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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52화 (52/87)

52화

할아버지도 만날 겸 리히와 열흘간 여행을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나샤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이 실실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바로 코앞에 있는 수려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 주변을 손끝으로 살살 쓸자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접혔다. 자신만을 담고 있는 푸른 눈이 너무나도 예뻐 아나샤는 뽀뽀를 퍼붓고 싶을 지경이었다.

“리히는 아쉽지 않아요?”

“물론 아쉽습니다.”

“그럼 우리 못 보는 동안 뽀뽀도 못 할 테니까 지금 많이 해놓을까요?”

입술을 쭉 내민 채 아나샤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마치 사랑스러운 어린아이라도 다루듯 말이다. 그러나 리히르트는 이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샤.”

“…네?”

“정말입니까?”

리히르트는 자신의 눈 아래에 위치한 손을 붙잡아 내리며 물었다. 농담으로 받아들이기엔 그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치에 다다라 있었다.

아나샤는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물리려 했으나 그 전에 그가 허리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도망가려는 작은 초식동물을 달래듯 그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맞붙여 왔다.

다가온 숨결에 아나샤는 눈을 꾹 감았다. 따뜻하고 촉촉한 것이 입술을 덮쳤다. 짧게 입술을 쪽쪽 부딪치는 키스와는 뭔가 달랐다.

입술을 열어달라는 듯이 그가 아랫입술을 건드리자 간지러운 기분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나샤는 조심스레 닫혀있던 입술을 벌렸다.

‘뭔가 말랑말랑해…….’

아나샤는 생각보다 기분 좋은 감각에 괜히 소름이 돋는다고 여겼다. 허리 뒤를 지탱하고 있는 그의 팔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사이 소리 없이 허리를 타고 올라온 그의 다른 손은 달아오른 뺨을 감쌌다. 커다란 손이 주는 온기에 아나샤는 안심이 되어 더욱 깊게 그와 키스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못 했다. 뒤늦게 리히르트는 조심스레 그녀의 입술로부터 제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는 조용히 눈을 뜨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어쩌면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민망함에 도망가려 할지도 몰랐다. 혹은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채 입만 뻐끔거릴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 됐든 둘 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반응일 터였다. 그리고 마침내 눈을 뜬 그녀는 자신과 살며시 눈을 마주쳐 왔다.

“…리히.”

발갛게 익은 뺨까지는 그의 예상과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예상과는 달리 담담해 보였다. 오히려.

“좀 더 해요. 네?”

작게 웃으며 아나샤는 조르듯이 말했다. 그 수줍고도 귀여운 유혹에 리히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정도였다.

“리히?”

아나샤는 갑작스레 그가 뒤로 물러서자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아픈 건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리히르트는 금방이라도 제게 안겨올 것 같은 아나샤를 황급히 붙잡았다. 더는 다가오지 못하게 어깨를 붙잡은 채 그는 고개를 숙였다.

“아샤, 급한 용무가 떠올라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할 것까지야…, 그보다 갑자기요?”

놀람인지 아쉬움인지 동그랗게 눈만 뜨고 있는 아나샤와 시선을 마주한 리히르트는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현재 그는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는커녕 대답할 여유조차 없었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스스로를 절제할 수 없을까 봐 매일 불안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보다 힘든 일이 그녀를 두고 나가는 일이라지만 리히르트는 오늘도 인내하며 단장실을 벗어났다.

* * *

출발 하루 전날, 아나샤는 황녀궁의 티타임에 초대받았다. 엘리시아와 단둘이 차를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던 아나샤는 한참 뒤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황녀님, 혹시 상담 괜찮을까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아나샤가 조심스럽게 묻자 엘리시아는 흔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아나샤는 최근 리히르트 그와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제가 키… 키스를 못해서 하기 싫어진 걸까요?”

좀 더 키스하자고 말하기 무섭게 난감해하던 그의 표정이 떠올라 아나샤는 다시금 시무룩해졌다.

그날 황급히 자리를 뜬 이후로 계속해서 그는 묘하게 자신과의 스킨십을 피하고 있었다. 특히 키스는 두 번 다시 안 할 거 같아서 아나샤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걱정 말아요, 아샤 경.”

조용히 차를 들이켜며 얘기를 듣고 있던 엘리시아는 미소를 띠었다. 훤히 답이 보인다는 듯이 그녀는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샤 경이 잘하든 서툴든, 애초에 아샤 경이 뭘 하든 마냥 다 좋아할 남자니까요.”

“…전 잘 모르겠어요. 애초에 좋았으면 피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건.”

엘리시아는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순수한 얼굴을 보니 어디부터 어디까지 얘기해 줘야 하나 망설여질 정도였다. 이러니 공작이 피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아샤 경은 공작과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나요?”

“어디까지라고 하면…….”

“연인 관계의 진도를 말하는 거예요.”

그 말에 아나샤는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기에 괜히 자신이 더 민망하기까지 했다.

“그거야 물론… 리히가 원한다면 뭐든 좋아요…….”

따뜻한 찻잔만 꼼지락대며 아나샤는 고개를 숙인 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그대로 공작에게 얘기하면 해결될 것 같네요. 그럼 분명 안 피하고 예전처럼 다시 스킨십을 해올 거예요.”

그녀의 말에 아나샤는 확신이 서지 않아 고개를 들었다. 그 새빨갛게 익은 얼굴과 마주한 엘리시아는 싱긋 웃어 보였고 말이다.

“만약 그래도 피한다면 내게 얘기해요.”

나긋나긋한 말투였지만 아나샤는 왠지 오싹한 기분이 들어 고개만 주억거렸다.

* * *

하지만 출발 당일이 되고 마차에 오를 때까지도 아나샤가 그 말을 꺼낼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저 배웅해 주는 리히르트와 포옹하며 절절한 작별 인사만 나눴을 뿐이었다.

‘뭐, 다녀와서 얘기해도 되니까.’

아나샤는 그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만지작거리며 소파에 등을 묻었다. 떨어진 지 얼마나 지났다고 허전한 기분이 스멀스멀 치밀었다.

‘리히도 지금 이런 기분일까…….’

자신처럼 허전함을 느끼진 않을까, 자신이 보고 싶진 않을까, 벌써부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아나샤는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안으려다 아무것도 없자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가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두 팔 가득 끌어안고도 남는 커다란 몸이 좋았다. 드넓은 등에 얼굴을 묻고 있으면 얼마나 따스하고 평온한지 몰랐다.

그리고 제 몸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은 얼마나 부드러운지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또 그의 입술은…….

“아.”

아나샤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무도 없는 마차 안이었지만 혼자 이런 상상을 하고 있었다는 게 창피해서 괜히 주위를 살폈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아나샤는 애써 창밖의 먼 곳을 바라보며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안 그러면 계속 그에 대한 생각을 할 게 뻔했으니 말이다.

마차는 빠르게 수도를 벗어났다. 꼬박 한나절을 달려 영지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는 저물어 있었다.

불이 켜진 저택의 계단 아래에는 거대한 풍채의 중년 사내가 서있었다. 마차가 멈춰 서기 무섭게 아나샤는 문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할아버지!”

전 단장, 아버트 벨더스는 달려와 폴짝 안겨오는 아나샤를 마주 안아주었다.

“내 손녀, 어디 얼굴 좀 보자꾸나.”

“그동안 잘 지냈어?! 어?”

“그래그래, 할애비야 늘 잘 지내지. 너도 그동안 아주 잘 먹고 잘 지냈는지 볼살이 빵빵하구나.”

아버트는 허허 웃으며 계단을 올라섰다. 아나샤가 달라붙어 있었지만 전혀 무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태연히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피곤하지는 않고?”

“전혀! 이제까지 자다 왔거든.”

“그래 보이는구나.”

침 좀 닦으라는 의미였지만 아나샤는 마냥 싱글벙글했다.

한동안 영지에서 적적하게 지내고 있던 아버트도 만만치 않게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아들놈들과 손자 놈들은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이라지만 손녀는 다른 것이다.

비록 친손녀는 아니어도 아버트에게 있어서 십 년 넘게 오냐오냐 키워온 아나샤는 하나밖에 없는 손녀나 다름없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자 두 사람은 오랜만에 함께 식사를 했다. 그동안 편지를 주고받아 서로의 안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대화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밤이 깊어지자 아나샤는 객실로 들어가 편히 누웠다. 할아버지와 보낸 시간은 즐거웠다. 거기다 배는 불렀고, 잠자리는 따뜻했다.

모든 게 만족스럽고 행복했지만 아나샤는 문득 허전한 기분에 베개를 끌어안았다.

‘…리히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벌써부터 보고 싶다.’

아나샤는 몰려오는 잠기운에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 * *

다음 날 아침, 아나샤는 느긋하게 일어나 시녀들의 시중을 받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알아서 해주겠다는데 굳이 막을 필요는 없었다.

가만히 그녀들이 입혀주는 대로 입고, 머리 손질까지 받은 아나샤는 저택의 식당으로 안내받았다. 하품을 터뜨리며 들어선 그곳에는 할아버지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다.

그것도 금발의 젊은 귀족이었다. 아나샤는 헙, 하고 입술을 다물며 조용히 멈춰 서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건 젊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하하하, 둘 다 놀란 모양이구나.”

웃음을 터뜨린 아버트는 느긋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며 수염을 쓸었다.

“이쪽은 내 손자 길베르란다. 오늘 아침에 도착해서 마침 둘이 소개시켜 주려고 불렀단다.”

“할아버지 손자……?”

아나샤는 누가 봐도 준수하게 생긴 금발의 남자와 푸석한 은회색 머리의 아버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손자라고 하기엔 전혀 안 닮았는데?”

“이것아, 내가 젊었을 때는 훨씬 잘생겼었어.”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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