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자리에서 일어난 아나샤는 그 발소리를 놓칠세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복도 코너를 돌자 그 너머에는 그토록 찾던 그가 있었다.
아나샤는 다시 힘껏 지면을 박차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복도 위를 울리는 그 가벼운 발소리에 리히르트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길이 아나샤에게 닿는 동시에 아나샤가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좋아해요!”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말이었다. 갑작스레 그 말을 들은 리히르트도, 순간적으로 내뱉은 아나샤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숨을 멈췄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나샤는 먼저 슬그머니 그의 옷자락을 놓으며 입술을 뗐다.
“황녀님께 들었어요. 제가 달러스에 갔다는 얘길 듣고 바로 달러스로 떠나셨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절 의원에게 데려가 줬다는 것도, 제가 눈뜰 때까지 계속 곁에 있어줬다는 것도요. 전부 듣고 엄청… 많이 감동했어요.”
뜨끈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얼굴에 아나샤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만 열심히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와서 어떻게 그와 얼굴을 마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 번도 사랑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어서 이게 연애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단장님이 너무 좋아요. 정말로요.”
“…….”
“미안해요! 단장님도 저랑 같은 마음인 건지 궁금해서… 이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너무 다짜고짜 제 말만 한 게 아닐까. 막상 말하고 나니 견딜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기분만 들었다. 아나샤는 화끈거리는 양 뺨을 숨기기 위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 그게 저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진 모르겠는데, 다, 다시 생각을 정리해서 올게요!”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아나샤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도망치려는 시도는 두 걸음을 떼기도 전에 무산되고 말았다.
“…좋아합니다. 아샤 경.”
뒤에서 울리는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사랑합니다.”
아나샤는 제 몸을 뒤에서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그의 팔에 점차 힘이 실리는 것을 느꼈다.
“정말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더 꽉 저를 끌어안으며 품속에 가두었다. 등 뒤에 닿은 온기가 너무 뜨거워서 이대로 녹아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줄곧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대가 너무 좋아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고, 그대를 잃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고… 줄곧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절절한 고백에 아나샤는 자신이 했던 말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였다. 이제까지 그가 숨겨왔던 감정이 이토록 애절한 것일 줄은 몰랐기에 더욱 멍하기만 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의 고백을 듣고 있던 아나샤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심장은 물론 온몸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온 사방을 뛰어다녀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아나샤가 간질거림을 참지 못해 입술만 꾹꾹 깨물던 중, 별안간 리히르트가 포옹을 풀었다. 그러곤 작은 손을 부드럽게 그러쥐며 그녀를 자신 쪽으로 돌려세웠다.
이제야 마주친 눈에 리히르트는 쥐고 있던 손을 살짝 쥐었다 놓았다.
“꿈만 같습니다. 아샤 경.”
“…저도요.”
“괜찮다면 한 번 더 얘기해 주겠습니까?”
“무, 뭘요?”
“…제가 좋다고 한 번 더 얘기해 주십시오.”
“…조, 좋아해요.”
아나샤는 목까지 새빨개진 채로 기어 들어가듯이 말했다. 하지만 아주 부끄럽지는 않았다. 마주한 단장님의 얼굴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붉었으니까.
“내, 내내일 봐요!”
짧은 눈 맞춤을 뒤로하고 아나샤는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복도에 그 홀로 남겨둔 채 잽싸게 도망갔다.
* * *
아침에 일어난 아나샤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이렇게 현실적일 수가 없었다.
꿈도 꾸지 않고 푹 잔 것 같은데 마치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이윽고 생생히 떠오른 어제 일에 아나샤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는 비명을 내질렀다.
이불에 둘둘 말린 채로 아나샤는 좁은 침대 위를 굴러다녔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악!”
아나샤는 이불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이미 머리가 산발이었지만 그녀는 더욱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부산스럽게 방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단장님 얼굴을 못 보겠어!”
고백하고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 것까지는 좋은데 이다음이 문제였다. 벌써부터 홧홧 열이 오르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아나샤는 찬물로 세수부터 했다.
‘아냐, 이럴수록 평소처럼 행동해야 돼.’
그냥 평소대로 행동하자. 그렇게 마음을 굳히니 이다음은 척척 진행되었다. 제복으로 갈아입은 뒤 아나샤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앞에 서있는 시간만큼은 평소답지 않게 길었다. 혹시라도 눈곱은 끼지 않았는지, 뻗친 머리는 없는지 꼼꼼하게 한 번 더 확인하고서야 방을 나섰다.
‘평소대로… 평소대로만 하자…….’
오는 동안 자기최면을 하듯이 몇 번이나 되새겼으나 막상 단장실 앞에서 아나샤는 들어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문 너머에 있을 그와 마주칠 생각에 벌써부터 심장이 쿵쾅거려 이게 떨리는 건지 무서운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일단 아침 식사부터 하고 다시 와야겠다!’
그리고 아나샤의 포기는 빨랐다. 빠르게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는 그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아샤 경.”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바로 들려온 목소리에 아나샤는 흠칫 몸을 떨었다. 아나샤는 애써 태연한 척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단장님,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입니다.”
이제껏 긴장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래서인지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갑자기 나오셔서 깜짝 놀랐어요.”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묻고 싶은 거요?”
“약속을 미루기로는 했지만, 혹시 내일 잠시라도 시간이 될까 해서 말입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제게 시간을 내주지 않겠습니까?”
“아 맞다! 미안해요. 어제는 갑자기 미뤄서……. 저 시간 되니까 그럼 예정대로 내일 만날까요?”
아나샤는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럼 내일 기사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약속 시간은 이따가 정해요. 저는 이만 밥 먹으러 가볼게요.”
리히르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끝마친 아나샤는 그대로 그에게서 등을 돌려 걸어갔다. 팔다리가 묘하게 삐걱거렸으나 리히르트는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뒤늦게 단장실로 들어섰다. 문을 닫기 무섭게 그의 입가에선 안도하듯 긴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평소와 같아 보였으나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얘기를 나누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심장이 요동쳐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으니 말이다.
어제의 일이 계속해서 떠올라 그는 밤도 지새웠을 지경이었다. 결국 한숨도 자지 않고 새벽부터 출근한 상태였다.
리히르트는 입매를 만지며 다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애써 차분함으로 가장했지만 마음이 들뜨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 * *
아나샤는 아침부터 거울 앞에 서있었다. 루시가 선물해 준 노란 원피스는 오늘따라 더 화사하고 예뻐 보였다. 그래서인지 머리가 아쉬웠다. 그냥 풀기엔 밋밋해 보이고, 반 묶음을 하려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아나샤는 서랍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찾았다!”
맑은 푸른빛의 구슬 머리핀을 꺼내 든 아나샤는 조심스럽게 머리에 꽂아보았다. 조금 붉게 칠한 입술 위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나샤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기사단 앞으로 나가자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는 검은색 마차가 보였다.
그녀가 걸어오는 것을 창문을 통해 확인한 리히르트는 곧바로 마차 문을 열고 내려섰다. 그는 눌러쓰고 있던 진갈색의 베레모를 살짝 위로 들어 올리고는 아나샤와 눈을 맞췄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샤 경.”
“네! 그보다 정말 철저히 준비하고 오셨네요.”
아나샤는 최대한 눈에 안 띄게 입고 온 그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같았다. 내밀어진 그의 손을 붙잡은 아나샤는 마차에 올랐다.
소파에 앉아 편하게 등을 기대려는데 맞은편에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제 머리에 향해있는 것을 알아차린 아나샤는 작게 뺨을 긁적였다.
“맞아요. 단장님이 찾아주셨던 그 머리핀… 생각나서 하고 왔어요.”
그가 바로 알아볼 줄은 몰랐기에 괜히 낯간지럽기까지 했다. 손을 들어 머리핀만 만지작거리던 아나샤는 말이 없는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그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숨죽여 웃고 있었다.
매끄럽게 휘어 올라간 입술에 아나샤는 심장이 쿵 떨어질 만큼 놀랐고 말이다. 리히르트는 웃음기를 조금 거두고서는 다문 입술을 뗐다.
“미안합니다.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라서 말입니다.”
“하긴, 우리 첫 만남이 좀 강렬하긴 했죠. 그래도 워낙 위급한 상황이라 머리핀까지는 기억 못 하실 줄 알았어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머리핀 덕분에 감옥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인데.”
“그런 것까진 기억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 일단 광장 쪽으로 갈까요?”
민망함에 아나샤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목적지를 말하자 마차는 빠르게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하늘에 떠있던 태양은 어느새 사라지고 환한 달이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휴우, 오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요.”
밤바람을 맞으며 앞장서서 걷던 아나샤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두 걸음 정도 떨어져서 걷고 있던 리히르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동의한다는 듯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에 먹은 거 진짜 맛있었죠? 솔직히 군것질을 너무 많이 해서 배불렀는데 너무 맛있어서 계속 들어가던 거 있죠?”
“저도 간만에 포식한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았어요. 아까 단장님 엄청 배불러 보이셨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