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어느새 긴장도 사라져 아나샤는 평소처럼 그와 편하게 떠들게 되었다.
“하루 종일 걷긴 했지만 좀 더 걸을래요? 단장님, 다리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그의 선선한 대답에 아나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는 동안 제법 멀리 온 것인지 강 위에 놓인 다리가 보였다.
두 사람은 거리 끝과 이어지는 다리 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비친 불빛들로 인해 은은히 반짝이는 강은 아름다웠다. 아나샤는 강물 표면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걸음을 멈췄다.
“기억나세요? 예전에 여기서 단장님이 저한테 마차 양보하셨잖아요.”
“당연히 기억합니다.”
“사실 그날 테윌러한테 거절하러 가던 중이었거든요.”
그를 돌아보며 아나샤는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나갔다.
“아, 테윌러가 누구냐면요. 견습생 시절 때 우리 기사단에 있었던 친구인데 예전에 저한테 무도회 파트너 신청했다고 한…….”
조잘거리던 아나샤는 그가 걸음을 떼자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어느새 자신의 바로 앞에 다가와 있었다. 좁아진 거리에 이제 겨우 괜찮아졌다고 여긴 심장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어… 그때 자세히 못 물어봤는데, 강에 빠뜨렸던 서류철요. 정말 안 중요한 거였어요?”
“네.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아나샤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필사적으로 다른 할 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도 그럴 게 숨결이 의식되기 시작하자 가슴속이 간질거렸기 때문이다.
“아샤 경,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습니다.”
입을 연 리히르트는 살며시 시선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옅은 색의 긴 속눈썹이 그녀를 담은 눈동자 위를 비스듬히 가렸다.
“그날은 경황이 없어 제대로 말하지 못했습니다만… 그대의 애인이 되는 것을 허락해 주겠습니까?”
마치 서약이라도 하듯이 정중한 고백이었다. 리히르트는 재촉하지 않고 그녀가 대답해 주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뒤 아나샤는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거렸다.
“…좋아요.”
아나샤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애꿎은 입술만 꾹꾹 깨물어 댔다.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어 바닥을 향해 눈을 내리깔고 있을 때였다. 아랫입술 위로 무언가가 닿자 아나샤는 깜짝 놀라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순간적으로 입술인가 싶었으나 그는 살짝 고개를 숙였을 뿐 입술이 닿지는 않았다. 눈동자를 아래로 굴려 확인하자 그의 엄지손가락이 자신의 입술 위에 닿아있었다.
“키스해도 되겠습니까?”
속삭임과 같은 낮은 목소리에 아나샤는 눈을 꼭 감았다. 부드럽게 입술 위를 문지르는 엄지에 절로 입술에 힘이 풀렸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단단한 팔뚝이 허리 뒤를 받치듯 둘러져 왔다. 이윽고 말랑한 감촉이 입술 위에 조심스레 닿았다. 아나샤는 숨을 참은 채 그와 가볍게 입술을 맞대었다.
조금 길게 이어지는 버드 키스에 아나샤는 어떻게 호흡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숨만 참았고 말이다. 그 서툰 반응에 리히르트는 결국 낮은 웃음을 삼키며 살며시 입술을 떼었다.
그녀는 따스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온갖 어여쁜 단어들로 이뤄진 사람 같았다. 어떻게 해야 될지 알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한참 동안 그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자 뒤늦게 아나샤는 눈을 떴다. 서로의 코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치자 뺨이 절로 홧홧 달아올랐다. 아나샤는 뒤로 몸을 빼고 싶었으나 허리를 감은 팔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 없자 울상을 지은 채 그를 올려보았다.
“단장…….”
“이름으로 불러주십시오.”
“…네? 그치만…….”
“아니면 애칭도 좋습니다.”
어투는 부드러웠지만 절대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가 스며든 벽안은 단호했다. 아나샤는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리를 굴려야 했다. 애칭으로 불러주지 않으면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리히…라고 불러도 돼요?”
자신의 애칭도 두 글자이니 그의 애칭도 두 글자인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나샤가 어떠냐고 그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그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왔다.
아나샤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채 어깨를 움츠렸다. 잔뜩 긴장한 것에 비해 키스는 짧았다. 조금은 허무할 만큼…….
“아샤?”
그의 부름에 상념에서 깨어난 아나샤는 화들짝 놀라며 “네?!” 하고 외쳤다. 금방이라도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를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리히르트는 그것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아직 그녀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라고 오해하고는 허리를 감은 손을 풀었다.
두 걸음 뒤로 물러선 리히르트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밤이 늦었으니 데려다주겠습니다.”
마차가 있는 곳까지 두 사람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뜨거운 손을 맞잡은 채로 말이다.
8장 비밀 연애 대작전 (1)
다음 날 아나샤는 황녀궁을 방문했다.
“…그래서 단장님과는 어제부터 연인 사이가 됐어요.”
수줍게 얘기를 전하는 아나샤의 모습에 엘리시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딸의 연애 얘기를 들은 어머니 같은 반응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나요?”
“아뇨, 아직은 비밀로 하기로 했어요.”
“그렇군요.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 아샤 경.”
“아니에요. 애초에 황녀님께서 안 말해주셨다면 바보같이 혼자 계속 고민만 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땐 정말 감사해요.”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엘리시아는 알 수 있었다. 모든 감정이 얼굴 위에 투명하게 떠오르니 모를 수도 없겠지만.
그래서 엘리시아는 아나샤를 만나는 시간이 편했다. 적어도 복잡한 계산은 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저 혼자 너무 많이 떠들었죠? 전 이제 그만 가볼게요.”
“즐거웠어요. 혹시라도 연애 상담이 필요하면 찾아와요. 언제든 들어줄 테니.”
“정말요? 저야 감사하죠!”
감사하다 못해 황송할 지경이라며 아나샤는 기뻐했다. 그런 그녀에게 조용히 웃어 보이며 엘리시아는 차를 들이켰다.
‘이제 남은 건…….’
아나샤가 간 뒤 엘리시아는 시종을 시켜 별궁에 보관해 두었던 그림 한 점을 가져오게 했다. 그것을 특별히 액자에 넣도록 지시한 뒤 그녀는 짤막한 서신을 써 내려갔다.
서신을 보내고 정확히 세 시간 뒤, 황녀궁을 찾아온 방문객이 있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에요.”
리히르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예를 갖추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노을을 등진 채 앉아있는 엘리시아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엘리시아는 책을 덮고서 그를 향해 눈길을 옮겼다.
“슬슬 이 사건도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아서 불렀어요.”
일주일 전 심복 중 하나가 급습을 당한 일을 떠올리며 엘리시아는 쓰게 웃었다.
왼쪽 팔을 못 쓸 만큼 자넌의 어깻죽지는 깊게 베인 상태였다. 가까스로 피했기에 이 정도에서 그칠 수 있었다는 자넌의 말을 떠올리며 엘리시아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발뺌할 생각은 없어요. 애초에 오해를 풀기 위해 부른 것이니까요.”
자넌을 해친 자가 누구인지는 굳이 알아낼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자넌도 누군지 알기에 군말 없이 당한 것이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샤 경을 다치게 만든 건 내 뜻이 아니었어요.”
무도회에서의 일은 전부 오해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고 엘리시아는 해명했다. 그 당시 그녀의 심복인 자넌은 숨어있던 아나샤를 기습하려는 적으로 오인하고 먼저 공격한 것이었다. 아나샤 또한 자넌을 황성에 잠입한 암살자로 오해하였고 말이다.
갑작스러운 전투에 그 당시 엘리시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암살자를 피해 도망치는 척 연기하는 것뿐이었다.
“제게 심복이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겨야 했기에 말릴 수 없었어요. 물론 드러낸다 하더라도 과연 오라버니가 이 사실을 믿어줄지 모르겠지만요.”
엘리시아는 조용히 입술을 끌어 올렸다. 동시에 휘어진 입술 사이로 작은 실소가 흘러나왔다.
“오라버니는 절 그저 지켜줘야 될 가냘픈 동생으로 생각할 뿐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고 예쁜 여동생 말이에요.”
이복형제인 어린 황자를 견제해도 자신은 견제의 대상에도 들지 않았다. 제게도 계승권이 있다는 사실을 아예 망각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엘리시아는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끼는 편이었다.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그 덕분에 지금껏 뒷세계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니까.
“나 또한 계속해서 가녀린 여동생으로 있어줄 생각이에요. 그러기 위해선 공작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죠.”
엘리시아는 차분하게 그를 응시했다. 잔잔한 웃음기까지 드러낸 눈은 모든 계산을 마친 것처럼 여유로웠다.
“공작의 의중을 알고 싶어요. 왜 오라버니에게 나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는지 말이에요. 비밀을 지켜주기엔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요?”
“공과 사를 구분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이 비밀을 지켜줄 건가요? 이 얘기까지 들었다면 오라버니가 가장 견제해야 될 상대가 누군지 이제는 똑똑히 알 텐데요.”
한때는 눈앞의 남자가 오라버니의 사람이라고 여겼던 적이 있었다. 함께 전장을 누볐던 사이인 만큼 웨일그레슬 공작을 향한 오라버니의 신뢰는 높아 보였으니까.
하지만 직접 보니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권력이나 야심은커녕 세상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누가 황위를 계승하는지는 관심 없습니다.”
“오라버니가 들으면 섭섭해하겠네요.”
엘리시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러곤 완벽하게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는 그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이번 사건은 다른 이에게 암살 누명을 씌우고서 적당히 끝내주면 좋겠어요. 더 이상 호위가 늘어나는 건 원치 않거든요.”
적당히 혀가 잘린 범죄자를 준비해 주겠다며 엘리시아는 상냥히 덧붙여 얘기했다.
“수사는 종결시키겠지만, 누명을 씌우는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얘기가 끝났으면 이만 나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