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 *
리히르트는 최근 들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으나 동시에 그는 매우 고민스러웠다. 다름 아닌 아나샤 때문이었다.
짧은 입맞춤에도 얼굴을 붉히는 그녀였다. 그 반응이 사랑스러워 더 만지고 싶고, 더 깊게 키스를 하고 싶었으나 한편으로는 그녀가 놀랄까 조심스럽기만 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적응해 평소처럼 편하게 행동하고 있지만 여기서 더 욕심을 부렸다가는 전처럼 다시 어색해질지 모를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성급하게 밀어붙이는 짓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선 늘 상냥하게 행동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최근 들어 그 결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틈만 나면 제게 매달려 오는 사랑스러운 연인 때문에 말이다.
“리히……!”
오늘도 단장실로 뛰어 들어온 아나샤는 그를 찾았다. 마침 단장실을 나서기 위해 일어서 있던 리히르트는 제 품으로 냅다 달려오는 그녀를 익숙하게 받아내었고 말이다.
“역시 제 예상이 맞았어요! 아무래도 크리스 삼촌이 눈치챈 거 같아요. 리히 보러 가려고만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엄청 눈치를 준다니까요?”
“…….”
“저번부터 너무 좋아하지 말라느니, 저만 보면 자꾸 잔소리를 하길래 피해 다녔는데, 역시 눈치챈 거 같죠? 리히 생각은 어때요?”
빠르게 말을 끝낸 아나샤는 넓은 가슴팍에 이마를 대었다. 그러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는 양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비비적댔다.
“다른 삼촌들은 조용한 거 보면 크리스 삼촌만 아는 것 같은데…, 휴. 진짜 어떻게 눈치챈 걸까요?”
“…아샤, 일단 앉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애써 침착함을 되찾은 리히르트는 그녀를 달래며 소파로 데려갔다. 그러곤 붙어있는 그녀의 몸을 슬며시 떼어내 앉히고선 자신도 맞은편에 착석했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어도 단둘이 있는 모습을 많이 보였지 않습니까. 슬슬 눈치챈 자가 나올 만합니다.”
“역시 그렇겠죠……. 그래도 아직은 의심 단계인 거겠죠? 우리가 그, 뽀뽀하거나 포옹하는 걸 본 건 아니겠죠?”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한 것이니 본 것은 아닐 겁니다.”
그는 차분하게 그녀와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벨덴 경이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계속 아닌 척을 하거나, 아니면 사실을 말하고 먼저 입막음을 해두는 겁니다.”
“크리스 삼촌 정도면 뭐 입막음은 쉽겠지만… 아마 사실대로 얘기한다면 계속 간섭해 올 거예요. 지금도 이러는데.”
“저는 그대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자신에게 모든 결정권을 내어주는 그의 말에 아나샤는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삼촌들에게 연애 사실을 들키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기사 작위를 받았을 때도 한동안 ‘아샤 경’이라고 귀가 닳도록 놀려댔는데, 연인 관계라는 걸 들킨다면 ‘미래 공작 부인’이라고 놀려댈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야 한 귀로 듣고 흘리면 그만이지만 리히르트 그가 들었을 때 곤란할까 봐 걱정이었다.
“아무래도 아닌 척 잡아떼는 게 제일일 것 같은데, 그러려면 거리를 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의심이 누그러질 때까지만요.”
자주 붙어있어서 오해받는 거라면 붙어있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아나샤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조금 못마땅했다. 다른 좋은 방법은 없을지 그녀가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렇다면 며칠 휴가를 다녀오는 건 어떻겠습니까?”
“휴가요?”
아나샤는 들려온 말에 동그랗게 눈을 떴다. 이에 리히르트는 옳게 들은 것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저번에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다고 애기하지 않았습니까. 이참에 다녀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
“원한다면 다녀와도 됩니다. 아직 재활 훈련 중이기도 하고 지난번 임무에 대한 포상 휴가를 준 것으로 하면…….”
“고마워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나샤는 테이블 위를 건너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고민이 사라진 얼굴은 진심으로 기쁘다는 양 말갛기만 했다.
“너무 좋아요! 그럼 오늘 바로 할아버지한테 편지를 보내야겠어요! 분명 제가 온다고 하면 엄청 기뻐하실 거예요.”
아나샤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목에 닿는 보드라운 피부와 작은 숨결에 리히르트는 잠시 속으로 심호흡을 한 뒤 팔을 움직였다. 얇은 허리를 감고서 닿아있는 그녀의 몸을 살짝 제 몸으로부터 떼어냈다.
아나샤는 순순히 상체를 뒤로 물렸지만 여전히 허벅지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에 있는 그의 얼굴을 예뻐 죽겠다는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쪽 하고 아나샤는 재빨리 그의 뺨에 입술을 맞췄다.
“그대가 좋아하니 저도 기쁩니다.”
너무 좋다며 노래를 부르는 그녀를 따라 옅게나마 미소 지으며 리히르트는 얘기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마냥 평온하진 않았다.
안 그래도 날마다 늘어가고 있는 그의 인내심이었다. 매일같이 인내심을 시험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리히르트는 맞닿아 있는 몸 사이로 손을 넣어 그녀를 제게서 다시금 떨어뜨렸다.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어디 나가려던 참이었죠.”
아나샤는 황급히 그의 위에서 일어났다. 원래라면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겠지만 아나샤는 문 앞까지만 그를 배웅해 주었다.
“따라가고 싶지만… 한동안은 조심해야 되니까 참을게요. 그리고 편지도 써야 되니까요.”
“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네, 다녀와요.”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리히르트는 단장실을 나섰다.
한동안 무표정하게 걷던 그는 복도 그늘 속에 들어서자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메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뒤늦게 입가에선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마치 타들어 가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려는 듯이 한숨 소리는 길게 이어졌다.
* * *
“어쩐지 저번에 왔을 때 뭔가 달라진 것 같았어요.”
오랜만에 아나샤는 루시와 밖에서 만났다. 디저트를 먹으면서 아나샤는 루시에게만 조심스레 연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루시의 반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담담했다.
애초에 처음부터 두 사람을 연인 관계로 의심했었던 루시였다. 최근에도 몇 번이나 저택에서 단둘이 식사를 하던 것을 떠올리면 눈치채고도 남는 것이다.
“다른 게 보였어요?”
“입이 아주 헤벌쭉해져서 다물어지지 않던데요?”
“제가 그렇게나 티를 냈다고요?!”
아나샤는 자신의 두 뺨을 찰싹 때리듯이 쥐었다.
“엄청 티가 나진 않아도, 아샤를 잘 아는 사람이 보면 어느 정도 눈치챌 정도라고 할까요?”
“몰랐어요. 저는 나름 숨긴다고 숨긴 건데…….”
이러니 크리스 삼촌이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다며 아나샤는 조용히 수긍했다. 그때, 루시가 목소리를 낮춘 채 아나샤에게 말을 건넸다.
“그보다 연애는 비밀로 하는 거예요?”
“네, 아무래도 보는 눈들이 있으니까 일단은…….”
“공작님이 먼저 제안한 건 아니죠?”
부릅 눈을 뜬 채 루시는 아나샤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눈빛이 제법 매서워서 아나샤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가슴이 찔렸을 정도였다.
“리히는 공개적으로 알려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그냥 제가 신경 쓰여서요.”
“그럼 결혼에 대해선 얘기해 본 적은 없고요?”
아나샤는 슈크림을 한입 크게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생크림을 듬뿍 묻힌 채 아나샤는 말을 이어갔다.
“뭔가 그런 얘긴 아직 어려워서 지금 당장은 생각 안 하려고요. 훗날의 얘기겠지만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해도 저는 그, 두 번째 부인? 같은 걸로 들어가지 않을까요?”
“두 번째 부인요? 어째서요! 유일한 공작 부인이 돼야죠. 아샤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요!”
“루시, 쉿! 쉿…….”
아나샤는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자신들 말고도 가게 안에서 떠드는 손님들이 많아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물론… 저도 리히랑 결혼까지 하게 된다면 단둘이가 좋겠지만, 아무래도 결혼은 귀족한테는 중요한 거니까요. 더군다나 리히는 대귀족인데 얼마나 중요하겠어요.”
그에게 중요한 것이라면 아나샤는 당연히 그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가문에 이익이 되는 상대랑 한다고 하더라고요. 두 가문 간의 결합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귀족의 결혼이라는 게 생각보다 되게 복잡하더라고요.”
보통은 높은 가문의 여식이 첫 번째 부인을 차지하고, 그다음으로 지위가 낮은 여인은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가는 식이라고 했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긴 하겠지만…….”
루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차를 들이켰다. 하필이면 차 맛도 써서 미간은 더 좁아졌다.
아나샤는 그런 루시의 반응에도 해맑기만 했다. 여전히 입가에 생크림을 묻힌 채로 맛있게 디저트를 먹어댔다.
“그리고 저는 안주인이 뭐 해야 되는지 하나도 모르는걸요. 만약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가게 되면 첫 번째 부인분한테 가문을 맡기고 저는 계속 기사단 일을 하는 거죠.”
“…그건 좋겠지만, 정말 어렵네요.”
좋은 건가? 이제는 헷갈릴 지경이라고 루시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샤가 너무 긍정적인 건지, 현실적인 건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공작님이 이 얘기를 듣게 된다면 좋은 반응을 보이진 않을 것 같다는 거였다.
* * *
아나샤는 금방 편지의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흔쾌히 영지로 놀러오라는 할아버지의 편지에 아나샤는 곧바로 짐부터 쌌다.
출발 날짜에 가까워질수록 아나샤의 기분은 들뜨기만 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애인의 몸에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리히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아쉬워요.”
벌써부터 열흘간의 휴가 동안 그를 못 보는 게 아쉽다는 듯이 아나샤는 더욱 질척였다. 거의 접착제 수준으로 그의 몸에 달라붙어 꿍얼대기 일쑤였다.
“그냥 확 공개 연애 하고서 같이 휴가 가버릴까요? 리히랑 가면 더 재밌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