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도움이 될진 모르겠으나, 털어놓을 상대가 없다면 제가 들어주겠습니다.”
“고민은 없어요. 고마워요, 걱정해 줘서요.”
아나샤는 배시시 웃으며 테이블 밑에 둔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마도 그에게서 사과 얘기를 들은 날부터일 것이다. 그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아나샤는 드문드문 그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그 후로 그와 단둘이 있을 때면 묘한 긴장감에 마음이 들뜨기 일쑤였다. 그는 평소와 같이 자신을 대해주는데, 자신은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을 평소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대체 왜 이렇게 의식이 되는 거냐고……!’
아나샤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의 친절한 행동 하나하나를 의식하지 않으려 할수록 더 의식이 되었다.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이 특별하기에 이렇게 잘해주는 게 아닌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건 아나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다.
부하로서 특별히 애정하는 것이면 몰라도,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들이 수도에 널려있는데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귀족 아가씨와 결혼할 텐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이어가던 아나샤는 뒤늦게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생각을 들킨 것처럼 괜스레 두 뺨이 화끈거렸다.
“맞다. 저, 그… 약속이 있어서요! 이제 가볼게요. 케이크 맛있게 잘 먹었어요.”
아나샤는 애써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르게 소파를 돌아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 전에 나직한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이번 주 휴일 말입니다.”
아나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듯 잠시 입을 다문 그가 이윽고 입술을 떼었다.
“혹시라도 잊었을까 해서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당장 이틀 뒤가 휴일인데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만날 건지, 무엇을 먹을 건지도 말이다.
“…그 미안해요. 단장님. 혹시 약속 나중으로 미뤄도 될까요?”
아나샤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으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그는 느리게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 모습이 꼭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애처로워 보여서 아나샤는 황급히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아무튼 죄송해요!”
대체 무슨 깍지가 쓰인 건지 모르겠다고 여기며 아나샤는 도망치듯이 단장실을 벗어났다.
자리를 피한 것까진 좋았지만 나온 후에도 마음은 편치 못했다. 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맛집 가는 거 기대하고 계셨던 거면 어쩌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틀을 앞두고 상대가 갑자기 약속을 미룬다면 자신이라도 실망스러울 테다. 착한 단장님은 조용히 납득해 주었다지만, 자신이라면 왜 약속을 미루는지 꼬치꼬치 캐물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양심이 콕콕 찔려왔다.
‘그냥 다시 휴일에 만나자고 할까……? 그치만 단장님이랑 단둘이 있기엔… 아, 그럼 한 명 더 부를까?’
이런저런 생각을 이으며 아나샤가 막 본관 건물을 빠져나온 순간이었다.
“혹시 아나샤 라이나 경 되십니까?”
아나샤는 그제야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끄덕이며 본인이라고 대답하자 곧 그가 정중한 자세를 갖춰 인사했다.
“황녀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녀님께서 자신을 보길 원한다는 말에 아나샤는 곧바로 그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황녀궁에 도착한 아나샤는 안내를 받아 익숙한 방 앞에 도착했다.
응접실 안에는 엘리시아가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서 차를 따르며 시중을 들고 있던 시녀 로니는 안으로 들어선 아나샤를 발견하고는 놀란 듯 눈을 키웠다.
“사샤……?”
한 달간 자리를 비웠던 막내 시녀가 황실 기사 제복을 입고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
“오랜만이에요.”
아나샤는 제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로니의 시선에 어색하게 웃으며 엘리시아를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그녀 앞에 멈춰 선 아나샤는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아나샤 라이나, 황녀님을 뵙습니다.”
“어서 와요, 라이나 경.”
엘리시아는 웃으며 그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러곤 곧바로 시녀를 밖으로 물리고선 아나샤가 편히 자리에 앉도록 했다.
“먼저 찾아뵈었어야 하는 건데 죄송해요.”
아나샤는 제 앞에 있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먼저 말을 꺼냈다. 이에 엘리시아는 괜찮다며 고개를 내젓고는 걱정이 담긴 눈길로 그녀를 살폈다.
“크게 다쳤다고 들었어요. 다친 곳은 괜찮나요?”
“네, 보시다시피 아픈 곳 없이 멀쩡해요. 그리고 덕분에 이렇게 제복도 받고 인정받을 수 있어서… 황녀님께는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나한테 감사할 필요 없어요. 아샤 경의 능력이 뛰어나서 인정받은 거니까요.”
그 말에 아나샤는 수줍게 입을 다물었다. 황녀님이 이렇게까지 말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것이다.
“실은 사과할 일이 있어서 불렀어요, 아샤 경.”
그때, 잔잔한 침묵을 뒤로하고 엘리시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샤 경이 달러스로 출발하고 나서 웨일그레슬 공작이 이곳을 찾아왔었어요.”
“…단장님이요?”
“아샤 경을 찾기에 사실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는데,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어차피 지난 일이잖아요. 사과하실 필요 없으세요.”
아나샤는 서둘러 그렇게 얘기했으나 머릿속은 의문만이 둥둥 떠다녔다. 이제껏 작전이 모두 끝나고 나서 뒤늦게 단장님이 알게 된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니 조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공작이 얘기해 주지 않던가요?”
“네……. 그보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전혀 모르는 듯한 눈치에 엘리시아는 하는 수 없다는 양 작게 웃었다.
“아샤 경이 먼저 알아채기를 내심 기대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네요. 공작이 이제껏 계속 이곳을 찾아온 이유가 뭐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암살자에 대한 보고를 하러 온 게 아니었나요……?”
“그건 어디까지나 방문하기 위한 구실이었죠. 보고는커녕 대화조차 나누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아나샤는 그녀가 무얼 말하려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리시아는 여전히 조용히 웃으며 차를 한번 들이켰다.
“저는 아샤 경을 보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네? 네?!!”
“아샤 경은 공작이 싫은 건… 절대 아닌 것 같고, 한 번도 연애 상대로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걸까요?”
엘리시아는 순수한 궁금증을 드러내며 아나샤를 응시했다. 그런 자각이 아예 없다고 하기엔 아나샤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콕 찌르면 터질 것처럼 말이다.
“여, 연애 상대라뇨. 제가 어떻게 단장님이랑 여, 연애 같은 걸 할 수 있겠어요.”
“어째서요?”
“그야, 단장님은 공작님이신데 제가 어떻게… 아니, 그 전에 진짜 절 좋아하시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혹시라도 소문 같은 게 나면 귀족 사회에서 안 좋게 본다거나…….”
그 순간 들려온 맑은 웃음소리에 아나샤는 허둥지둥 말을 잇던 것을 멈추고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런 걸 신경 쓸 남자로 보이던가요? 아샤 경은?”
정말이지 즐거워 보이는 미소였다.
“이미 아샤 경 때문에 오라버니까지 찾아간 사람이에요. 그런 걸 신경 쓸 리가 없겠죠.”
“황태자 전하를요?”
“네. 아샤 경이 달러스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러스로 떠나기 위해 오라버니에게 출정 허가를 받으러 갔죠.”
엘리시아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마 몰랐겠지만, 누군가를 찾으러 작전도 무시하고 적진에 쳐들어갔던 모양이에요. 그 과정에서 사령관들과 문제를 빚어서 조금 말이 나오긴 했지만.”
말끝을 흐리며 엘리시아는 손끝으로 찻잔 테두리를 쓸었다. 아나샤는 그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듣기로는 그렇게 영주성에 쳐들어가고 한 시간 뒤에 웬 죽어가는 부상자를 안고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인근 영지로 가서 직접 의원까지 찾아다녔다고 들었어요. 피 칠갑을 한 채 영지 안을 돌아다녀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고도요.”
멍한 아나샤의 얼굴을 바라보며 엘리시아는 살며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동안은 저택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아서 오라버니가 직접 사람까지 보냈을 정도였어요. 듣기로는 하루 종일 부상자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
“정말이지 눈물겨운 부하애라고 해야 될지. 그리고 또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더 얘기하자면…….”
“저, 죄송해요!”
갑작스러운 외침에 엘리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아나샤는 중요한 사실을 막 깨친 사람처럼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급하게 가봐야 할 곳이 생각나서요! 다음에 다시 찾아봬도 될까요?”
“급한 일이면 어쩔 수 없죠. 어서 가봐요.”
“네! 진짜 죄송해요!”
허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나샤는 서둘러 응접실을 벗어났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엘리시아는 조용히 숨죽여 웃었고 말이다.
기사단에 도착한 아나샤는 곧바로 단장실로 향했다.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하고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 당장 그를 봐야 할 것 같았다.
“단장님!”
아나샤는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단장실에 있어야 할 그는 어디에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아나샤는 비어있는 업무 책상 앞을 서성이다가 잠시를 참지 못하고 다시 밖으로 뛰쳐나왔다.
저녁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복도 안은 한적했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뛰어다니며 그를 찾아다니기를 이십 분째, 아나샤는 결국 지쳐 복도 중앙에 주저앉았다.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아나샤는 먼 곳에서 들려온 희미한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