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그 말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아나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마침 그의 생일이 겨울이었다.
“정했어요. 이번 생일에 아주 비싼 선물을 줘서 깜짝 놀라게 해줄래요. 어디 가서 내 애인이 사줬다고 당당히 자랑할 수 있을 만큼 값비싼 걸로요!”
“아주 멋진 생각이네요.”
비장한 결심이 느껴지는 얼굴에 엘리시아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응접실 안을 울려 퍼졌다.
“황녀님, 차와 디저트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와요.”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엘리시아는 대답했다. 곧 안으로 들어선 시종은 티 테이블 위에 여러 종류의 디저트와 차를 올려놓았다.
퍼지는 달짝지근한 향기에 아나샤는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강한 냄새는 아니었으나 조금 속이 울렁거려서 조용히 숨을 참고 있을 때였다.
“아샤 경?”
걱정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나샤는 겨우 코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나 괜찮다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엘리시아는 시종을 시켜 황실 의원을 데려오도록 명했다.
“아니에요. 이제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하는 것치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요. 몸이 안 좋은 거면 말하지 그랬어요?”
“그게, 아까는 정말 괜찮았어요. 정말로요.”
아나샤가 재차 말했으나 엘리시아의 표정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단호하기만 했다.
“몸이 안 좋다기보다는 조금 헛구역질을 할 것 같아서 코를 잠깐 막은 거였어요. 그거 외에는 다른 증상도 없고,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왠지 상태가 심각한 환자가 된 것만 같아 아나샤는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상한 증상이긴 하지만, 크게 몸이 안 좋거나 그런 것은 아니니 말이다.
“아샤 경,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피임은 잘하고 있나요?”
“피임요……?”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아나샤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 자신이 옳게 들은 게 맞는지 되묻자 얼마 안 가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덧이라는 증상과 비슷한 것 같아서 묻는 거예요.”
“어… 입덧이면 임신할 때 그?”
잠깐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아나샤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뛸 것처럼 놀라며 외쳤다.
“설마요! 아니에요! 아닐 거예요. 그, 그치만 한 번도 피임을 안 하고 한 적은 없는걸요.”
그렇다고 피임을 대충 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하나하나 세심하게 신경 써줬으니 분명 잘못되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적은 없다고 확신에 찬 말을 뱉으려던 순간이었다. 스치듯 떠오른 기억에 아나샤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 하루 빼고는……. 첫날에는 피임 기구가 없어서 그, 그냥 했었어요…….”
자신이 무작정 그의 객실로 찾아가 벌어진 일이었기에 그날은 준비가 안 된 채로 했었다. 하지만 아나샤는 ‘에이 설마…….’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치만 그날 한 번인데요……? 한 번으로 아기가 생겼을 리가……. 그리고 거의 두 달 전 일인데…….”
“두 달이면 막 입덧이 시작될 시기네요.”
“하… 하지만…….”
“아무래도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샤 경.”
그 말에 아나샤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초조하게 앉아 황실 의원을 기다렸다. 얼마 안 가 응접실로 나이 지긋한 의원이 찾아왔다.
황실 의원은 엘리시아에게 예를 갖춘 뒤 아나샤의 옆에 앉았다. 침착하게 진맥을 하며 아나샤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던 의원은 한참 뒤에야 운을 뗐다.
“회임이시군요. 축하드립니다.”
아나샤는 입을 떠억 벌렸다. 흡사 영혼이 머나먼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황실 의원이 나간 후에도 아나샤는 한참을 멍하니 굳어있었다.
“아샤 경?”
“…….”
“아샤 경.”
“…어, 어, 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이쪽을 바라보았으나 여전히 두 눈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멍하기만 했다. 엘리시아는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많이 놀란 것 같은데 괜찮나요?”
“…모, 모르겠어요.”
아나샤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어쩔 줄 모른 채 두 손만 꼼지락댔다.
“혹시… 진단을 잘못 내리신 게 아닐까요? 다른 분한테 한 번 더 검진을 받아보면 안 될까요?”
“아샤 경이 원한다면 그렇게 해요. 당장 다른 의원들을 불러줄게요.”
“감사해요, 황녀님! 정말로 감사해요.”
엘리시아는 곧바로 실력이 뛰어난 황실 의원들을 황녀궁으로 불렀다. 총 세 번에 걸친 진찰이 이어졌으나, 아나샤의 기대와는 달리 회임이 확실하다는 소견이 연이어 들려왔다.
더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아나샤는 고개를 떨군 채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이 배 속에 아기가 있다니,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보다 더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술도 마시고 훈련도 받았는데 말이다.
아직도 얼떨떨하기만 하다는 듯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만 있을 때였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들려온 목소리에 아나샤는 고개를 들었다. 걱정이 담긴 눈과 마주치자 아나샤는 대답 대신에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리히에게 얘기해야 될 테다. 하지만 얘기한 뒤에는 어떡해야 되지? 아나샤는 입을 작게 달싹였다. 여전히 머릿속이 멍하기만 해서 무엇 하나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얗게 질린 그 얼굴에서 곤란함을 읽어낸 엘리시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거 이해해요. 혼자서 얘기하기가 어렵다면 내가 대신 공작에게 얘기할게요.”
“아, 아니에요. 황녀님도 바쁘실 텐데 그렇게까지 해주시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중요한 일인 만큼… 제가 직접 얘기해야 될 것 같아요.”
* * *
말은 그렇게 했으나, 단장실 앞에 도착한 아나샤는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아나샤는 꼴깍 마른침을 삼키고서 차가운 문고리를 잡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 ‘리히! 우리 아기가 생겼대요! 아기요, 아기!!’ 하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하얀 백지상태였다. 아직 스스로도 이 크나큰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그에게 말할 준비가 되어있을 리 만무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문 앞에서 몇 분간을 가만히 서있을 때였다.
철컥, 안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아나샤는 뒷걸음질을 쳤다.
“아샤?”
후다닥 뒤로 물러서려던 순간, 아나샤는 들려온 목소리에 모든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나타난 익숙한 얼굴에 혼란스러웠던 기분은 삽시간에 가시고 대신 안도감이 차올랐다.
“평소보다 늦어서 걱정했습니다.”
동시에 크고 따스한 손이 제 손등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아나샤는 그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문이 닫히고 그의 다정한 눈과 마주하자 그제야 현실감이 몰려왔다.
“황녀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안색이 안 좋아 보입니다.”
“그게…, 일은 없었어요.”
아나샤가 지금 말을 해야 될지 머뭇거리던 순간이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왔다.
“역시 아직까지도 몸이 안 좋은 겁니까?”
최근 이틀간 그녀가 식사를 하다가 조금만 먹고 식기를 내려놓는 것을 리히르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괜찮아졌다는 그녀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넘어간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오늘은 저택에 도착하면 주치의부터 부르겠.”
“아니에요!”
그 외침에 놀란 것은 그가 아닌 아나샤였다.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버려 당황한 얼굴로 서있던 그녀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이미 진찰받았어요. 황녀님이 의원을 불러주셔서…….”
“진단 결과는 들었습니까? 어디가 안 좋은 겁니까?”
“어, 어, 그게요.”
막상 임신 사실을 얘기하려고 하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나샤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이따가 얘기해 줄게요.”
“아샤.”
“정말 이따가 얘기해 줄게요. 이따 밤에요.”
“알겠습니다. 밤에 꼭 얘기해 줘야 합니다.”
당장이라도 몸 상태에 대해 듣고 싶었으나 리히르트는 그녀에게 강요할 수 없어 애써 차분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게 중요한 문제를 나중으로 미뤄둔 채 두 사람의 시간은 잔잔하게 흘러갔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자 아나샤는 그와 함께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향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에 아나샤는 오늘 황녀궁에서 있었던 일들이 전부 꿈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저녁 식사 중 어김없이 속이 울렁이자 다시금 실감이 났다. 결국 오늘도 얼마 먹지 못한 채 아나샤는 일찍이 그의 방으로 향했다.
따스한 물이 채워진 욕조에 앉아있는 동안 속은 금세 진정되었다. 목욕을 마친 아나샤는 부드러운 옷을 걸치고서 침대 위에 기대어 앉았다.
아나샤는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배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는데 이 안에 아기가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아 얼떨떨하기만 했다.
‘어떻게 말하지…….’
점점 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자신도 아직 믿기지가 않는데 만약 리히에게 얘기한다면 그가 얼마나 놀랄까. 무엇보다 아기가 생겼으니 결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나샤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혼이라니!’
정확히는 이 중요한 문제를 그의 의사조차 묻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에게 놀라있었다.
물론 아기에 대해 얘기를 한다면 분명 그는 모든 책임을 지려 할 것이다. 다음 날 바로 자신을 공작 부인 자리에 앉힐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걸로 되는 걸까. 아나샤는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생긴 아기도 분명 중요한 문제였지만, 대귀족인 그에게 있어서 결혼은 그에 못지않은 중요한 문제일 테다.
‘…역시 먼저 내 생각을 얘기하는 게 낫겠지. 리히의 생각도 들어보고.’
평소답지 않게 심각한 얼굴로 아나샤가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문밖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아나샤는 황급히 생각을 멈추고 문을 돌아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침실 문이 열리며 리히르트 그가 안으로 들어섰다.
“속은 좀 괜찮습니까? 아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