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리히랑 더 가까워지고 싶어요. 다른 연인들처럼 저도 리히랑 깊게 사, 사랑을 나누고 싶단 말이에요.”
용기를 내서 꺼낸 말인 만큼 아나샤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기지 않은 채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곤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리히가 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말은 기폭제가 되어 그의 인내심을 단번에 한 줌의 재로 만들었다. 리히르트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 순식간에 높아진 시야에 아나샤는 그의 어깨만 붙잡고서 그가 걸어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넓은 침대가 보이자 아나샤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윽고 내려지는 몸에 눈을 감자 등 뒤로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몇 번 출렁이던 침대 위가 잠잠해지고, 코앞에서 간질간질한 숨결이 느껴졌다.
“아샤.”
그 나직한 부름에 아나샤는 눈을 떴다. 뜨거운 열망이 고인 눈동자는 평소의 차분한 호수를 연상시키던 눈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 하지만 다정함만은 변하지 않았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다가온 커다란 손은 자신의 머리를 조심스레 쓸어 넘겨주었다. 마치 자신이 대답하기 전까지는 조금도 거칠게 굴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이제껏 그와 함께했던 순간 중 싫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첫 고백도, 첫 키스도 전부 황홀하고도 좋았을 뿐이다. 그러니 이번도 분명 좋을 것이다.
“중간에 그만두지 않을 겁니다.”
조용히 타이르듯 말한 그는 하얀 이마와 콧등, 뺨에 연이어 키스했다.
“그대가 울어도 안 놔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좋아요. 그리고 울면 달래줄 거잖아요.”
작게 웃으며 아나샤는 다가온 그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그러곤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좋아해요, 리히.”
살짝 입술을 떨어뜨려 말한 아나샤는 다시 그에게 키스했다. 깊어지는 키스를 시작으로 두 사람의 밤 또한 점차 깊어져 갔다.
* * *
아나샤는 부스스 눈을 떴다. 잠기운에 흐릿하던 시야가 맑아지며 푸른 벽안이 나타났다. 제 모습을 고요히 담고 있는 한 쌍의 눈과 마주하기 무섭게 아나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허리를 감아 바짝 끌어당기는 그의 팔이 아니었다면 분명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을 것이다.
“잘 잤습니까?”
“…아, 고마워요. 리히도 잘 잤어요?”
“네. 덕분에 푹 잔 것 같습니다.”
쪽, 하고 이마에 닿는 감촉은 더없이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아나샤는 그를 올려다보던 시선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사랑하는 사람과 처음 맞이하는 아침이 아직까지는 낯설었다.
고개를 내리자 눈앞에는 넓고 탄탄한 가슴팍이 펼쳐져 있었다. 그제야 아나샤는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팔뚝이, 이불 속에서 은근히 닿아있는 몸이 매끄러운 맨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순식간에 온몸의 열기가 얼굴로 몰려왔다.
“리, 리히! 일단 우리 오, 옷부터 입어요.”
어깨에 걸쳐져 있던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 올리며 아나샤는 황급히 말했다. 리히르트는 “알겠습니다.” 하고 나직이 대답하고는 이불 밖으로 나섰고 말이다.
아나샤는 힐끔 침대 밖에서 옷들을 주워 입는 그를 바라보았다. 널찍하게 벌어진 어깨와 등 근육을 훔쳐보다가 그의 등 윗부분에 나있는 손톱자국을 발견했다.
누가 그랬는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나샤는 문득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아프면서도 기분 좋은 몽롱한 꿈을 꾼 것 같았다.
손가락 베이는 정도의 아픔일 거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너무 아파서 중간에 울었던 것도 같다. 워낙 아프기도 하고, 열에 취해있어서 정신이 없다시피 했지만 그의 목소리와 표정만큼은 선명히 기억났다.
옅게 인상을 쓴 그는 줄곧 힘들어 보이는 표정이었었다. 하지만 거친 숨소리가 섞인 가라앉은 목소리는 계속해서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었었다.
살살 어루만져 주던 그 뜨거운 손길이 하나하나 떠오르자 아나샤는 다시 빨갛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와 눈이 마주칠세라 아나샤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옷을 찾기 위해 이불로 몸을 감싸고서 침대에 앉았다.
“끄응…….”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허리에서부터 퍼지는 둔통에 아나샤는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그 작은 소리에 리히르트는 곧장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샤, 많이 아픕니까?”
리히르트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 침대에 주저앉은 그녀를 조심스레 살폈다.
“역시 어제 너무 무리하게 몰아붙인 것 같습니다. 그대 몸을 생각해서라도 자제했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하자고 한 건데 자업자득이죠 뭐.”
뺨을 긁적이며 아나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걱정으로 굳은 그의 얼굴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리히르트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다정하게 얘기했다.
“오늘 하루는 가만히 누워 쉬는 게 좋겠습니다.”
“그 정도로 아픈 건 아닌데…….”
“아샤, 부디 오늘 하루는 그대를 보살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책임을 지고 싶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 했으나 너무나도 진지해 보이는 그의 태도에 아나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옆에서 시중을 들어준다는 건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니까 오히려 좋았다.
“음, 그러면 지금 방으로 데려다줄래요? 제가 여기서 잔거 할아버지한테 들키면 큰일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 오, 옷 좀 주워주세요.”
그 말에 리히르트는 침대 아래에 떨어져 있는 잠옷 원피스와 속옷을 주워 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곧장 옷을 넘겨주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불 속에서 나오면 바로 옷시중을 들겠다는 듯이 말이다.
“왠지 기대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입는 건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힘들지 않겠습니까?”
“넵, 그러니까 주세요. 그리고 뒤도 돌아야죠.”
아나샤는 걱정스러운 그의 눈길을 조금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마냥 청렴결백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의외로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을 확인하고선 아나샤는 서둘러 옷을 입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방으로 돌아갔다.
* * *
아나샤는 감기에 걸린 것 같다는 핑계로 하루 동안 누워서 지냈다. 리히르트 또한 간호를 핑계로 그녀와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말이다.
그렇게 휴가 중 하루를 흘려보내고, 다음 날 두 사람은 떠날 채비를 마치고 마차에 올랐다.
“할아버지, 편지 자주 할게. 말 안 해도 건강하겠지만 건강하고! 나중에 리히랑 같이 또 올게요.”
“누구 맘대로! 이 할애비 뒷목 잡고 쓰러지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혼자 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아버트는 여전히 손녀의 연애 사실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초리였지만, 그렇다고 반대하지는 않았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억지로 떼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번도 손녀의 고집을 꺾어본 적이 없는 할아버지다웠다.
길베르와도 인사를 나누고서 아나샤는 마차 문을 닫았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창밖으로 몸을 내민 채 손을 흔들던 그녀는 저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서야 겨우 자리에 앉았다.
마차는 급하게 수도로 가지 않고 중간에 다른 영지에 들렀다. 아나샤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
미리 여관을 잡아둔 채 두 사람은 함께 짧은 여행을 즐겼다. 새로운 장소를 구경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밤이 늦어서야 마을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럼 내일 봐요, 리히.”
방에 들어서기 전 아나샤는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좋은 꿈 꾸십시오, 아샤.”
리히르트는 그녀를 방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머물 방으로 향했다. 멀어져 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아나샤는 붙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고민만 거듭했고 말이다.
두 사람 다 떨어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각방을 쓰지 않는다면 어떤 흐름으로 갈지 잘 알기에 방을 따로 잡은 것이었다.
아쉬움에 발만 동동 구르던 것도 잠시, 아나샤는 침대에 누워 오늘 하루를 되새겨 보았다. 단둘이 여행을 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무척이나 즐거웠었다. 아나샤는 밤새 기쁜 얼굴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느긋하게 수도로 출발했다. 아나샤가 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잠시 멈춰 둘러보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초저녁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수도에 입성할 수 있었다.
“벌써 이틀 뒤면 휴가 끝이라니! 아쉬워요.”
웨일그레슬 공작저에서 화려한 저녁 식사를 한 뒤 아나샤는 그와 후식으로 차를 마셨다. 며칠 내내 붙어있었지만 그럼에도 부족하다는 듯이 말이다.
“휴가가 끝나기 전에 다른 하고 싶은 일은 없습니까?”
“하고 싶은 일요? 으음.”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아나샤가 별안간 눈을 빛내며 그를 쳐다보았다.
“리히 방 구경해도 돼요?”
사실상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꺼내본 말이었지만, 그가 안내하겠다며 몸을 일으키자 아나샤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껏 공작가에는 여러 번 놀러왔었지만 그의 방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계단을 타고 올라간 두 사람은 어느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아나샤가 이 방이냐고 그를 올려다보며 묻자 리히르트는 부드러이 눈을 접으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도 됩니다.”
작은 설렘을 누르며 아나샤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이윽고 드러난 방 풍경에 아나샤는 작게 감탄했다.
방 전체가 채도 낮은 색으로 칠해진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그의 지위에 맞게 호화로웠다. 품위 있는 가구들과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는 아름다운 빛을 띠고 있었다.
“가구들이 하나같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아요.”
자신의 방보다 열 배는 넓어 보이는 공간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아나샤는 구경하기에 바빴다.
“헉, 진짜로 엄청 매끄러워요. 매일 기름칠을 하는 거예요?”
손가락으로 장식장의 표면을 슥 만져본 아나샤가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꼭 놀라 달아나려는 작은 들짐승을 닮아 리히르트는 그녀를 잡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