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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60화 (60/87)

60화

“애초에 단장님이랑 얘기해 본 거야? 너.”

“그건 아니지만, 리히라면 분명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할 거니까…….”

“이 녀석아, 원래 연애 초에는 별도 달도 따다 준다고 할 때라고. 뭐든 들어줄 것처럼 해놓고 뒤에 가서 말 바꾸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단장 리히르트가 그렇게 가볍게 말을 바꿀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어느 정도 주의를 줄 필요는 있었다.

‘너무 좋아하진 말라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지금 연애하는 것을 보면 어릴 적에 리온 뒤만 졸졸 따라다녔던 것과 하나도 다른 점이 없었다. 만약 어떤 이유로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다면 아샤가 그 상실감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샤가 평범하게 어디 가문의 영애이고, 미래가 약속된 사이였다면 이렇게까지 걱정이 들진 않았을 텐데……. 크리스는 답답함에 연거푸 맥주를 들이켰다.

* * *

“두 사람 완전히 뻗었네요.”

엘빈은 맞은편 자리에서 나란히 뻗어있는 아나샤와 크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샤, 정신 들어?”

“으응… 무울…….”

“아샤는 우리 중 누가 부축하면 될 것 같은데, 크리스 선배가 문제네요.”

그나마 정신이 있는 아나샤와는 달리, 크리스는 아예 뻗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세 시간 동안 줄곧 술만 들이켰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마차를 불러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제가 다녀올게요. 그동안 두 사람 좀 봐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엘빈 경.”

엘빈이 술집 밖으로 나가고, 칼리프는 자리에 앉아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기사단 숙소까지 이 둘을 어떻게 옮겨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하다고 여길 때였다.

“무울…….”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칼리프는 물을 따라 그녀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나 아나샤는 푸욱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무울… 줘어어…….”

“여기 물 있지 않습니까.”

“…무우울.”

“하여간…….”

칼리프는 직접 물잔을 쥐고서 아나샤의 앞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들게 하고서 입 앞에 잔을 가져다 대주기까지 했으나 아나샤는 끔뻑끔뻑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할 뿐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아나샤 경, 물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입을 제대로 벌리든가 해야…….”

그 순간, 칼리프는 자신의 목을 와락 끌어안으며 매달리는 아나샤의 행동에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얼마나 강하게 당겼는지 잔에 담긴 물이 반쯤 밖으로 쏟아졌을 정도였다.

“…미쳤습니까?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리이히… 뽀뽀…….”

“이런 미친.”

칼리프는 와락 인상을 썼다. 술 냄새 풀풀 풍기며 제게 매달려 있는 아나샤를 떼어놓고 싶었으나, 놓으면 바로 뒤로 넘어져 버릴까 봐 그럴 수 없었다.

어서 엘빈이 돌아오길 기다릴 때였다. 술집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칼리프는 당연히 엘빈이라 의심치 않으며 고개를 돌렸다.

“…….”

나오려던 목소리는 순식간에 종적을 감췄다. 불쾌함을 숨기지 않은 벽안은 날카롭다 못해 매서웠다. 칼리프는 이쪽을 보고 있는 리히르트와 눈을 마주하자 목이 졸린 듯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하필이면 또…….’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칼리프가 빠르게 예를 갖추려던 순간이었다. 뺨에 쪽 하고 닿는 감촉에 칼리프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뽀…뽀해 조…….”

그 웅얼거림을 뒤로하고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날 칼리프는 살면서 뽀뽀에 이토록 간담이 서늘해져 본 적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 * *

두 시간만 마시고 돌아온다던 그녀는 세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초조한 기다림 끝에 리히르트는 보고 있던 업무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섰다.

다행히도 크리스 벨덴 경이 말한 ‘단골 술집’은 다른 기사들도 아는 곳이었다. 그렇게 술집의 위치를 아는 기사를 대동한 채 어느 작은 술집에 도착한 것이 대략 30분 전의 일이었다.

침실에 들어선 리히르트는 아나샤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편하게 잘 수 있게 겉옷을 벗기고 눕혀주기까지 했으나, 술이 덜 깬 아나샤는 누웠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허우적거렸다.

“…조올려. 누울 거야…….”

콧잔등을 찌푸리며 웅얼대는 말에 리히르트는 조용히 위에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왜 또 심술이 났는지 살짝 튀어나온 아랫입술이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른 이의 뺨에 닿았던 것이 떠오르자 조금은 얄미운 마음이 들었다.

술김에 착각을 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은 안다. 부단장의 뺨에 입술을 찍은 뒤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이름을 불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넘어가 줄 마음은 없었다.

“…조올러어…….”

“아샤.”

여전히 웅얼대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지그시 누르자 아나샤가 답답한지 작게 끄응 소리를 내었다. 그는 엄지 끝에서 조금 힘을 빼고서 아랫입술을 살살 쓸었다.

“다른 사람한테 또 술주정으로 뽀뽀할 겁니까?”

“으응…….”

“대답 안 하면 앞으로 다시는 술 약속은 금지입니다.”

엄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녹을 듯이 달달하기만 했다. 리히르트는 손을 옆으로 가져가 그녀의 뺨을 쓰다듬다가 긴 손가락으로 톡톡 하고 살며시 두드렸다.

“다른 사람에게 뽀뽀한다는 걸로 알겠습니다.”

“…으으응, 아니이.”

금방이라도 잠에 들 것처럼 잠기운이 어린 목소리였다.

그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뺨을 만지작거렸다. 평소에는 그녀의 장난을 너그럽게 받아주었다면 지금은 역으로 그녀를 괴롭히는 것에 조금 흥미를 느끼는 중이었다.

“그럼 안 할 겁니까?”

“으응. 그치마안…….”

아나샤는 커다란 손에 뺨이 잡힌 채로 배시시 웃었다.

“리히는 뽀뽀 처언 번 해줄게에.”

“정말입니까?”

“응. 뽀뽀 처언 번…….”

“약속했습니다.”

“응…….”

“정말로 해줘야 합니다.”

입술을 살짝 벌린 상태로 아나샤는 그대로 잠들었다. 리히르트는 그녀의 뺨에서 손을 거둔 채 고개를 숙였다. 세상모르게 잠이 든 얼굴이 사랑스러워 그는 한동안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그는 그녀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낮은 속삭임이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아샤.”

“…….”

“저와 함께 살지 않겠습니까? 응, 아샤?”

그러곤 재촉하듯이 그녀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리히르트는 그녀가 깨지 않게 조용히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술김에라도 대답해 주길 바랐으나 깊이 잠든 그녀는 색색 숨소리를 낼 뿐이었다.

사실 잠든 그녀에게 청혼을 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이전에는 결혼을 이익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여긴 적이 있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결혼에 대한 모든 생각이 달라져 있었다.

먼 미래에도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오붓하고 따스한 방 안에서 그녀와 웃으며 보내는 일상은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만일 아이가 생긴다면 그녀를 빼닮아 사랑스러울 터였다.

결혼에 대한 어떤 기대도, 생각도 없던 과거와는 달리 최근의 그는 진심으로 결혼을 바랐다. 지금도 거의 매일을 함께 지내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욕심이 들었다.

기사단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약속한다면 그녀는 제 청혼을 받아들여 줄지도 모른다.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책임질 준비가 되어있고, 그걸 가능케 할 재력과 권력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녀가 진심으로 결혼을 원할지,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녀를 위한 일인지도 말이다. 애당초 그녀가 원하는 삶은 첩자로서 사는 것이지 결혼이 아닐 테니까.

리히르트는 그녀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서 또 한참 동안 잠든 얼굴을 감상했다.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 욕심도 포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행복감이었다.

뒤늦게 그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 * *

아나샤는 멍한 눈을 굴렸다. 하얀 햇살이 내려앉은 침대 위의 풍경은 익숙했다. 옆자리에 그가 없다는 것만 빼면 평소의 아침과 다를 바 없었다.

어제 얼마나 마셨으면 이곳까지 어떻게 온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언뜻언뜻 그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 어젯밤 그가 자신을 데리고 온 건가 싶었다.

아나샤는 하품을 터뜨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푹신한 침대 위에서 얼마나 더 꾸물거렸을까.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제야 아나샤는 이불 밖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한 손에 투명한 잔을 든 채 리히르트는 아나샤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일어나 앉은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선 물었다.

“속은 괜찮습니까?”

“네에… 그럭저럭요. 그건 뭐예요?”

“숙취에 좋은 차입니다.”

“역시 리히, 목말랐는데 고마워요.”

제 몸을 챙겨주는 건 그밖에 없다고 여기며 아나샤는 냉큼 그가 건네주는 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한 모금도 남기지 않고 들이켜고선 고개를 들었다.

“어제 리히가 저 데려온 거예요?”

“네. 기억 안 납니까?”

“하나도요. 혹시 밤새 저 찾아서 돌아다닌 건 아니죠? 술집이 한두 개가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

“술집을 알고 있는 기사에게 안내받았습니다.”

“휴… 다행이다. 미안해요. 어제 두 시간만 마시기로 했는데 약속 못 지켜서요. 괜히 고생만 시키고…….”

“그렇게 말하면 섭섭합니다. 아샤. 사과 대신에 아침 식사로 뭘 먹고 싶은지 얘기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리히르트는 그녀의 손에서 빈 잔을 가져가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나샤는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어제 이상한 말 하거나 그러진 않았죠……?”

취하기 전 크리스 삼촌과 결혼 얘기로 열을 올렸던 것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혹여라도 술에 취한 채 그에게 결혼 어쩌고 했을까 봐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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