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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59화 (59/87)

59화

크리스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딸아이의 방에 쳐들어가 딸의 남자 친구를 끌고 나오고 싶은 아버지의 심정이 이러할까.

그러나 크리스는 인내했다. 자신은 기사단의 팔불출들과는 다르다고 여기며 애써 침착하게 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에 그제야 단장실 안에서 울리던 쪽쪽 소리가 멈췄다.

“…어떡해요. 누가 왔나 봐요.”

급하게 입술을 뗀 아나샤가 작게 속닥거렸다. 이에 리히르트도 모든 행동을 멈춘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뽀뽀하는 소리… 들리진 않았겠죠?”

발그레한 뺨과 살짝 흐트러진 옷매무새, 그리고 작은 입술은 투명하게 젖어 반질거리고 있었다. 놀란 모습조차 사랑스러워서 리히르트는 고개를 숙여 통통한 아랫입술을 삼켰다.

누르고 있던 흥분은 다시 순식간에 그를 덮쳤다. 그녀를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숨겨놓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니 그녀와 함께 아무도 없는 곳에 평생 단둘이 있고 싶다. 이 짧은 순간도 방해받지 않도록.

그 수많은 생각들을 누른 채 리히르트는 조용히 입술을 떼며 속삭였다.

“…좀 더 키스하고 싶습니다.”

그가 이어서 다시 입술을 맞추려 하자 아나샤는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안 돼요. 듣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작은 손바닥에 쪽 하고 입술을 찍었다. 따스한 숨결이 손바닥 안을 간질이자 아나샤는 손가락을 움츠렸다.

“…그럼 밖에 있는 사람에게 이따가 오라고…….”

“크흠!”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온 헛기침 소리에 아나샤는 화들짝 놀라며 널찍한 품을 밀어냈다. 언제 들어온 것인지 문 앞에 선 크리스 삼촌이 못마땅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멋대로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얼마나 열중하고 있었으면 노크 소리가 다 안 들렸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죄송하게 됐습니다.”

절대 죄송하지 않은 얼굴로 크리스가 사과하자 아나샤는 대번에 당황한 얼굴로 버벅댔다.

“뭐, 뭘 열중해. 그냥 생각에 잠겨있느라 못 들은…….”

“입에 침이나 바르고…, 아니 이미 발라져 있네. 그것도 잔뜩.”

아나샤는 황급히 팔을 들어 입술을 문질렀다. 그 모습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크리스는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에 시간 비지? 아샤.”

“…비는데 왜?”

“오랜만에 얘기나 좀 하자고. 아무튼 저녁에 거기 어디냐, 단골 술집 앞에서 만나.”

“뭐야, 이 얘기 하러 온 거야?”

“아니 한 가지 더 얘기하러.”

크리스는 아나샤를 보고 있던 시선을 옮겨 리히르트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아샤랑 단둘이 있을 때는 단장실 문은 활짝 열어놓고 계셔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실례했습니다.”

최근 들어 물러졌다는 평이 자자한 그답게 리히르트는 별말이 없었다. 그녀만 생각하느라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귀에 들어오지 않는단 게 옳았지만 말이다.

대신 아나샤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발끈한 얼굴로 외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리스는 유유히 단장실을 빠져나갈 뿐이었다. 정말 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정말… 유치하게.”

아나샤는 씩씩대며 문으로 걸어가 직접 문을 닫았다. 그러곤 리히르트에게 다가가 그에게 포옥 안겼다.

“안 되겠어요. 오늘 삼촌한테 크게 한턱 쏘라고 해야지. 리히도 갈래요? 맥주랑 안주가 엄청 맛있는 곳인데.”

“처리해야 될 서류가 많아서 같이 못 갈 것 같습니다.”

리히르트는 양손을 들어 아나샤의 뽀얀 얼굴을 감쌌다. 엄지로 보드라운 뺨을 천천히 쓸며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늦기 전에 돌아오십시오. 기사단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되는데… 피곤하잖아요.”

“어차피 밀린 일 때문에 남았어야 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알겠어요. 그럼 적당히 두 시간 정도 마시다가 돌아올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나샤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이 맛있는 걸 먹고 오는 동안 그는 일을 해야 되니 말이다.

아나샤는 까치발을 들어 올렸다.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춘 뒤 말했다.

“저녁에 미리 힘내라구요. 그, 이걸로 힘이 날진 모르겠지만…….”

뺨을 긁적이며 아나샤는 슬쩍 그의 표정을 살폈다.

좋아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 생각은 채 몇 초도 이어지지 못했다. 곧바로 그가 고개를 숙여 쪽쪽 소리가 날 만큼 입을 맞춰왔기 때문이다.

“리히, 그만… 일 밀렸다고 했…….”

그렇게 단장실에서는 다시 한동안 쪽쪽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 * *

해 질 녘이 되자 크리스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 술집 안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서 언제 올지 모를 아나샤를 기다리며 안주 몇 개를 주문했다.

주문한 음식이 모두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나샤는 나타났다. 뒤에 커다란 사내 둘을 달고서 말이다.

“부단장님이 여기 맥주 좋아하거든. 그래서 생각나서 물어봤는데 좋다고 해서 데려왔어. 그리고 엘빈은 오다가 만나서 데려왔고. 물론 당연히 삼촌이 쏘는 거 알지?”

“뭘 멋대로…….”

“다들 들었죠? 오늘은 크리스 삼촌이 쏜다니까 많이들 드세요!”

해맑은 얼굴과는 달리 목소리에는 사악함이 섞여있었다. 미소를 띤 채 아나샤는 크리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칼리프와 엘빈이 맞은편에 착석하자 아나샤는 자연스럽게 맥주 네 잔을 주문시켰다.

크리스는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자신이 살 생각이었으니 쏘는 건 그렇다 쳐도 이게 대체 무슨 조합인가 싶었다.

‘엘빈이야 그렇다 쳐도 부단장님이랑은 언제 저렇게 친했대? 그래도 단장님 안 데려온 게 다행인가…….’

크리스는 잠시 이 술자리에 무표정한 백금발의 사내가 앉아있는 상상을 했다. 상상만으로도 이질감과 어색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크리스는 생각을 접고서 옆에서 떠들고 있는 아나샤와 엘빈을 바라보았다.

“…왠지 다 좋아할 것 같아서 말이야. 으음, 보통 남자들은 선물로 뭘 받으면 좋아해?”

“나는 먹을 거.”

“너 생일 말고 엘빈.”

아나샤의 말에 엘빈은 담담한 얼굴로 질문했다.

“생일이 언제이신데?”

“겨울.”

“겨울이면 몇 달이나 더 남았잖아.”

“그래도 미리 생각해 두면 좋잖아. 안 그래요? 부단장님?”

아나샤는 칼리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칼리프는 의외라는 듯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나 봅니다?”

그의 말에 순간 테이블 위가 조용해졌다. 뒤늦게 엘빈은 드물게 놀란 얼굴로 칼리프를 돌아보았다.

“부단장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정말 모르십니까?”

“뭘 말입니까? 엘빈 경.”

“정말 모르실 줄이야…….”

엘빈과 크리스는 믿기 힘든 눈으로 칼리프를 바라보았다. 기사들이 그 난리를 피워댔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냐는 눈빛이었다.

“…대체 뭔데 그럽니까?”

“큼, 정말 모른다고 하니 알려드리죠. 아샤와 단장님은 연인 사이입니다. 사귄 지 좀 됐죠.”

크리스의 말에 칼리프는 맥주를 들이켜다 말고 그대로 다시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턱 밑으로 맥주가 줄줄 흘러내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단장님과… 그런 사이…라는 게 진짭니까?”

“뭐예요, 그 반응은!”

경악스러운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얼굴은 도저히 믿기 힘든 얘길 들은 사람 같았다.

“…아나샤 경과 단장님이… 어떻게…….”

칼리프는 다시 잔을 들어 올리고선 빠르게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가 그렇게 리히랑 안 어울리나…….”

아나샤는 툴툴대며 술을 홀짝였다.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아샤. 너 요즘 퇴근하고 단장님 저택으로 가지?”

그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나샤는 뜨끔하며 하마터면 사레에 들릴 뻔했다. 그 당황한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던 크리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줄 알았다……. 하아. 요즘엔 숙소에는 아예 들르지도 않고 말이야. 너 때문에 네 삼촌들이 걱정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렇게 시작된 크리스의 잔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져 갔다. 아나샤는 안 들리는 척 딴청을 피우면서 계속해서 맥주를 들이켰다. 맛있는 맥주가 없었다면 진즉에 도망쳤을 것이다.

“연애도 좋지만 네 인생이 더 중요하다는 거 잊지 마. 너도 알겠지만 연애는 언젠간 끝이 있잖냐.”

“…….”

“지금은 마냥 행복해도 결국 결혼을 하는 게 아니라면 헤어지게 된다는 소리야. 단장님은 나중에 후사도 둬야 할 텐데 그 문제를 언제까지고 생각 안 할 수도 없잖아.”

“푸하, 삼촌이 말 안 해도 나도 알거든?!”

괜히 울컥한 아나샤는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한 번에 많이 마셔서 그런지 벌써부터 조금 알딸딸한 기운이 올라왔다.

“결심했어. 나 삼촌이 짜증 나서라도 리히랑 결혼할 거야.”

그 폭탄 발언에 크리스는 아이고 소리를 내며 뒷목을 잡았다. 술을 들이켜고 있던 칼리프와 엘빈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너… 결혼 얘길 그렇게 쉽게 하는 거 아니다.”

“그러니까 자꾸 나 짜증 나게 하래? 확 해버려?”

“그래, 해라! 해! 누가 말린댔냐?!”

두 사람의 말다툼에 엘빈은 “와 둘 다 똑같네요.” 하고 중얼거렸다.

“근데 나 진짜 결혼 생각 있어. 쉽게 얘기한 거 아니야.”

“뭐…….”

“물론 삼촌이 짜증 나서 한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사실 예전부터 생각하긴 했단 말이야. 아무래도 내 인생에 리히가 없는 건… 도무지 상상이 안 가서 만약 리히가 결혼하자고 하면 할 거야.”

“아샤, 그럼 일은 그만두게?”

“아니, 나 일 안 관둘 건데?”

엘빈의 물음에 아나샤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첩자 일을 내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어. 할머니 되기 전까지 안 관둘 거니까 걱정 마셔!”

“공작 부인이 돼서도 기사단 첩자 일을 하겠다고? 그게 무슨…….”

너무 당당해서 크리스는 어디부터 따져야 될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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