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보름씩이나 됐단 말이야!”
“아니, 보름이면 짧지!”
“이 할애비는 이런 불건전한 관계는 용납 못 한다. 계속 사귈 거면 기사단에도 당당히 알리고 사귀려무나. 그 전까지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그런 게 어디 있냐며 아나샤가 벌떡 일어나서 항의하였지만 아버트의 고집을 꺾기엔 무리였다.
“그리고 일어난 김에 말이다. 나가서 길베르 좀 불러와 주겠니, 아샤.”
“내가 왜?”
“혹시 알겠니. 손녀의 심부름에 감동받아 마음이 바뀔지.”
“하여간 순 할아버지 마음대로야…….”
투덜대면서도 아나샤는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서재의 문이 닫히자 아버트는 맞은편을 돌아보았다.
“편지는 사죄드리지요. 제가 좀 짓궂었던 것 같군요.”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아버트는 느긋하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사내를 관찰했다.
“아닙니다.”
고저 없는 무뚝뚝한 목소리에선 진심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불쾌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애인의 하나뿐인 할아버지라고 존대를 써주니 아버트는 그가 조금 흥미로웠다.
“아샤에게 진심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
“혼인까지 생각하고 만나는 것이라면, 훗날 아샤를 공작 부인 자리에 앉힐 생각인지요?”
아버트는 정면에서 그와 눈을 마주한 채 직설적으로 그에게 물었다.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두 사람의 교제를 절대 허락해 주지 않을 것처럼 굳건한 눈빛이었다. 이에 리히르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당연히 부인으로 맞이할 생각입니다.”
“허허, 그렇지요. 아샤가 원한다면 말이지요.”
제법 만족스러운 답변에 아버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눈빛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아샤와는 신분 차이가 많이 나기에 조금 걱정이 됐습니다만, 괜한 노파심이었나 보군요. 강압적인 분은 아니라 다행입니다.”
말이 통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말을 유연하게 돌려 말하며 아버트는 웃었다. 그러곤 습관적으로 수염으로 손을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공작께서도 그간 아샤를 봐왔으니 아실 겁니다. 아샤에게 중요한 건 그런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아나샤가 높은 지위와 막대한 부를 누리는 것에 야망을 가지고 있다면 아버트는 진즉에 두 사람의 교제를 응원해 줬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말이다.
“첩자 일이라는 게 남들 눈에는 그저 험하고 좋지 않은 일이어도 아샤에게 있어선 삶의 목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요.”
제 손녀가 더러운 천장을 기어 다니길 원하는 할아버지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공작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화려한 삶을 사는 것을 바랄 테지만, 그것을 가장 원치 않을 사람이 아나샤라는 것을 아버트는 가장 잘 알았다.
어릴 적부터 첩자 일을 하겠다며 리온의 뒤를 쫓아다니던 아이였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첩자로서 살지 못하게 됐을 때, 아마 아샤는 가장 불행하겠지요.”
무작정 아나샤를 공작 부인 자리에 앉힐 생각을 가진 놈이라면, 또 그것이 아나샤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 여기는 놈이라면 죽어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아샤의 행복을 가장 우선시하는 사람이 아샤의 배필이 되었으면 합니다. 말이 길어지긴 했지만, 하나뿐인 손녀가 걱정되어 하는 말이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지요.”
* * *
저녁 식사를 마치고 리히르트는 3층의 객실에 머무르게 되었다.
몸을 씻고 나온 사이 창밖은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물기가 남아있는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혼자 있을 때에도 완전히 풀어져 있던 적이 없는 그였다. 편하게 있는 것이라 해봤자 셔츠 단추를 두어 개 잠그지 않는 정도로 느슨하게 있는 정도였다.
그런 그가 현재 상의를 완전히 풀어 헤치고 있었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쇄골과 탄탄하게 잡힌 근육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나 리히르트는 개의치 않고 고개를 젖힌 채 조용히 두 눈을 감을 뿐이었다. 아예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옳았다.
현재 그의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아까 낮에 들었던 말 때문이었다.
리히르트는 이제껏 한 번도 그녀와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현재에 너무 만족해 있는 나머지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 들은 말은 그에게 많은 생각을 가져다주었다.
자신은 당연히 그녀와 오래도록 함께 있을 수 있는 선택지를 택할 것이지만, 그녀의 입장은 다를 수도 있었다.
물론 그녀가 원하는 길이 있다면 리히르트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를 놓아준다는 뜻은 되지 않았다.
리히르트는 한동안 긴 상념에 잠겼다. 몸은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피곤했지만 갑갑한 기분에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톡톡. 그 작은 소리에 그는 깊게 감겨있던 눈을 떴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창문을 두드리는 작은 손이 보였다.
“리히, 저예요.”
이윽고 창문 아래에서 끙, 하고 앓는 소리가 들려오자 리히르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그러곤 건물 벽에 매달려 있는 아나샤를 빠르게 끌어 올렸다.
“아샤, 위험하지 않습니까.”
리히르트는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한 채 그녀를 끌어안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얇은 잠옷 차림의 모습에도 그는 전혀 설레지 않았다. 맨발로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다고 여기니 심장이 절로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할아버지가 복도로 못 나가게 문을 잠가버려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리고 그동안 재활 훈련을 열심히 해서 이 정도는 오를 만한걸요.”
“그래도 내일 보면 되지 않습니까.”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리히르트는 아나샤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자신이 너무 매정하게 말한 것은 아닌지 리히르트가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저 근데 리히…, 설마 제가 옷 입는 도중에 들어온 거예요?”
그제야 리히르트는 그녀가 왜 시선을 아래에 두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미안합니다. 정신이 없어서…….”
“아뇨, 미안하긴요! 오히려 갑자기 찾아온 제가 사과해야죠.”
아나샤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슬그머니 그의 복부에 시선을 가져갔다.
“…한번 만져봐도 돼요?”
호기심과 묘한 설렘을 담은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리히르트는 셔츠 단추를 잠그기 위해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자 아나샤는 곧바로 손가락을 들어 그의 근육을 콕 만져보았다.
근육이야 기사단에서 흔히 봐왔던 것이지만, 연인의 몸에 자리 잡힌 근육은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괜히 한번 만져보고 싶은 것이다.
작은 손가락은 단단한 가슴팍을 시작으로 두드러진 복근을 따라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그 콕콕 닿는 손길에 리히르트는 알 수 없는 야릇한 자극을 받았고 말이다.
리히르트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만질 거냐고 넌지시 묻는 시선에 아나샤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을 떼었다.
“미안해요! 너무 막 만졌죠.”
“괜찮습니다.”
한 손으로 셔츠의 단추를 채우면서 그는 대답했다. 맨 위 단추까지 채운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방까지 데려다주겠습니다.”
리히르트는 걸음을 옮겨 문고리를 붙잡았다. 문을 연 채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아나샤는 딴청을 부리며 서있을 뿐이었다.
“아샤?”
“문이 잠겨있어서 못 들어가요. 그냥 여기 있을래요.”
“그럼 가서 열쇠를 받아오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까?”
“리히는 저랑 오래 있기 싫어요……?”
툴툴대는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배어있었다.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기세에 리히르트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문을 닫고서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밤이 늦었으니 침실로 데려다주겠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는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손을 그러쥐었다. 이제는 자러 가야 한다며 리히르트는 조용히 그녀를 달랬으나 아나샤는 고집스러웠다.
한동안 부루퉁한 얼굴로 있던 그녀는 뒤늦게 입술을 뗐다.
“…사실 오늘 리히가 먼저 키스해 줘서 기뻤어요. 이 얘기 하러 온 거예요.”
“…….”
“이제까지 리히가 저랑 키스하는 걸 피하는 것 같아서, 저 많이 속상했었거든요.”
그녀의 말에 리히르트는 잠시 놀랐으나 곧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해 왔다. 아나샤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나샤의 기대와는 달리 입술은 짧게 닿았다 떨어질 뿐이었다.
“그동안 몰라줘서 미안합니다.”
그의 입술 사이로 미안함이 스며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음… 미안하단 사람이 웃고 있는데요?”
“미안합니다. 속상했다는 게 귀여워서 말입니다.”
여전히 토라져 있는 모습이 사랑스러웠지만, 그렇기에 그는 그녀에게서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아샤, 그대가 원하는 것과 제가 원하는 것은 다를지도 모릅니다.”
리히르트는 아나샤를 바라보다가 이내 잔잔한 웃음기를 감추었다. 그의 입에선 한숨처럼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대를 마주하는 게 가끔은 힘이 듭니다. 특히나 그대가 이렇게 사랑스럽게 저를 받아줄 때 말입니다.”
“…….”
“모든 걸 받아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버립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합니까? 아샤.”
“리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요. 저도 알 건 다 안다구요.”
그녀는 고집스러운 얼굴로 말했으나 여전히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만 보였다. 그리고 이 모습조차 그에게는 유혹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더 이상 인내심을 가지고 제대로 그녀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며 다시 그녀에게 데려다주겠다고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만약… 저도 리히랑 같은 걸 원한다고 하면요?”
그가 한 발 내딛기도 전에, 아나샤가 팔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리히르트는 아나샤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