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죽어도 안 물러요. 반대로 리히가 저보고 좀 떨어지라고 해도 절대 안 떨어질 거예요.”
“…제가 그런 말을 할 리 없지 않습니까.”
“만약에요, 만약에.”
만약에라도 자신이 그런 말을 할 리 없다는 듯이 그가 조금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자 아나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자신보다 덩치 큰 사내가 귀엽다는 양 두 팔을 뻗어 그를 안아주었다.
“저도 고마워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아나샤는 그 모르게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9장 작은 엇갈림 (2)
이른 저녁부터 수도 중심에 위치한 상점가는 환한 불빛들로 반짝였다.
아나샤는 넓고 깨끗한 거리를 따라 이어지는 상점들을 둘러보며 걷기 시작했다. 순찰 때문에 온 적은 있어도 물건을 사러 온 적은 처음이었기에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고풍스러운 간판과 깨끗한 유리창 너머로 진열되어 있는 고가의 물건들. 그리고 시종을 대동한 채 물건을 고르고 있는 귀족과 그 옆에서 차분히 물건에 대해 설명하는 점원의 모습. 확실히 시끌벅적하고 활기 넘치는 시장과는 다른 것이다.
아나샤는 두리번거리다가 마침내 찾고 있던 상점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들어섰다. 보석들이 진열되어 있는 화려한 가게 내부에 잠시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신구를 착용한 중년 여성이 아나샤의 앞으로 걸어왔다.
“어서 오세요. 혹시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신가요?”
“그, 청혼할 때 선물할 반지를 찾고 있는데요.”
“그러시군요. 잘 찾아오셨어요. 저희 보석점은 고가의 보석만 취급하기로 유명한 곳이죠.”
아나샤를 안쪽으로 안내한 상점 주인은 안쪽에 진열된 반지부터 하나하나 보여주기 시작했다.
“청혼에 쓰일 반지면 결혼반지만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데 흔해빠진 저가의 반지를 선물로 줄 순 없잖아요?”
“네, 맞아요!”
“여기 있는 반지들은 전부 저희 보석점에서 제작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반지들이랍니다. 최근에 유행하는 보석들로 만든 거라 어디 가서도 당당히 자랑할 수 있죠.”
자부심이 어린 목소리에 아나샤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반지들을 살펴보았다.
상점 주인의 말을 경청하며 대략 서른 개의 반지들을 구경했을까. 아나샤의 눈에 반짝이는 반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빛이 흐르는 은색 링 중앙에 푸른색 보석이 작게 박힌 반지였다.
“저기 저 반지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보시는 눈이 아주 탁월하시네요.”
상점 주인은 진열되어 있는 반지를 따로 꺼내와 아나샤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아나샤는 손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반지를 살펴보았다. 작지만 또렷하게 맑은 빛을 띠는 푸른 보석이 꼭 리히의 눈동자를 닮아 아름다웠다. 마치 그를 위해 만든 것처럼 말이다.
청혼 반지를 받고 놀라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아나샤는 반짝반짝 눈빛을 빛냈다.
“마음에 드시나요?”
“네! 근데 남자가 낄 건데 너무 작지 않을까요?”
“남성용 사이즈도 따로 제작하니 걱정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사이즈가 맞지 않으시면 저희 보석점에서 언제든 다시 조절해 드릴 테니 걱정 마시구요.”
그 말을 들으니 더더욱 이 반지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가격이 자신이 생각하는 금액을 초과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나샤는 침을 꼴깍 삼킨 후 입을 열었다.
“혹시 가격은 얼마 정도일까요……?”
“원래 가격은 삼천 실루나를 좀 넘는데 특별히 이천구백 실루나에 드릴게요.”
“이, 이천구백 실루나요?”
아나샤는 말을 더듬지 않으려 노력해야만 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구매하고 싶었지만 지금 가진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상점 주인에게 조심스럽게 반지를 다시 건넨 아나샤는 시무룩하게 어깨를 떨어뜨렸다.
“가격이 부담되시는 거라면 좀 더 저렴한 상품들로 보여드릴까요?”
상점 주인이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묻는 말에 아나샤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한눈에 봐도 리히를 위해 만든 것 같은 이 반지를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그에게 처음으로 주는 선물이었다. 의왕이면 어떤 것보다도 값진 선물을 주고 싶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저기 죄송한데, 예약해 놓는 것도 가능할까요? 제가 일주일 안에 꼭 다시 올게요!”
* * *
기사단으로 돌아온 아나샤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공작저에서 거의 생활하다시피 한 탓에 방 안은 한 달 전 모습 그대로 어질러져 있었다. 익숙하게 바닥에 깔린 물건들을 지나친 아나샤는 몸을 숙여 침대 밑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침대 밑에는 인형이나 책 같은 잡다한 물건들이 쌓여있었다. 대부분 생일날 삼촌들에게 받은 물건들이었다.
침대 밑에서 한참을 부스럭대며 무언가를 찾던 아나샤는 뒤늦게 작은 나무함을 끄집어내었다.
아나샤는 바닥에 주저앉아 곧바로 나무함에 들어있는 동전들을 세기 시작했다. 그동안 조금씩 따로 비상금을 모아두길 잘했다고 여기며 말이다.
“이백이십, 이백삼십… 이것까지 더하면 이백사십 실루나……. 이것밖에 없어?!”
그럴 리 없다는 듯이 아나샤는 나무함을 뒤집어서 탈탈 털어보았다. 하지만 텅 빈 나무함에서 황금색 동전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릴 리 없는 것이다.
아나샤는 나무함을 내려놓고서 땅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모은 돈이 이천구백 실루나는커녕 구백 실루나도 안 된다는 사실에 충격이 컸다.
‘이제 어쩌지.’
자신의 완벽한 계획이 시작하기도 전에 물거품이 되게 생겼으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나샤는 끙 소리를 내며 입술을 얕게 깨물었다.
원래는 결혼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듣고 나서 바로 임신 사실을 밝힐 생각이었지만, 어젯밤 그의 대답을 듣고 나서 아나샤는 마음을 바꿨다.
그에게 아주 끝내주는 청혼을 하기로 말이다.
아나샤의 계획은 이러했다. 근사한 곳에서 저녁 식사를 한 뒤, 그에게 반지를 선물로 주며 청혼을 한다. 그리고 리히가 제 청혼을 받아주면 그때 깜짝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반지를 받고서 기뻐하는 그에게 임신 사실을 알려서 더욱 기쁘게 만들 속셈이었다. 아마 그에게 있어서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되지 않을까.
물론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금전적인 문제 앞에 가로막혔다지만.
‘다른 저렴한 반지로 다시 고르는 수밖에……. 그치만 리히한테 딱이었는데!’
역시 그 반지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여기며 아나샤는 애꿎은 침대 시트 위를 팡팡 내리쳤다.
자신은 왜 돈이 없는지, 봉급은 왜 이렇게 적은지, 왜 그동안 저축을 열심히 하지 않았는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울적한 생각에 빠진 채 말이다.
다음 봉급날까지 기다린다면 어떻게 해볼 테지만, 다음 달까지 기다리기엔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체했다는 변명으로 어떻게든 둘러대고 있었지만 이것도 이번 주까지만 가능할 것 같았다.
‘오늘 점심때도 리히 표정 안 좋았었지…….’
금방이라도 자신을 의원에게 데려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었다. 언제까지 임신 사실을 숨길 수도 없고, 적어도 이번 주 안에는 성공적으로 청혼을 해야 했다.
‘결국 이 수를 써야 하는 건가.’
자리에서 일어난 아나샤는 문을 열고 나갔다.
제법 비장한 얼굴을 하고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크리스의 방 앞이었다.
“삼촌! 삼촌 있어?!”
문을 두드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크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웬일이야? 네가 지금 시간에 숙사에 다 있고.”
크리스는 눈썹을 슬쩍 위로 들어 올렸다. 매일 단장님과 같이 퇴근해 버리는 아나샤가 혼자 이곳에 있는 게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설마 사랑싸움이라도 한 건가 싶자 크리스는 일단 아나샤를 방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할 얘기가 있어. 진짜진짜 중요한 얘기야.”
“그래, 그래. 진짜진짜 중요한 이야기란 게 대체 뭔데?”
보나 마나 연애 상담이겠거니 싶어 크리스는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어 섰다.
“어디 들어나 보자.”
“삼촌한테만 먼저 얘기하는 거야. 리히한테도 아직 말 안 했어. 절대 놀라지 말고 들어. 분명 놀라겠지만 소리 지르면 안 돼.”
“뭔데 그러는데……?”
진지하기 짝이 없는 아나샤의 모습에 크리스는 살짝 불안한 눈을 했다. 대체 무슨 큰 사고를 쳤길래 애가 답지 않게 이러나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크리스의 예상 범위를 한참이나 초월했다.
“나… 아기 가졌어.”
“…뭐?”
“리히랑… 그 첫날밤에 실수로… 어, …그게 그렇게 됐어. 아기가 생겨버렸어.”
쿠당탕,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크리스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넘어졌다.
“어, 억, 억.”
한동안 뒷목만 붙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크리스는 뒤늦게 입을 벌렸다.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허옇게 질린 얼굴이었다.
“…세상에… 아기라고?! 아기?!!”
“…쉿! 옆방의 삼촌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애 가진 건 난데 무슨 나보다 더 놀라? 누가 보면 삼촌이 애 가진 줄 알겠네.”
“너… 너, 지금 이게… 태연하게 말할… 아, 아이고.”
더는 말을 잇지 못한 채 크리스는 그대로 앓는 소리를 내었다. 교제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대형 사고를 쳐오다니 눈앞이 다 깜깜할 지경이었다.
“정말로 임신인 게 확실한 거야……? 대체 언제부터.”
“아마도 두 달 된 것 같다고…….”
“두 달?!”
“나도 어제 알았어. 리히한테는 이번 주 안으로 말하려고.”
“…뭐? 그놈은 아직 몰라? 모른다고?!!”
“응. 청혼하면서 말하려고.”
그 태연한 말에 크리스는 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한동안 답답한지 가슴만 두드리던 크리스는 돌연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아나샤의 팔을 붙잡았다.
“안 되겠다. 당장 얘기하러 가자. 당장 가서 결판을 지어야…….”
“누구 멋대로! 청혼하면서 얘기할 거야!”
“그렇게 태연하게 기다릴 시간이 어디 있어?! 하루빨리 얘기해서 해결 방법을 찾아야 될 거 아니야!”
“그래서 그 해결 방법대로 하려고 이러는 거잖아! 리히한테 청혼하는 게 먼저야. 대답 듣고 나서 그때 가서 아기가 생겼다고 말해도 안 늦는다고!”
발끝에 힘껏 힘을 주며 아나샤는 버텼다. 바닥에 드러누울 것처럼 고집을 부리자 결국 크리스는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