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형식적인 감사 편지인 만큼 중요한 내용은 없어 보였으나 혹여 그녀의 소식이 짤막하게나마 적혀있을까 봐 건너뛰지는 않았다. 편지의 마지막 문단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아차, 오늘 아샤에게 제 손자를 소개시켜 준 참입니다. 서로가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라 빠른 시일 내로 약혼을 추진할까 합니다. 좋은 소식이 생기면 다시 편지 쓰도록 하지요.]
딱딱하리만치 무표정하던 눈매가 일그러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리히르트는 자신이 읽은 내용이 맞는지 다시금 확인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읽어 내린 순간, 편지는 그의 손아귀에서 무참히 구겨졌다.
* * *
아나샤와 길베르는 오늘도 정원에 나와있었다. 둥근 지붕의 대리석 정자 안에서 차를 마시는 두 사람은 누가 보아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띠었다. 사이좋은 남매로 보일 만큼 말이다.
불과 나흘이었으나 두 사람이 친해지기엔 부족함 없는 시간이었다. 서로 비밀을 공유한 뒤로 유대감은 더욱 끈끈해질 수밖에 없었다.
“요새 할아버지가 이상하게 잠잠하단 말이에요. 길베르는 어떻게 생각해요?”
아나샤는 의심을 버리지 못한 얼굴로 조용히 얘기했다.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쉽게 포기할 할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은 아나샤가 더 잘 알았다.
어떻게든 길베르와 자신을 엮기 위해 혈안일 거라 여겼으나 막상 할아버지는 잠잠하기만 했다.
“우리가 서로 너무 편해 보이니까 포기하신 게 아닐까요?”
“흠…, 그런 거면 좋겠지만.”
“아니면 너무 붙어있어서 이미 잘되고 있다고 판단하신 걸지도 모르겠네요. 아샤의 애인은 아직 이 상황은 모르는 거죠?”
“네,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 편지는 안 썼어요.”
“하긴. 우리야 그런 뜻은 없다지만 애인 입장에서는 꽤 신경 쓰일 수도 있겠네요. 그보다 아샤는 주위에 남자인 친구들이 많다고 했었잖아요. 애인이 질투하진 않나요?”
“질투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아나샤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러곤 간만에 웃긴 얘길 들은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리히는 질투가 뭔지도 모를걸요.”
질투라니, 늘 차분하고 청렴하기만 한 그와는 매치가 되지 않는 단어인 것이다. 아나샤는 그의 인품이 얼마나 훌륭한지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신나서 떠들어 대던 그녀는 별안간 다시 추욱 처져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리히 얘기하니까 또 보고 싶어졌어요! 아마 지금쯤 일하고 있겠죠? 리히도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당연히 하고 있을 거예요.”
길베르는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러던 중 들려온 인기척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정원에 들어선 낯선 이를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아샤, 누가 이쪽으로 오는데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
길베르의 목소리에 아나샤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이 향한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는 장신의 사내는 리히르트와 매우 닮아있었다. 아나샤는 눈을 비볐다. 금술이 달린 흰 제복과 밝은 백금발은 거칠게 흐트러진 채였다. 단정치 못한 행색만 아니었다면 그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리히?”
아나샤는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헛것을 보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정말 리히예요? 아니, 어떻게 온…….”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와 마주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이었다. 아나샤는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기 무섭게 들어 올리는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 두 다리를 퍼덕였다.
“리히?!”
그녀의 다리에 가슴팍을 얻어맞은 리히르트였으나 그는 묵묵히 그녀를 어깨에 둘러멨다. 그대로 그녀를 데리고 가려 하자 길베르는 급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기, 아무리 애인이라곤 하셔도 갑자기 이러시는 건…….”
사내의 앞을 막아선 것은 좋았으나 길베르는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마주한 벽안은 금방이라도 저를 베어버릴 것처럼 서늘했기 때문이다. 그때, 대롱대롱 짐짝처럼 매달려 있던 아나샤가 고개를 쳐들었다.
“리히, 이쪽은 할아버지 손자인 길베르예요. 길베르한테는 우리가 연인 사이인 거 말했어요.”
리히르트는 길베르를 향해있던 냉랭한 시선을 거두었다. 방금 전만 해도 풍겼던 살벌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침착한 태도였다.
그는 길베르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이에 길베르는 더는 끼어들 수 없어 조용히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 * *
“리히, 어디까지 가려는 거예요?”
무겁지 않을까 걱정하던 것도 잠시, 아나샤는 편하게 그의 어깨에 둘러메인 채로 떠들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그는 아까 전부터 계속 말이 없는 상태였다.
“좋아요. 리히가 가고 싶은 데로 가요. 근데 나가려면 반대쪽으로 가야 되는…….”
그 순간 묵묵히 걷기만 하던 그가 걸음을 멈췄다. 나무 앞에 선 그는 아나샤의 엉덩이 아래를 팔뚝으로 받치고서 안전하게 그녀를 내려놓았다.
아나샤가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고맙다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입술이 막히며 동시에 뜨거운 숨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으응… 리…….”
너무 갑작스러운 키스에 아나샤는 살짝 뒤로 밀려났다. 등 뒤에 닿은 단단한 나무 기둥은 더는 뒤로 도망가지 못하게 자신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아나샤는 말을 꺼내기 위해 고개를 틀었다.
“잠깐…….”
하지만 그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이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뒷머리를 받쳐왔다. 다시금 입술이 집어삼켜지며 더욱 깊게 그의 입술이 겹쳐왔다. 입술이 떨어지려고만 하면 그는 입술을 세게 빨며 다시 숨을 가득히 넣었다. 입술이 닿는 야릇한 소리에 아나샤의 두 뺨은 점점 뜨끈뜨끈해져 갔고 말이다.
아나샤는 말하기를 포기하고 질끈 눈을 감은 채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호흡이 가빠질수록 정신은 몽롱해져만 갔다.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이어지던 키스가 마침내 끝났을 땐 조금 아쉬울 정도였다. 눈을 뜬 아나샤는 작게 숨을 골랐다. 그러곤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는 가쁜 숨을 가라앉히느라 조용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흐트러진 백금색 머리카락 아래로 푸른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애가 탄 사람처럼.
“…밤새 미칠 것 같았습니다.”
“…….”
“당장 그대와 만나고 싶어서.”
동시에 그의 눈동자는 짙은 피로로 물들어 있었다. 흰자 위로 군데군데 실핏줄이 터져있는 게 한숨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나사는 두 손을 들어 걱정스레 그의 뺨을 감쌌다.
“어제 편지를 받았습니다.”
리히르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애써 차분히 편지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물론 얘기하면서도 서운한지 입술을 몇 번이나 짓씹었지만 말이다.
그런 그를 가까스로 달래가며 들은 내용은 아나샤에게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약혼요?! 할아버지가 왜 그런 편지를 쓴 건진 모르겠지만, 저는 처음 듣는 얘기예요.”
“…….”
“물론 할아버지가 저랑 길베르를 처음에 엮으려고 하긴 했는데… 제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거절했었거든요. 길베르도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저랑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고요.”
“…그런 거였습니까.”
“저한테 편지 쓰지 그랬어요. 설마 그 편지 때문에 밤새 잠도 안 자고 달려온 거예요?”
어제 오후에 편지를 받았다고 했으니 받자마자 달려온 모양이었다. 어쩐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흐트러진 모습이라 했더니 밤새 말을 타고 오느라 그랬던 모양이었다.
아나샤는 마음이 짠하기만 했다. 편지를 받고 놀랐을 그가 안타까우면서도 너무 예뻐서 뽀뽀 백 번은 퍼붓고 싶을 지경이었다.
“안 되겠어요. 할아버지한테 가요.”
사뭇 비장한 목소리로 말한 아나샤는 커다란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곤 먼저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리히가 제 애인이라고 당당히 밝힐래요.”
리히르트와 손을 붙잡은 채 아나샤는 당당히 서재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할아버지!”
“그래, 안 그래도 올 줄 알았다.”
무슨 일이냐고 놀랄 거라 여긴 아나샤의 예상과는 달리 아버트는 느긋하게 앉아 차를 마실 뿐이었다. 아버트는 문 앞에 서있는 두 남녀를 힐끗 보고는 맞은편 소파를 향해 눈짓했다.
“공작 각하도 앉으시지요.”
아나샤는 그 말에 깜짝 놀라 앉다 말고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기는. 이것아. 내가 직접 편지를 보냈는데 모를까 봐.”
쯧쯧 하고 혀를 한번 찬 아버트는 섭섭한 기색을 드러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할애비한테까지 숨기고 말이야. 내가 널 봐온 세월이 얼만데, 이 정도도 눈치 못 챌 줄 알고?”
아나샤와 새로 부임한 단장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건 아나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에 관해서 묻기 무섭게 혼자 찔려서 당황하던 것을 어찌 모를까.
애당초 새 단장, 웨일그레슬 공작은 열흘간의 휴가를 내줄 만한 인물이 못 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다 못해 칼 같기로 유명한 그인지라 아버트는 자유분방한 아나샤가 꽤나 고생하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그동안 주고받은 편지에는 새 단장에 대한 불평 한 줄 없었다. 아샤 성격에 참고 있을 리는 없으니 생각보다 잘 지내는 건가 싶어 의아하던 차였었다.
‘서로 마음이 있겠거니 싶었지만…….’
사실 편지를 보낸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지 알아보기 위함이 컸다. 고작해야 약혼을 반대하는 편지를 보내올 거라 예상한 것과는 달리 공작은 직접 찾아왔고 말이다.
“할아버지한테 얘기 안 한 건 할아버지가 뭐라고 할 것 같아서 그랬지. …흠, 아무튼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내 애인 리히르트야.”
아버트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아나샤의 옆에 앉아있는 사내를 응시했다. 바로 달려온 건 솔직히 의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든 건 아니었다.
“그래. 언제부터 눈이 맞아서 몰래 교제를 시작한 건지 들어나 보자꾸나.”
“얼마 안 됐어. 한 보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