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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57화 (57/87)

57화

“필요하면 가져가도 됩니다.”

“제 방에 이거 놓으려면 제 침대부터 빼야 될걸요? 근데 여기 이 방은 뭐예요?”

“침실입니다. 들어가도 됩니다.”

리히르트의 허락에 아나샤는 “그럼 실례할게요.” 하고 말하고는 곧바로 문을 열었다. 침실 역시 넓었는데 가구가 적은 편이라 그런지 좀 더 단정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늘 그에게서 나던 시원하고 좋은 향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깔끔한 게 리히 성격이 잘 드러난다고 해야 될까…, 그보다 향이 너무 좋아.’

생각에 잠긴 채 아나샤는 천천히 침실 안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창문과 벽 한 면에 걸려있는 액자가…….

아나샤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뚫어지게 봐도 액자 속에 그려져 있는 사람은 분명 자신이었다.

“악! …저게 왜, 왜 여기에…….”

입술을 크게 뻐끔거리며 아나샤가 액자만 가리키고 있자 리히르트는 조금 난감한 듯 느리게 운을 뗐다.

“받았습니다.”

“아니, 받은 건 그렇다 쳐도 저런 걸 왜 방에다 걸어두고 있는 거예요…….”

누가 볼까 봐 부끄럽다며 아나샤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었다.

“저거 내려주세요. 아니 제가 직접 내릴래요.”

“제법 무겁습니다.”

리히르트는 그녀가 다칠세라 먼저 다가가 액자를 떼어냈다. 그러곤 침실 한편에 소중히 내려놓았다. 창피하니 뒤집어 놓으라는 아나샤의 말에 벽을 보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놀라긴 했지만, 아무튼 방 잘 봤어요…….”

아나샤는 여전히 액자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침실을 나섰다. 제법 밤이 늦었으니 객실에서 자거나 기사단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여길 때였다.

“아샤, 나갈 겁니까?”

자신을 붙잡아 세우는 손에 아나샤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주쳐 온 푸른 눈은 부드러웠으나 숨김없이 따스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좀 더 같이 있고 싶습니다.”

커다란 손에 감싸인 손이 어쩐지 뜨거웠다. 그는 금방이라도 놓아줄 것처럼 힘은 주지 않고 살며시 붙잡고만 있었지만, 아나샤는 그래서 더욱 놓기 힘들었다.

그의 손안에서 손가락만 꼼질거리던 아나샤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조금만 더 있을까요?”

‘그러겠다고는 했지만…….’ 아나샤는 답지 않게 다소곳하게 무릎에 두 손을 얹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약간은 긴장한 얼굴이었다.

조금 더 같이 있겠다는 말을 하고 몇 시간을 더 그와 함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 계속 미루고 미루다 보니 어느새 밤은 깊어져 있었고 말이다.

가벼운 뽀뽀를 시작으로 어느 순간 분위기에 휩쓸려 그와 소파에 누워 키스까지 해버렸다.

이대로 두 번째 밤을 맞이하는 건가! 싶을 때 그가 먼저 씻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왔고, 아나샤는 얼떨결에 그의 욕실로 들어가서 씻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그의 옷을 빌려 입고서 침실에 앉아있는 중이었다.

아나샤는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물소리에만 집중한 채 침을 꼴깍 삼켰다. 얼마 안 가 물소리가 끊기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또 하는 거겠지?!’

처음도 아닌데 이상하게 처음보다 더 떨렸다.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나샤는 다시 마른침을 삼키고서 욕실에서 나오는 그를 힐끔 보았다.

그는 편하게 바지만 입은 채였다. 한번 앞머리를 쓸어 올린 리히르트가 그대로 침대로 걸어오자 아나샤는 홱 고개를 숙였다. 심장박동 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머지않아 발소리가 그녀 앞에서 끊기고 짙은 그림자가 그녀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아샤.”

낮은 부름에 아나샤는 슬그머니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젖은 머리를 말리기 위해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러곤 곧장 입술을 맞대어 왔다.

탄탄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은 채 키스하던 그는 아주 천천히 그녀를 뒤로 눕혔다. 리히르트는 점차 손을 위로 움직여 그녀의 목덜미를 손끝으로 쓸었다. 긴장한 것인지 뒷목에는 힘이 실려있었다. 리히르트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내고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샤. 무섭습니까?”

“무서운 건 아닌데 조금 긴장돼서…….”

두 눈만 꼭 감고 누워있던 아나샤는 뒤늦게 눈을 뜨고서 눈동자를 굴렸다. 그 모습을 바로 위에서 지켜보던 리히르트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쪽 하고 이마에 입을 맞춘 그는 나지막이 운을 뗐다.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저도 하고 싶은걸요.”

“그래도 긴장한 상태면 힘들 겁니다.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테니,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조용히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했다.

“그대가 먼저 만져달라고 할 때까지 그대에게 손대지 않겠습니다.”

아나샤는 작게 고개를 주억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제가 리히를 만지는 건요?”

“만지고 싶습니까?”

“엄청 만지고 싶은 건 아니구요! 그, 리히가 싫다면 안 만질게요.”

“아샤, 저는 그대의 것이니 허락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그대가 만져주는 거라면 언제든 좋습니다.”

마음껏 만져도 된다는 말에 아나샤는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으나 피하지는 않았다. 슬그머니 한쪽 손을 들어 올린 그녀는 그대로 그의 복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물기가 남아있는 상반신은 매끄러웠다.

복부를 천천히 쓸어내리자 손길이 닿는 곳마다 움찔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나샤는 그 반응이 귀엽게 느껴지는 한편, 좀 더 그를 자극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다른 곳도 한번 만져봐도 돼요?”

“어디가 만지고 싶은진 몰라도, 됩니다.”

“그럼요… 엉덩이 만져봐도 돼요?”

장난기가 발동한 얼굴로 아나샤가 묻자 리히르트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아나샤의 손은 과감하게 그의 엉덩이 위에 안착했다.

바지를 입고 있어 맨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막상 만지려니 왠지 부끄러웠다. 아나샤는 조심스레 손을 움직여 보았다. 엉덩이에도 근육이 발달한 건지 살집 없이 단단하기만 했다.

‘리히, 지금 무슨 표정일까…….’

어쩌면 붉게 얼굴을 물들이고 있을지도 몰랐다. 부끄러워하는 그의 표정이 보고 싶어 아나샤는 슬쩍 눈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엉덩이를 조물거리면서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푸른 눈이 느긋하게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 눈웃음에 되레 당황한 아나샤는 손을 떼었고 말이다.

“더 안 만져도 되겠습니까?”

“이, 이제 됐어요. 그보다 리히 은근히 즐기고 있죠?”

아나샤의 의심스러운 눈빛에 그는 말없이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침대 위에서 한참을 속삭이며 얘기를 나누었다. 웃는 사이 긴장은 자연스레 눈 녹듯 사라져 갔다. 대신 알 수 없는 간지러운 열기가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아나샤는 두 손을 뻗어 날렵한 뺨을 감쌌다. 그러곤 아래로 당겨 그의 입술에 먼저 입을 맞췄다.

“리히, 저 만져줘요.”

그 말에 리히르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입술을 겹쳐왔다. 아니샤는 눈을 감은 채 서툴게 그와 입을 맞추었다.

서로의 숨과 타액이 뒤섞이며 야릇한 소리가 침대 위를 가득 매웠다. 키스가 길어질수록 부드럽기만 하던 그의 움직임은 점차 조급해져 갔다. 한참 뒤 그는 입술을 떼어냈다. 아래에 있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리히르트는 입을 열었다.

“…아샤. 해도 되겠습니까?”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아나샤의 귓전에도 내려앉을 만큼 그는 흥분한 상태였다. 그리고 아나샤 또한 마찬가지로 흥분으로 달뜬 얼굴이었다.

“좋아요… 얼른요.”

보채는 목소리가 사랑스러워 리히르트는 금방이라도 그녀를 안고 싶었으나 그는 대신 둥근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어서 미약하게 열이 오른 뺨과 콧등에도 키스하고선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잠시 침대에서 내려와 협탁 위에 있는 물건들을 가져왔다. 그녀가 씻는 동안 준비해 둔 관계를 위한 것들이었다.

“조금이라도 아프면 할퀴지 말고 때리십시오, 아샤.”

“알겠습니까?”

하고 묻는 진지한 목소리에 아나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웠으나 첫날밤에 비하면 창피함은 덜했다.

“이번엔 더 조심스럽게 하겠습니다.”

그녀 아래에 자리 잡은 리히르트는 아나샤의 오른발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그러곤 어깨에 편히 올려놓은 채로 발목 안쪽부터 종아리, 허벅지를 따라 천천히 입술을 갖다 대었다. 쪽쪽 하고 작게 들려오는 소리와 그 야한 모습에 아나샤는 부끄러워져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게 웨일그레슬 공작의 침실에서 두 번째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뺨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간지러움에 아나샤는 어렴풋이 잠에서 깼다. 그것이 누군가의 손길이라는 것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손길은 이내 이마에서도 느껴졌다. 한 올 한 올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에 아나샤는 비몽사몽한 채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앞에는 그가 있었다. 다정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가 이내 고개를 숙여 뺨에 키스했다.

“더 안 자도 되겠습니까?”

“으음, 네에…….”

들려온 부드러운 저음에 아나샤는 가만히 그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아침 햇살이 내려앉은 침대 위는 따뜻하고 아늑했다.

“어제 아프진 않았습니까?”

“…어제는 하나도 안 아팠어요. 오히려 너무 좋아서…….”

몇 번이나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버렸던 것 같다. 저번에 너무 아파했던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인지 어젯밤 그는 하나하나 세심하게 신경 써주었었다. 동시에 드문드문 떠오른 기억들에 아나샤는 조용히 이불을 끌어 올렸다.

“리히를 위해서라면… 뭐 아파도 상관없는걸요.”

아나샤는 몸을 돌려 꼬옥 그를 안았다. 체격 차이로 인해 안겨있는 모습에 더 가까웠지만 자신보다 큰 사내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대로 두 사람은 침대 위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 채 누워있던 두 사람은 아나샤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리면서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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