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절대 못 믿겠다며 아나샤는 눈을 흘겼다. 그러다 앉아있던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손자분? 반가워요! 저는 아나샤 라이나라고 해요. 편하게 아샤라고 불러주세요.”
아나샤가 먼저 입을 열자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아나샤의 앞으로 다가왔다. 신사적인 생김새답게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전 길베르 벨더스라고 해요.”
아나샤는 그것을 악수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고 말이다.
“그러면 길베르 경? 길베르 씨? 라고 부르면 될까요?”
“호칭은 빼고 편히 불러주세요. 그리고 한 번은 직접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뵈니 반갑네요.”
“저를요?”
“네. 평소에 할아버지께 얘길 많이 전해 들었거든요.”
아나샤는 슬그머니 아버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얼마나 자신에 대해 이상하게 얘기했으면 자신을 한번 직접 보고 싶었을까 싶었다.
그사이 길베르는 먼저 떨어지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여성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인사가 아닌 악수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새로움이 벌써부터 신선하게만 다가와 그는 조용히 웃었다.
* * *
아침 식사가 끝나고 아나샤는 아버트와 단둘이 서재에서 다과 시간을 가졌다. 입 안에서 부드럽게 부스러지는 쿠키는 달았다. 조금 목이 막힐 정도라 아나샤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켠 순간이었다.
“길베르는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던데.”
“컥!”
아나샤는 사레에 들린 채 콜록거렸다.
“천천히 마시지. 쯧쯧, 괜찮니?”
“…콜록, 할아버지가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해서 그렇잖아!”
아나샤는 한쪽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 외쳤다. 이에 아버트는 손수건을 건네주며 인자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상하기는. 그래서 내 손자 녀석은 어때 보이던?”
“어떻긴 뭘 어때. 그냥 할아버지 안 닮아서 잘생겼다니까?”
“그럼 마음에 드는가 보구나. 허허.”
“할아버지도 참, 만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얘기가 그렇게 돼? 그리고 할아버지 손자는 아무 생각도 없을 텐데.”
작게 투덜거리며 아나샤는 힐긋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막상 할아버지에게 털어놓으려니 살짝 민망했다.
“그리고 나…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깜짝이야!”
“이 할애비가 없는 동안 이상한 놈이 들러붙은 거냐? 언제부터!”
“이상한 사람 아니야! 절대로!”
“뭐가 아니야! 이것아!”
벌써부터 그 이름 모를 놈을 편드는 거냐며 역정을 내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아나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잊고 있었을까. 삼촌들보다 더한 사람이 할아버지라는 것을.
“제대로 된 놈이어야 될 텐데……. 괜히 이상한 놈한테 홀랑 넘어간 건 아닐지 걱정이구나, 걱정이야.”
“아냐, 그냥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그리고 이상한 사람 아니라니까?”
아나샤는 흠흠, 하고 목을 한번 가다듬었다.
“할아버지가 몰라서 그렇지, 엄청 속이 깊고 좋은 사람이야. 또 엄청 다정하고 세심하게 배려도 잘해주고…….”
더 얘기했다가는 누군지 들킬 것 같아 아나샤는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아버트는 진정이 된 듯 조용히 짧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놈인 거 보면 정말 괜찮은 놈인가 보구나.”
“그치? 내가 할아버지 닮아서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좋잖아.”
휴, 하고 아나샤가 막 숨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그보다 말이다. 열흘씩이나 길게 휴가를 준 거 보니까 이번 단장이랑은 꽤 사이가 좋은가 보지?”
“무, 물론 친하지. 근데 막 엄청 친하지는 않고 적당히 친해!”
아나샤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받아쳤지만 여전히 심장은 크게 벌렁거렸다. 갑자기 리히르트에 관한 얘기가 나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그거 잘됐구나. 새 단장에 대한 소문이 썩 좋지 않아서 네가 잘하고 있으려나 걱정됐는데 말이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 그러니까,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흐음 그래?”
“물론 지금 단장님보다야 우리 할아버지가 더 최고지!”
지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나샤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아부까지 했다. 이에 아버트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지만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넘어갔다.
8장 비밀 연애 대작전 (2)
아버트의 제안으로 아나샤는 점심을 먹은 뒤 저택을 둘러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당연히 할아버지와 단둘이 돌아다니겠거니 예상했으나 약속 시간에 찾아온 사람은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트가 다리가 쑤신다는 당치도 않은 핑계를 대며 손자 길베르에게 안내를 맡긴 것이다.
마침 할 일도 없었기에 아나샤는 그를 따라나섰다. 넓은 저택 안을 돌아다니는 동안 두 사람은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어느 정도 서로가 편해지기 시작하자 더욱 말은 많아졌다. 붙임성 좋은 아나샤와 편안한 분위기의 길베르였으니 단시간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음, 저기 있잖아요. 길베르.”
잘 가꿔진 정원 산책로를 걷던 아나샤는 옆에 있는 그를 돌아보았다. 뺨을 긁적이며 아나샤는 조금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가 자꾸 우리 둘을 엮으려는 것 같은데 만약 할아버지가 이상한 말을 하면 그냥 무시해요. 그리고 미안해요, 저 때문에.”
“아니에요. 오히려 이 상황에 가장 난감한 사람은 아샤일 텐데, 대신 사과드릴게요.”
“난감하기는요. 길베르랑 친해져서 좋은걸요.”
아나샤는 웃으며 가볍게 손을 저어 보였다. 그러곤 이제껏 그와 대화를 하며 느꼈던 점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대화도 잘 통하고 뭔가 친근하다고 해야 되나……. 기사단 동기 중에 엘빈이라고 저랑 동갑인 애가 있는데 둘이 분위기가 좀 닮은 것 같아요.”
“하하, 남자인 친구들이 많은가 보네요. 사실 저는 이렇게 여성분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눠본 적은 처음이거든요.”
“앗, 그랬어요? 혹시 불편한 건 아니죠? 그냥 기사단 동기 대하듯이 대해버렸는데…….”
“그럴 리가요. 오히려 신선해서 좋았어요.”
길베르는 조용히 웃으며 아나샤와 눈을 마주했다.
“아샤만 괜찮다면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혹시 어떠세요? 여기 머무르는 동안은 제가 대화 상대가 되어드릴게요.”
“그러면 저야 당연히 좋죠!”
안 그래도 놀 상대가 할아버지밖에 없어서 조금 아쉬운 참이었다.
두 사람은 정원 정자에 앉아 더 긴 대화를 나누었다. 원래 말하기를 좋아하는 아나샤에게 있어서 그녀 못지않게 말이 많은 길베르는 최적의 대화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거기다 나이대도 비슷하고 손자 손녀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지 은근 통하는 점이 많았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여성분이 있다고요?”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좀 애매하긴 하지만요. 연회에서 몇 번 마주친 정도라서 그녀도 저를 알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래도요! 먼저 다가가 본 적은 없어요?”
“한번 말을 건 적은 있어요. 비록 짧게 몇 마디를 나눈 게 다지만요. 저는 엄청 떨렸는데, 그녀도 저처럼 떨렸을지 모르겠네요.”
“저도 그 마음 알아요! 저는 너무 떨려서 말을 더듬은 적도 있는걸요.”
“저는 아직 말을 더듬지는 않았는데 더듬을까 봐 괜히 말할 때 더 신경 쓰이더라고요……. 하아.”
영락없이 사랑에 빠져 고뇌하는 모습이었다. 아나샤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눈빛을 빛냈다.
“저도 한때는 이게 사랑인지 몰라서 고민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 뭐라고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일단 본인의 감을 믿으세요!”
“감이라… 더 어렵네요. 아샤는 혹시 현재 애인이 있나요?”
“아, 그게… 길베르한테만 얘기하는 건데요. 사실은… 넵. 있어요. 근데 할아버지한테 말하면 난리 날 것 같아서 비밀로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랬군요. 걱정 마세요. 상담도 해주는데 당연히 비밀로 해드릴게요.”
“고마워요.”
그렇게 시작된 연애 상담은 꽤나 길게 이어졌다.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놓으며 열띤 상담을 해주던 아나샤는 해 질 녘이 되어서야 겨우 엉덩이를 떼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두 사람은 정원을 벗어나 저택으로 향했다. 그동안에도 대화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 * *
한편, 리히르트의 하루는 숨 막히는 적막의 연속이었다. 온종일 업무에만 몰두해 있던 그는 뒤늦게 몰려온 피로감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시린 푸른 눈은 조용하기만 한 천장의 한 곳을 응시하다가 이내 감겼다. 리히르트는 책상 표면에 얹은 긴 손가락들을 움직였다. 톡톡 두드려지는 소리가 넓은 집무실 안을 일정하게 울렸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고작해야 열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흘이 지난 지금, 그는 하루를 기다리는 것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잠시 그녀와 떨어져 있는 것도 좋을 거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그로서는 날이 갈수록 적극적으로 변하는 그녀를 계속 외면할 힘이 없었다.
슬슬 불안하던 참에 그녀가 휴가를 떠난 것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 여기려고 했다. 그녀를 마주하는 동안 욕정을 억누를 수 없어 불안하다면 아예 불안할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만에 불과했다. 현재 리히르트는 과거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그녀 말대로 연인 사이임을 밝히고 함께 휴가를 떠나는 게 좋았을 것이다. 한순간 치미는 욕정을 참는 게 낫지, 아예 그녀를 안 보는 것이 더 그의 피를 마르게 만들 줄은 과연 예상이나 했을까.
한동안 리히르트는 그녀를 떠올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른 채 상념에만 잠겨있을 때였다.
“단장님, 안에 계십니까?”
리히르트는 문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들어오는 것을 허가하자 이내 문이 열리며 행정관이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지?”
“벨더스 가문에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리히르트는 행정관이 건네준 편지를 확인했다. 전 단장 아버트 벨더스가 보내온 것이었다. 편지는 아나샤에게 긴 휴가를 줘서 고맙다는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리히르트는 무감정한 눈으로 빠르게 불필요한 문장들을 읽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