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리히르트는 그녀의 곁에 걸터앉아 손을 뻗었다. 눈가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에 아나샤는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르르 녹아내릴 만큼 자상한 미소였다. 하지만 입가에 머금은 미소와는 달리 푸른색 눈동자는 근심으로 가득했다.
“배고프면 바로 식사를 가져오겠습니다.”
“괜찮아요. 지금도 적당히 배부른걸요.”
“오늘도 거의 안 먹지 않았습니까. 이러다 그대가 쓰러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들으면 저 하루 종일 굶은 줄 알겠어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아나샤는 말했다.
“리히는 걱정이 너무 과해요.”
아나샤는 두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순순히 고개를 숙여오는 그의 행동에 아나샤는 배시시 웃으며 입술을 내밀었다.
곧은 콧대 위에 쪽 하고 입술을 찍어주자 걱정으로 굳어있던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나샤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떨어지려 하자 리히르트가 그대로 고개를 숙여왔다. 입술에 짧게 키스를 한 그는 아나샤와 눈을 맞추었다.
“아샤, 약속대로 밤입니다.”
“아직 밤이라기보다는 저녁인데…….”
“듣고 싶습니다.”
정중한 어조와는 달리 그의 눈은 마치 상을 달라고 보채는 아이처럼 자신을 재촉하고 있었다. 일순 마음이 약해질 뻔했으나 아나샤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듣기 전에요.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사뭇 진지해진 그녀의 표정에 리히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물어봐도 됩니다.”
무엇이든 대답해 주겠다는 듯 다정한 목소리에 아나샤는 그가 놀라지 않게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리히는 저랑 결혼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결혼 말입니까?”
“네, 그냥 궁금해서요. 제가 결혼하자고 하면 왠지 리히는 덥석 받아줄 것 같기도 하구.”
장난스러운 말에도 리히르트는 놀라 한동안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그녀의 입에서 결혼 얘기가 먼저 나오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말이 없는 그를 대신해 아나샤는 먼저 운을 떼었다.
“…음. 사실 리히랑 나중에 어떻게 하고 싶은지 예전부터 혼자 생각해 봤었어요. 연애는 결국 끝이 있으니까요.”
끝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듯 그의 긴 속눈썹이 움찔 떨렸다. 손을 내려다보고 있느라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아나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결혼밖에 답이 없는데 저는 귀족이 아니잖아요. 저랑 결혼하는 건 리히 가문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거 알아요. 애초에 첩자가 공작 부인이 되는 것도 이상하고요.”
“…….”
“그래서요, 생각해 봤는데요. 만일 결혼한다면 저는 두 번째 부인이나 첩 같은 걸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 말고는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기를 가졌다고 해서 자신이 공작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가 생각해 봐도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자리였다.
“그러니까 리히는 가장 좋은 가문의 영애분과 정략혼해도 돼요. 저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치면 큰일이잖아요.”
생각했던 모든 말을 쏟아내고서 아나샤는 입을 다물었다. 드디어 말했다는 생각에 조금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그의 생각은 어떤지 물어보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제가 다른 여인과 혼인하기를 바랍니까?”
옅은 금빛의 속눈썹 아래로 상처받은 것처럼 가라앉은 눈이 드러났다. 아나샤는 당혹감에 입만 뻐끔대다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 그렇게 말하면 이상하긴 한데 보통 지위 높은 귀족들은 이런 식으로도 한대요. 리히만 괜찮다면 이렇게 해도 된다는 말이었어요.”
그는 대답 대신에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해 보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도무지 차분하게 생각을 이을 수가 없었다. 리히르트는 작은 손을 아프지 않을 만큼 강하게 쥐고서 애써 차분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대는 괜찮겠습니까? 제가 정말 다른 이를 부인으로 맞이해도.”
서운함이 가시지 않은 푸른 눈과 시선을 마주하자 아나샤는 왠지 큰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혹시 많이 싫어요?”
“아샤. 만일 그대가 다른 이와 정략혼을 한다고 하면…, 너무나도 싫을 겁니다.”
싫은 정도가 아니라 아마 그자를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리히르트는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 위에 입술을 묻었다.
“저를 생각해서 해준 말이란 거 압니다.”
그가 얕게 한숨을 내쉬자 간지러운 숨결이 손가락 틈새를 간질였다.
“하지만 결혼을 정치나 다른 이익의 수단으로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더더욱 할 생각 없습니다.”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아나샤는 손가락을 움츠렸다. 마치 자신만이 필요하다는 듯이 간절해 보이는 눈길에 꼭 청혼이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그대가 결혼을 원한다고 한마디만 해준다면, 저는 바로 그대를 부인으로 맞이할 겁니다.”
“…….”
“만일 공작 부인이라는 지위가 부담되어 그러는 거라면 제가 공작 위를 내려놓겠습니다.”
“네?!!”
깜짝 놀라 눈이 커진 아나샤의 반응에 리히르트는 조용히 눈매를 접어 보였다. 아나샤는 왠지 그의 말이 진담 같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작위 버릴 거면 저 줘요. 제가 공작 할게요.”
“늘 말했지만 전부 가져도 됩니다.”
그 말에 아나샤는 결국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숙인 채 키득대며 웃던 아나샤는 뒤늦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리히는 결혼하고 싶어요? 제가 원하는 거랑 상관없이요. 리히 생각도 중요하잖아요.”
아나샤는 그의 양 뺨을 붙잡고서 물었다. 마치 아이를 타이르는 어른처럼 진지한 얼굴에 리히르트는 잠시 웃음을 참듯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매일 꿈꿔왔을 정도로 원한다고 한다면 믿겠습니까?”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리히르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제껏 한 번도 얘기한 적은 없지만 예전부터 결혼에 대해 생각해 왔었습니다. 만일 결혼을 한다면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말입니다.”
“정말요? 전혀 몰랐어요.”
“말하면 그대가 부담스러워할 거라 여겼습니다. 그리고 제겐 그대가 원하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지금이 그녀가 원하는 삶에 가장 가까워진 시기가 아닐지 리히르트는 생각했다.
최근에서야 황실로부터 공을 인정받기 시작한 그녀였다. 앞으로 몇 년간 지금처럼 실력을 발휘한다면 더욱더 많은 공을 인정받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결혼은 사실상 포기해야 한다지만, 몇 년이 걸려도 상관없으니 그저 기다리겠다고 리히르트가 말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휴, 다행이다.”
진심으로 안도하듯이 아나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두 손을 내리고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저 생각해 봤었다고 했었잖아요. 미래에 대해서.”
“…….”
“리히한테는 이제까지 말 못 했지만 항상 생각했어요. 매일 이렇게 함께 지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매일 함께 잠들고, 눈을 뜨는 소소한 일상들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이제는 그가 제 옆에 있는 게 익숙하다 못해 당연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자신에게 있어서 두 번째 부인이라든지, 첩이라든지는 크게 상관없었다. 그저 그의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그걸로 되었으니까.
“저는 앞으로도 리히랑 쭉 같이 있고 싶어요. 그러니까 리히랑 결혼하게 된다면 행복할 거예요. 분명.”
“…….”
“물론 기사단 일도 중요하지만, 리히도 제겐 중요해요. 욕심인 건 알지만 둘 다 제겐 포기할 수 없는 거니까…….”
그때였다. 갑작스레 허리 뒤를 끌어안아 당기는 팔에 아나샤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그의 품에 안겼다.
뒷머리를 감싼 커다란 손은 마치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힘이 실려있었다. 얼마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숨쉬기 힘들 정도라 아나샤가 그의 등을 두드리려할 때였다.
“…아샤, 그 말만으로도 행복합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짙은 감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아나샤는 휘둥그레 눈을 떴다.
그는 그저 자신을 꽉 끌어안고 있었으나 왠지 격한 감격에 복받쳐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나샤는 그의 등을 마주 안아 토닥이며 그를 달래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포옹을 풀었다. 아나샤는 그와 눈이 마주칠세라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제 말에 그가 이렇게까지 감동을 받을 줄은 몰랐기에 당혹스러움이 컸다.
동시에 아나샤는 몇 분 전 자신이 한 말들이 귓가로 생생히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런 그에게 다른 영애와 정략혼을 하라고 얘기했으니 제 말을 듣는 동안 그가 얼마나 서운했을지 짐작이 되었다. 몹쓸 짓을 한 것처럼 심장이 따끔거리는 기분이었다.
“그, 아까는 미안해요. 그런 말 해서……. 서운하게 만들 생각이 아니었는데.”
몰려온 미안함에 아나샤는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히는 항상 신분 차이 같은 건 느끼지도 못하게 저한테 늘 맞춰주는데, 정작 저는 신분에 얽매여서 그런 말이나 하고 말이에요.”
그 말까지 하고 잠시 시무룩해져 있을 때였다.
왼손을 붙잡아 들어 올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가락 위를 살며시 누르고 떨어지자 아나샤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서운하긴 했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대의 진솔한 속마음을 들을 수 있어서 기쁩니다.”
리히르트는 그녀의 손을 쥔 손을 움직였다. 엄지손가락으로 손바닥 안쪽을 간질이듯이 쓸며 그는 다시 손가락 위에 입을 맞췄다.
“앞으로도 쭉 같이 있고 싶다는 말, 나중에라도 무르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리히르트는 긴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그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미소에 아나샤는 잠시 넋을 놓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