뺏어갈세라 반지를 다시 조심스레 품속에 갈무리하고서 단장실 앞에 섰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걸음은 가벼웠다.

“리히! 우리 오늘 저녁은 나가서 먹어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가 보였다. 다가오는 리히르트의 모습에 아나샤는 부러 태연한 척 굴었다.

“오늘은 제가 한턱 쏠게요. 어때요?”

바로 좋다는 대답이 들려올 거라 예상한 것과는 달리 그는 조금 난처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아샤, 그대가 해줘야 될 일이 생겼습니다.”

“임무예요?”

“…황태자 전하께서 내린 기밀 임무입니다. 일단 앉아서 설명하겠습니다.”

제법 중요한 임무라는 건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아나샤는 곧바로 소파에 앉아 그가 건넨 서류를 살펴보았다. 암호로 작성된 서류를 꼼꼼히 읽어 내리는 동안 맞은편에선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베렌 상단에서 비밀리에 노예가 거래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아나샤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달러스에서 납치된 사람들을 구출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수도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후작가를 포함한 수도의 여러 가문들과도 연줄이 닿아있는 제법 큰 상단입니다. 신중하게 움직여야 하기에 증거를 확보하고 내부 상황을 파악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설명을 하는 동안 리히르트는 평소의 냉정한 태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 말을 잇기까지 한참을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노예 거래 같은 경우 거액이 오가다 보니 거래 계약서를 작성해 보관하고 있을 확률이 큽니다.”

“제가 그 계약서를 찾아오면 되는 거네요.”

“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정이기에 거래 계약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상단에 잠입해 건물 내부 구조와 사병의 수를 파악해 오는 것만으로도 작전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도 제가 증거를 빨리 찾아오면 기사단도 그만큼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거죠?”

리히르트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뒤늦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증거가 될 만한 게 있으면 꼭 가져올게요.”

그렇게 말한 아나샤는 다짐하듯 결연하게 눈빛을 빛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 갇혀 두려움에 떨고 있거나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대부분 어린아이와 여성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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