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이상한 말은 아니지만 약속은 했었습니다.”
“약속요?”
“네. 뽀뽀 천 번을 해주기로 말입니다.”
아나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침대 앞으로 다가온 그는 이불자락 밖으로 나온 발목을 쥐고선 조용히 자신을 끌어당겼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얼굴에 아나샤는 숨을 삼켰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요구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집요한 눈빛이었다.
“…리히, 진짜로요? 진짜 천 번을 해달라고요?”
아나샤가 슬며시 꺼낸 말에 리히르트는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한 감정이 깃든 푸른 눈동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술김에 한 약속이잖아요. 전 기억도 안 나는데, 솔직히 이건 무효죠.”
“…….”
“으으음… 계속 그렇게 볼 거예요? 저 진짜 못 해요. 열 번이면 몰라도 어떻게 천 번을 해요?”
물론 뽀뽀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뽀뽀하는 걸 좋아한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천 번은 심했다. 입술이 닳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여기며 아나샤가 속으로 기겁할 때였다.
“하루에 열 번씩 백 일 동안 해주는 건 어떻습니까?”
들려온 잔잔한 목소리에 아나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열 번 정도면 뭐…….”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리히르트는 이미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뺨을 내밀었다. 일단은 뺨에 한 번 해달라는 듯이 말이다. 아나샤는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추고서 떨어졌다.
“이제 아홉 번 남았죠?”
리히르트는 대답 대신에 아나샤를 안아 그대로 침대 위로 무너뜨렸다. 포근한 향이 나는 가녀린 몸을 끌어안고서 하얀 살결에 쪽쪽 소리를 내며 키스하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뽀뽀 세례에 아나샤는 간지러워 작게 발버둥 쳤으나 그는 멈출 줄 몰랐다. 어느새 열 번의 횟수는 무의미해진 지 오래였다.
* * *
바람에 실려오는 우렁찬 구령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어 있던 아나샤는 눈을 떴다. 상체를 일으키자 몸을 덮고 있던 제복 외투가 스르륵 내려왔다.
커다란 외투를 품에 안고서 아나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의 주인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한 아나샤는 그대로 입을 떠억 벌렸다.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세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오늘도 엄청 자기만 했네…….”
날씨가 쌀쌀해져서 그런지 요즘 부쩍 잠이 늘었다. 점심 식사를 하고 나면 어느새 노곤한 기분에 취해 낮잠을 자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졸음이 몰려왔다.
아나샤는 반쯤 열려있는 창문을 닫고서 밖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에 있는 주홍빛 잎들은 조용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모두 훈련을 하느라 연무장에 가있어서 그런지 건물 주위는 조용했다.
‘뭔가 평온하네.’
아나샤는 작게 하품을 터뜨렸다. 그동안 이렇다 할 큰 사건 없이 조용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사건이라고 해봐야 부단장 칼리프가 3일간 근신 처분을 받은 일 정도였다. 함께 술을 마신 다음 날 갑자기 근신 명령이 떨어진 것이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아나샤는 그가 술을 먹고 리히한테 추태라도 부린 모양이라고 넘겨짚었다.
아나샤는 다시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10분을 조금 넘게 기다렸을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나샤는 곧바로 튀어나가 문을 열었다.
“리히! 어디 갔다 왔어요?”
“주방에 다녀왔습니다.”
“헉 그건!”
그의 한 손에 들린 바구니에는 잘 익은 노란색 껍질의 과일들이 담겨있었다. 점심에 그에게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긴 했지만 진짜 가져와 줄 줄은 몰랐다.
직접 깎아주려는 것인지 바구니 안에는 접시와 과도도 들어있었다. 감동이 물밀 듯이 밀려오자 아나샤는 곧바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커다란 몸에 달라붙어 그의 뺨에 뽀뽀를 퍼부어 댔다. 아침에 이미 열 번도 넘게 했다지만 기쁨에 멈출 수 없었다.
폭풍 같던 뽀뽀 세례가 끝난 뒤, 리히르트는 그녀를 진정시키고 소파에 앉혔다. 그는 차분히 과일을 깎아 접시에 담았다. 그러곤 어서 먹어보라며 포크로 과일 한 조각을 찍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아나샤는 곧바로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새콤한 맛이 입 안에 퍼지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맛있습니까?”
“네! 엄청요. 딱 원하던 맛이에요.”
리히르트는 자신의 옆에서 행복한 얼굴로 과일을 오물거리는 아나샤를 바라보았다. 차분한 표정과는 달리 현재 그는 속으로 매우 인내하는 중이었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은 기분을 억지로 누르기 위해 그는 과일에 손을 가져갔다. 침착해지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정확히 열두 개째 깎았을 때였다. 들려온 아나샤의 놀란 외침에 그는 비로소 칼질을 멈출 수 있었다.
* * *
아나샤는 깎은 과일들의 반을 삼촌들과 다른 기사들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반은 혼자서 거의 다 먹어치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과일로만 배가 빵빵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나샤는 호화로운 음식들을 앞에 두고 입을 틀어막았다. 아나샤는 재빨리 밖으로 뛰쳐나와 그의 방으로 향했다. 얼마나 날쌘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욕실에 틀어박혀서 욱욱 소리를 내던 그녀는 한참 뒤에 욕실 밖으로 나왔다.
“아샤.”
내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히르트는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그녀를 안아 들고 조심스레 소파에 앉혔다.
“주치의를 부르겠습니다.”
“아니에요. 이제 괜찮아졌어요.”
메슥거리는 속이 진정되어서 이젠 아무렇지 않다고 아나샤는 얘기했으나 리히르트는 걱정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얼굴 곳곳을 세심히 살피는 그의 눈길에 아나샤는 괜히 머쓱해져 뺨을 긁적였다.
“아까 과일을 너무 많이 먹어서 체했나 봐요. 적당히 먹을 걸 그랬어요. 괜히 욕심 부려선…….”
“정말 괜찮습니까? 혹시 모르니 진찰이라도 받아보는 게 어떻습니까?”
“한 시간 정도 기다려 보고 계속 울렁거리면 받을게요. 진짜로 지금은 괜찮아요. 그보다 리히 밥 먹다가 저 따라 나왔죠?”
보나 마나 중간에 일어선 자신을 따라왔을 게 뻔했다. 배고플 텐데 자신이 걱정되어서 식사도 못 했을 그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저 걱정 말고 식사하고 와요. 얼른요.”
아나샤는 그의 등을 꾹꾹 밀어내며 문밖으로 내쫓았다. 그는 순순히 그녀가 미는 대로 밀려나면서도 걱정되어 나가고 싶지 않다는 듯이 미세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런 표정 짓지 말고요.”
“제 표정이 어땠습니까?”
“음, 마치 억울하게 혼난 커다란 강아지 같았어요.”
그녀의 말에 리히르트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굳은 표정은 풀어졌으나 그럼에도 걱정스러운 감정은 사라질 줄 몰랐다.
“식은 건 다시 데워달라고 하고요. 알았죠?”
아나샤는 그의 과한 걱정을 모른 체하며 그에게 당부했다. 같이 내려가곤 싶지만 음식 냄새를 맡으면 또 울렁일 것 같아서 그의 방에 남아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 *
아나샤는 티타임에 초대를 받아 황녀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들뜬 얼굴로 향했을 테지만 황녀궁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얼굴엔 근심이 옅게 드리워져 있었다.
‘체한 게 이렇게 오래갈 수도 있나……?’
아나샤는 걸음을 옮기며 배를 슬슬 문질렀다. 이상 증세가 이어진 지 벌써 이틀째였다.
오늘도 식사를 하기 무섭게 또 속이 울렁거려 얼마나 난감했는지 모른다. 다행히 저번보다는 정도가 심하지는 않아 간단하게 먹을 순 있었지만 아나샤로서는 이 증세가 찝찝하기만 했다.
체한 거라면 하루 종일 울렁거리고 얹힌 느낌이 들어야 될 텐데 이상하게도 음식 냄새를 맡을 때만 증세가 나타났다. 그렇기에 별관 식당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진찰을 받으려고 해도 조금 지나면 금방 괜찮아져서 미뤄왔었는데 이제는 미뤄선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동시에 아나샤는 벌써부터 불안한 기분에 휩싸였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유 없이 죽기도 한다던데…, 설마 그런 병에 걸린 거면 어떡하지.’
단순히 체한 거였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닌 것 같다는 건 스스로 더 잘 알았다. 아나샤는 도착한 화려한 문 앞에 멈춰 섰다. 노크를 하고 잠시 뒤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와요, 아샤 경.”
자신을 따스하게 반겨주는 목소리에 아나샤는 애써 무거운 생각을 떨쳐내었다. 빠르게 밝은 얼굴로 돌아온 그녀는 예를 차리고서 엘리시아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조잘거리던 아나샤는 애인과 잘 지내냐는 물음에 금세 수줍은 태도로 바뀌었다.
“리히랑은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다행이네요. 작게라도 다툰 적은 없고요?”
“리히가 항상 제 투정을 다 받아줘서 싸울 일도 없는걸요.”
아나샤는 뺨을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곤 더 듣기를 원하는 엘리시아에게 최근에 그와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 주었다.
“…그냥 혼잣말로 한 얘기였는데 정말로 한 아름 가져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황녀님도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아직도 많이 남았거든요.”
엘리시아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조용히 아나샤를 바라보았다. 마냥 행복에 겨운 얼굴이 아닌 조금 시무룩한 얼굴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이다.
뒤늦게 아나샤는 작게 포옥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계속 받기만 하니까 뭔가 미안한 거 있죠? 저는 그만큼 줄 수도 없는데… 항상 잔뜩 받고만 있으니까요.”
“어떤 마음인지는 이해가 가지만 미안해할 필욘 없다고 생각해요. 서로 가진 양이 다르니 줄 수 있는 양도 다른 게 당연하죠.”
공작의 주머니 사정을 걱정한다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엘리시아는 조언했다. 아나샤를 위한 성을 지어도 평생 남아돌 정도의 재력을 지니고 있을 테니 말이다.
“아샤 경이 줄 수 있는 선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되지 않을까요? 아마 아샤 경이 주는 거라면 뭐든 기쁘게 생각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