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사랑에 빠질 때-50화 (50/87)

50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리히르트는 그녀의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몸을 돌려 그대로 나가려는 사내를 바라보며 엘리시아는 속으로 조용히 혀를 찼다. 예상은 했지만 쓸데없을 만큼 청렴하고도 고지식한 사내였다.

“협상을 하려면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하는 게 옳겠죠?”

엘리시아는 일어나 소파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행동에 리히르트는 걸음을 멈추었다. 얼마 안 가 엘리시아는 하얀 천이 씌워진 네모난 물체 앞에 멈춰 섰다.

천 끝을 잡아 아래로 끌어 내리자 그 안에는 커다란 액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액자 속에는 아나샤가 그려져 있었다.

활짝 핀 꽃들 속에 앉아 수줍게 레이스 양산을 쓰고 있는 그림이었다. 특별히 신경 써서 그리도록 지시한 만큼 웃고 있는 하얀 얼굴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하나밖에 없는 초상화인데 필요 없다면 어쩔 수 없죠.”

엘리시아는 그가 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거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세상 모든 것에 무심해도 단 하나, 아나샤에 관련된 것만큼은 사족을 못 쓰는 남자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몇 분 뒤, 엘리시아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청렴하기로 소문난 웨일그레슬 공작이 처음으로 뇌물에 매수된 순간이었다.

* * *

최근 들어 리히르트의 삶은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일상은 변함이 없었으니 그의 관점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었다.

창을 통과하는 햇살은 따사로웠다. 하얀 빛이 부서져 내리는 창밖의 풍경은 아름다웠고, 나무들은 더없이 싱그러워 보였다. 평소라면 관심도 없었을 복도 바닥 구석 따위에도 눈길을 주게 되었다.

흔히들 사랑에 깊이 빠졌을 때 겪는다는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현상’이라지만, 리히르트는 그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리히르트는 단장실에 들어서기 전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보기 전 각오가 필요했다. 전장에서도 한 번 긴장한 적이 없는 그였으나 현재 그는 답지 않은 긴장 상태였다.

마침내 리히르트는 문을 열었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아나샤가 그의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단장님!”

인사를 건넨 아나샤는 재빨리 문밖으로 몸을 내밀어 주위에 누가 없는지 확인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바로 문을 닫고 그를 돌아보았다.

“아니, 흠… 리히.”

아직은 애칭이 낯간지럽게만 느껴져 순식간에 두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 잘 익은 과일 같은 뺨을 바라보던 리히르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뺨에 입술을 맞추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최대한 절제하겠다는 각오는 오늘도 그녀 앞에선 거품처럼 사라졌다. 리히르트는 제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손을 슬며시 잡았다. 뺨을 만지고,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그나마 참아낸 것이 이 정도였다.

“아, 우리 밥 먹어요.”

그의 손을 포개듯 맞잡은 채 아나샤는 쭈뼛거리며 소파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는 식판과 포크 두 개가 놓여있었다. 그와 같이 먹겠다며 아나샤가 식당에서 배식을 받자마자 들고 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즐겼다. 식사를 핑계로 앉아있었지만 실상은 아침 데이트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달콤한 시간은 두 사람의 시간 감각을 잃게 만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여유로이 차까지 마시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단장실 안을 울렸다.

흠칫 놀란 아나샤는 시계를 한번 확인하고는 그대로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벌써 업무 시간인가 봐요. 저는 이만 재활 훈련 하러 가볼게요.”

“…알겠습니다.”

알겠다는 말과는 달리 그의 긴 손가락들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감쌌다.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듯 리히르트는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리하지 말고, 이따가 봅시다. 아샤.”

“…리히도요. 이따가 봐요.”

한동안 떨어질 줄 모르던 손을 놓고서 아나샤는 빈 식판을 들고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문 앞에는 부단장 칼리프가 예의 그 깐깐한 얼굴로 서있었다.

“뭡니까, 아나샤 경?”

“뭐, 뭐가요?!”

칼리프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평소라면 먼저 인사했을 그녀가 유난히 조용히 있기에 먼저 말을 걸었을 뿐이었다. 원래도 종잡을 수 없는 편이긴 했지만 오늘은 한층 더 이상했다.

“…저는 바빠서 이만!”

아나샤는 황급히 그를 지나쳐 복도를 뛰어갔다. 그 수상쩍은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칼리프는 이윽고 보고를 위해 안으로 들어섰다.

* * *

최근 들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은 리히르트뿐만이 아니었다. 아나샤 또한 그러했다. 특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면 그 황홀한 기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음씨 좋고, 다정하며, 완벽할 만큼 잘생긴 사람이 자신의 첫 애인이라니……! 마음이 벅차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 시달렸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미래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다.

서로의 첫 연인인 만큼 그에게 더 잘해주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는 만큼 자신도 더 아낌없이 사랑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과한 애정은 모든 행동에서 나타났다.

매일 아침마다 맛있는 것들로만 죄다 담은 식판을 들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행동도 그중 하나였다.

기사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모습이 흡사 어린 새끼를 먹이기 위해 부랴부랴 먹이를 챙기는 어미 다람쥐 같다고 여겼다.

왜 식당에서 안 먹고 자꾸 밖으로 가져가냐는 물음에 아나샤는 밖에서 경치를 구경하며 먹을 거라고 했지만, 포크가 두 개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기사는 없었다. 애초에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달려 나가는데 말릴 수도 없었다.

“…단장실 쪽으로 가는 거 보니까 단장님이랑 같이 먹으려나 본데.”

“역시…….”

오늘도 어김없이 아나샤가 식당을 나서자 기사들은 숙연한 분위기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목석같은 남자가 대체 무슨 짓을 했으면 순진한 애가 저렇게 홀려있나 싶은 것이다.

“아샤도 성인인데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그때,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던 크리스가 목소리를 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리스 네가 그런 말을 해……?”

“뭐. 왜.”

수상쩍다는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크리스는 뻔뻔하게 식사를 이어갔다. 이에 마브릭도 동조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노력했다.

“둘 다 성인 남녀인데 이성적으로 끌렸을 수도 있지. 그리고 크리스 말대로 아샤도 이젠 어린애가 아닌데 우리가 이런 걸로 간섭하는 것도 좀…….”

“아니, 그건 아니지. 아샤가 몇 살인데. 솔직히 우리 눈엔 아직도 애야.”

“거기다 남자랑 관련된 일인데 어떻게 우리가 얌전히 있을 수 있겠냐! 단장님이 어떤 놈일 줄 알고!”

“옳소!”

“말 한번 잘했다, 바론!”

강경파 삼촌들의 반대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자 크리스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귀를 막았다.

하여간 팔불출들……. 차마 두 사람이 연인 사이라고는 말은 못 하겠고, 크리스는 답답함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이 난리인데 만약 들킨다면 어떻게 될지 벌써부터 피곤하기만 했다.

* * *

두 사람의 비밀 연애는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기사들, 특히 삼촌들에게는 아직 비밀로 해달라는 아나샤의 부탁을 충실히 이행하듯 리히르트는 남들 앞에서 티를 내지 않게 주의했다. 정작 아나샤는 얼굴에서 이미 티란 티는 다 내고 있었지만 다행히 기사들의 눈에는 짝사랑 정도로 비쳤다.

틈만 나면 그를 만나러 달려가는 그녀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소에도 단둘이 붙어있던 적이 많아 딱히 의심을 살 행동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아나샤는 훈련이 끝나기 무섭게 리히르트를 찾아 연무장 뒤편으로 향했다. 수돗가에 홀로 있는 그를 발견하기 무섭게 아나샤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한번 뛰어 그대로 와락 안기는 그녀를 리히르트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받아내었다.

십수 년 동안 단련된 몸이었다. 아무리 아나샤가 전력으로 부딪쳐 와도 그는 거뜬하게 그녀를 받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저 그녀가 되레 다치진 않을까 조심스러울 뿐이었다.

“아샤, 젖을지도 모릅니다.”

“괜찮아요.”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은 채 리히르트는 다른 손으로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동안 아나샤는 물방울이 매달린 색소 옅은 금색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을 만나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예뻤다.

“제가 닦아줄까요?”

“괜찮습니다.”

짧게 뺨에 입을 맞추고는 리히르트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등을 돌린 그는 수건을 집어 들고 머리의 물기를 닦아내었다.

그 잠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등 뒤에서는 아나샤가 와락 안겨왔고 말이다.

눈만 마주쳐도 부끄러움에 쭈뼛거렸던 것도 며칠이 지나자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가 다시 편해지기 시작하자 아나샤는 지금처럼 스스럼없이 굴게 되었다.

넓고 탄탄한 등에 착 달라붙은 채 아나샤는 작게 흥얼거렸다. 흡사 어미 다람쥐 등에 매달린 새끼 다람쥐 같은 꼴이었다.

“얼른 점심 먹으러 가요. 오늘은 뭐가 나오려나.”

“따로 먹고 싶은 건 없습니까?”

“먹고 싶은 거요? 나가서 먹게요?”

리히르트는 제 허리를 두르고 있는 그녀의 팔을 잡아 풀어내었다. 그러곤 그녀를 돌아보며 한 손으로는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옷을 갈아입을 겸 저택에 다녀올 생각입니다만, 같이 나갔다 오는 게 어떻습니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미리 준비해 놓도록 이르겠습니다.”

“…….”

“아샤?”

아나샤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멍을 때렸다. 새삼스럽게도 젖어있는 그가 치명적일 만큼 잘생겨서 또다시 반한 기분이었다.

“…아무거나 좋아요. 정말요.”

아나샤는 조용히 다가가 그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매일매일 그를 볼 때마다 좋아하는 마음이 더욱 커져만 가서 큰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