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아나샤가 옷을 입기 위해 이불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두꺼운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더니 다시 그녀를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다.
“리히?”
“오늘 하루는 침실 안에서만 보내는 게 어떻습니까? 식사는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여기서 먹자고요? 음, 저는 딱히 상관없으니까 리히 마음대로 해요.”
리히르트는 침대 밖으로 나와 옷을 걸쳤다. 그러곤 여전히 이불 안에 있는 아나샤에게 다가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금방 가지고 오겠습니다.”
“네, 다녀와요.”
어쩐지 만족스러워 보이는 그의 모습에 아나샤는 의아해하면서도 침실을 나서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침실 안에서만 보내자던 그의 말은 진심이었는지 아나샤는 그날 내내 침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나가려고만 하면 그는 귀신같이 알아차리곤 자신을 붙잡아 침대 위에 눕혔다. 그렇게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그의 방 안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가 함께 있어 답답하지는 않았으나 몸이 조금 찌뿌드드했다.
점심을 먹고 나른해지자 아나샤는 잠을 깨기 위해 넓은 그의 방 안을 돌아다녔다. 어느새 구경하는 것에 몰두해 보물찾기라도 하듯이 가구들을 일일이 열어보기 시작했다.
“리히, 이건 뭐예요?”
“장식용으로 둔 물건일 겁니다. 가져도 됩니다.”
“이건 술이에요?”
“테리오산 와인입니다. 마셔도 됩니다.”
뭘 자꾸 주려고 하는 그의 말에 아나샤는 푸스스 웃었다. 다시 장식장 안을 살펴보던 중 아나샤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아래 칸에 놓여있는 작은 보석함이었다.
금테가 둘러져 있는 보석함은 장인의 세공품이 아닌가 싶을 만큼 고급스러웠다.
“저 이거 한번 열어봐도 돼요?”
“그건…….”
그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으나 이내 곧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귀중한 물건이기에 그가 보여주는 것을 다 망설이는 건가 싶었다.
아나샤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보석함을 열었다. 희귀한 보석이나 번쩍거리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 여기며 말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정말 어울리지 않게도 꾸깃꾸깃하게 접은 쪽지들이 담겨있었다. 아나샤는 실망스러운 눈으로 종이쪽지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익숙한 기분이 들어 쪽지 하나를 펼쳐보았다.
[단장님 좋은 아침이에요!]
역시나 자신의 필체였다. 아나샤는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이거 다 보관하고 있었어요?”
수북한 것을 보니 자신이 그의 책상 위에 몰래 올려놓았던 쪽지들을 전부 모아둔 모양이었다. 아나샤는 더 읽기 부끄러워져서 보석함을 닫았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다시 읽은 건 아니죠?”
“혼자 있을 때 종종 읽습니다.”
“아악! 부끄럽게 왜 읽는 거예요!”
뭐라고 썼었는지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날씨가 좋다는 둥, 밥이 맛있었다는 둥, 아무 말이나 썼을 게 분명했다. 이렇게 그가 보관하고 있을 줄 알았다면 좀 더 고민하며 근사한 말들로만 썼을 테다.
“편지야 언제든 써줄 테니까요… 이런 거 일일이 보관하지 않아도 돼요. 저는 당연히 예전에 버렸을 줄 알았는데…….”
“그대가 처음으로 직접 써준 것인데 어떻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간지러운 소리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얘기하는 그 때문에 아나샤는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동시에 이런 쪽지 하나도 소중히 여겨주는 그가 고마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나샤는 그대로 펄쩍 뛰어 그에게 안겼다. 그가 너무 예뻐서 얼굴 이곳저곳에 입술을 찍어대자 곧 그가 자신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의 품에 안긴 채 아나샤는 다시 침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마지막 휴일도 방 안에서만 보낸 두 사람은 다음 날 같은 마차를 타고 출근했다. 연애 사실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앞으론 당당하게 붙어 다니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그날, 황실 제5기사단은 발칵 뒤집혔다.
9장 작은 엇갈림 (1)
아나샤와 기사단장이 함께 출근하는 모습에 기사단이 뒤집힌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두 사람의 연애 사실에 기사들의 반응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부류와 절대 인정 못 한다는 부류로 말이다.
갑자기 휴가를 내고 사라진 기사단장이 아나샤와 함께 돌아왔다. 휴가 내내 두 사람이 함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기정사실화되자 강경파 삼촌들은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불건전한 관계는 인정할 수 없다며 이를 가는 기사들이었으나 그런 것치곤 그들은 잠잠한 편이었다. 매일 행복한 듯 웃고 있는 아나샤의 모습에 다들 마음이 약해져 버린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나샤를 아끼는 만큼 그들의 눈에는 리히르트의 모든 행동들이 전부 아니꼽기만 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도 말이다.
“저거저거, 또 아샤한테 붙어있는 거 봐라.”
오늘도 리히르트를 주시하는 시선들은 조금도 곱지 못했다. 멀리서 아나샤와 나란히 걷고 있는 그의 등을 향해 고정된 스무 쌍의 눈들은 하나같이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어쭈. 허리를 감아? 허리르으을?”
“…저 도둑놈 안 되겠는데?”
“덩치 큰 놈들끼리 모여서 또 뭘 하나 했더니…….”
금방이라도 뭔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모습에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참 질리지도 않는다고 여겼다.
“너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단장님이신데 말을 너무 막 하는 거 아니냐?”
“그래서 몰래 하잖아. 그리고 내가 아샤 삼촌인데 지가 뭐 어쩔 거야.”
“바론 말이 맞다. 단장님이시니까 우리가 이렇게 보고만 있는 거지, 아니었어 봐. 확 그냥!”
“그래. 우리들도 할 말이 많지만 안 하고 있다 이 말이야!”
기사들이 한마디씩 거들며 외치자 크리스는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이 바보들을 어떻게 말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네놈들 딴에는 참고 있는 건진 몰라도, 남들 눈에는 금방이라도 검 빼 들고 달려들 것 같은 눈깔로 단장님을 노려보고 있다고! 어?! 암만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기강은 유지해야 될 거 아니야? 불경죄로 잡혀 들어가고 싶어?”
“허, 기강?”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뀐 바론이 별안간 눈에 핏대를 세웠다.
“그런 걸 생각하는 인간이 대낮부터 기사단에서 저러고 있겠어? 지금 저놈 머릿속에는 말이야! 순진한 애를 어떻게 구워삶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단!! 읍, 읍!”
격분한 외침에 크리스는 황급히 바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곤 미쳤냐고 욕을 했으나 바론은 배 째라는 양 당당하기만 했다. 바론뿐 아니라 다른 기사들의 반응도 비슷하기만 했다.
“설령 들었어도 아무 일도 없었을걸. 그냥 무시하고 말았겠지.”
“기강을 유지하긴 개뿔이… 제일 기강이 해이해진 사람이 단장님인데 누가 누구의 기강을 바로잡아?”
기사들이 이렇게까지 대담해진 이유라면 있었다. 사소한 실수조차 봐주는 것 없이 칼 같기만 하던 기사단장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카롭게 벼려진 기세는 어디 가고 지금은 사람이 이렇게 여유로울 수 없다는 듯이 느슨하기만 했다. 여전히 다가가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으나 굉장히 물러진 것은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아샤의 삼촌’이라는 가장 큰 무기가 있으니 두려울 게 없을 정도였다.
“그래, 단장님은 들어도 그냥 무시하고 만다고 쳐. 아샤가 들으면? 너네가 이러는 거 아샤가 모를 줄 알아?”
“…….”
“…….”
크리스의 말에 기사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 기세를 몰아 크리스는 이제껏 참아왔던 말들을 쏟아내었다.
“용기 내서 연애 사실을 털어놨는데 너네가 이러면 애가 얼마나 속상하겠냐. 애초에 그렇게까지 나쁘게 볼 필요는 없잖아. 난 솔직히 단장님 정도면 남자로서 괜찮다고 보는데. 여덟 살 어린 애를 만나는 건, …그래. 도둑놈이라고 쳐. 하지만 아샤가 또래랑 만났으면 그건 그거대로 불안했을걸.”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기사들은 더욱 주눅이 든 채 크리스의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샤한테 잘하는 거 보니까 일단 합격이고. 성격도 책임감 있고 진지하니까 안심은 되잖아? 어디 사는지 모를 어린놈보다는 백배 낫지.”
“…이봐, 크리스. 누가 그걸 몰라?”
조용히 듣고만 있던 기사들 중 하나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말이다! 그래서 더 짜증 난다고! 뭐 꼬투리 잡을 게 있어야지, 쓸데없이 완벽한 인간이라 말리지도 못하겠다고!”
연애는 물론 결혼 상대로도 너무 완벽해서 더 불안했다. 이러다 아나샤가 덜컥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을까, 기사들은 모두 두려운 심정이었다.
그들로서는 아나샤가 정말로 원하는 일에 반대할 재간이 없었다. 결국 아나샤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모두 축하한다고 웃거나 혹은 울고 있을 것이다.
“난 아직 우리 아샤 못 보낸다!”
“요만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옳소! 연애도 불안해 죽겠구만, 결혼?!”
분통을 터뜨리는 기사들의 모습에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 팔불출들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너무 앞서나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크리스는 두 사람의 미래가 조금 걱정되었다. 연애는 결국 끝이 있기 마련이다. 지체 높은 공작 가문의 가주가 언제까지고 후계를 두지 않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샤를 부인으로 맞이하든, 다른 귀족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하든 둘 중 하나는 해야 될 테다.
‘아직은 먼 얘기겠지만…….’
중요하게 할 얘기도 있겠다, 이참에 아샤의 생각은 어떤지 물어봐야겠다고 여겼다.
그날 오후 크리스는 저녁 약속을 잡기 위해 아나샤를 찾았다. 보나 마나 단장실에 있을 게 뻔했기에 그는 바로 단장실로 향했다.
문 앞에 도착한 크리스가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그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순간 귀를 의심했다.
분명 쪽쪽거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대낮부터 뽀뽀에 열중하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크리스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여겼다. 애초에 이 안에 있을 사람이 두 사람 빼고 더 있겠냐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