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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46화 (46/87)

46화

아나샤는 주섬주섬 옷 아래에 놓인 양피지를 펼쳤다. 금색의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양피지 중앙에는 몇 줄의 글이 적혀있었다.

“아샤 라이나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 라이나의 성을 정식으로 인정한다…….”

읽어 내려가는 동안 아나샤는 자신이 무엇을 읽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멍한 얼굴로 문서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그를 보았다.

마치 이게 뭐냐는 듯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리히르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뗐다.

“황실에서 이번 임무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라이나라는 성의 기사 작위를 정식으로 인정해 주는 문서입니다.”

차분하게 설명해 주는 목소리를 들으며 아나샤는 잠시 숨까지 멈춰야만 했다. 뒤늦게 아나샤는 입을 떡 벌리고 외쳤다.

“세상에! 말도 안 돼요!”

아나샤는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재차 문서와 제복을 번갈아 보았다. 이상했다. 분명 엄청나게 기쁜 일인데 도저히 환하게 웃을 수가 없었다.

아나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너무 행복해서 울 것도 같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분명 이상한 표정일 거라 여기며 아나샤는 뒤늦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 진짜, 너무 행복해요. 어떡해요, 단장님.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는 걸까요……. 혹시 꿈은 아니겠죠?”

“꿈이 아닙니다.”

“정말이죠?”

“네. 믿어도 됩니다.”

아나샤의 진지한 말에 리히르트는 잔잔한 웃음기를 드러내며 확신을 담아 얘기해 주었다. 그의 차분함이 옮았는지 아나샤는 서서히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저요. 앞으론 진짜 열심히 살 거예요.”

비장한 각오처럼 얘기한 아나샤는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제복 상의를 꺼내 들어 품에 끌어안았다.

“저, 이따가 다시 올게요! 미안해요, 단장님! 이것 좀 맡아주세요!”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는 듯이 아나샤는 곧바로 단장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한참을 달려 연무장으로 향했다.

“삼촌!”

검을 휘두르고 있는 크리스가 보이자 아나샤는 바로 그에게 달려갔다. 그러곤 크리스가 검을 내려놓기도 전에 그의 팔을 붙잡고 무작정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삼촌, 가자! 빨리!”

“갑자기 어딜? 일단 검 좀 집어넣자, 녀석아……!”

“리온한테 자랑하러!! 나 제복 받았어! 황실에서 나랑 리온을 인정해 준 거야!”

“뭐?! 그게 진짜야!”

크리스의 큰 목소리에 근처에서 훈련 중이던 기사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아나샤는 보란 듯이 하얀 제복 상의를 펼쳐 보였다. 한동안 훈련도 잊은 채 연무장에서는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가 이어졌다.

지급된 황실 기사단 제복은 다행히 아나샤에게 딱 맞았다. 바지는 타이트하면서도 신축성 있는 소재였고, 금단추가 달린 제복 코트는 허리와 상체의 폼을 줄여 적당히 라인이 들어가 있었다. 장검까지 차고 다닌다면 폼이 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나샤는 매일같이 제복을 입고 다녔다. 아직 두 벌밖에 없었기에 하얀 옷감에 혹시라도 때가 탈까 조심하며 말이다.

“거기 아샤 경! 어디 가십니까?”

“제복이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아샤 경.”

“…삼촌들, 또 놀리는 거지?”

그리고 기사들은 아나샤를 볼 때마다 ‘아샤 경’이라고 꼬박꼬박 호칭을 붙여서 불러댔다. 그럴 때마다 아나샤는 자신을 놀리는 거냐며 투덜댔지만 내심 속으로는 뿌듯해했다.

자신도 이젠 당당히 경의 호칭을 달게 됐으니 말이다!

“아샤 경, 심심하면 연무장에 놀러와!”

“알겠어!”

아나샤는 삼촌들을 향해 손을 한번 흔든 뒤 본관 정문으로 들어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기사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대견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주 행복해 보이네.”

제복을 받은 뒤로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아나샤였다. 기사들은 아나샤가 장기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쳐 공로를 인정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조그맣던 것이 이제는 황실에서 최초로 인정받은 첩자가 되었다. 이 성장이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진즉에 제복 좀 줬으면 얼마나 좋아.”

“그러니까 말이야.”

“요만할 때부터 제복 입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얼마나 좋겠어. 녀석…….”

“리온이 지금 모습을 보면 얼마나 뿌듯해할까.”

“뿌듯하기만 하겠냐. …울고도 남지.”

리온 얘기에 기사들은 아련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한동안 덩치에 맞지 않게 시큰한 코를 문지르던 그들은 훈련 시작을 알리는 소리에 연무장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 * *

아나샤는 단장실에서 그의 업무를 돕고 있었다. 임무를 맡을 수도 없어 한가한 데다, 마침 리히르트의 일도 많아 보이니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넓은 업무 책상 끝에 의자를 하나 더 놓고서 아나샤는 그가 처리한 서류를 분류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단장님, 이번 휴일에 시간 되세요?”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펜촉 아래 써 내려지던 글씨가 순간 옆으로 살짝 삐져나갔다. 리히르트는 종이에서 펜촉을 떼어내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일정은 없습니다.”

“아, 다행이다. 그럼요, 휴일에 점심 같이 먹어요.”

“점심 말입니까?”

“네. 저번에 제가 한턱 크게 쏜다고 했었잖아요. 기억나죠?”

리히르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단장님은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그러니 그대가 먹고 싶은 걸로 고르면 됩니다.”

“그러면 제가 사드리는 의미가 없잖아요. 저는 단장님이 좋아하는 음식 먹고 싶어요.”

음식 취향을 알려달라며 아나샤가 제법 강경하게 나오자 리히르트는 곤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딱히 취향이라고 여긴 음식이 없었던 탓이다. 그런 그의 고뇌의 흔적을 잽싸게 캐치한 아나샤는 그와 같이 고민에 빠졌다.

“음… 그럼 맛있게 먹었던 음식 같은 건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거라도 없어요?”

“기억에 남는 거라면, 예전에…….”

리히르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먹는 것은 먹는 것인데 요리는 아니니 이것을 말해도 될지 고민되었다. 그러나 제 대답을 기다리듯 반짝이는 그녀의 눈과 마주한 순간 고민을 깔끔하게 접을 수밖에 없었다.

“먹었던 사과가 기억에 남습니다.”

“…사과요?”

정말이지 예상외의 답변이 아닐 수 없었다.

“음. 사과라…….”

더더욱 그의 음식 취향을 알 수 없다는 듯 아나샤는 깊은 고민에 빠진 얼굴을 했다.

“사과로 만든 요리가… 없겠죠? 사과파이나 사과 케이크 같은 달달한 디저트는 안 좋아하실 것 같고, 그냥 사과는 따로 후식으로 먹어요.”

“알겠습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미안할 필요가 뭐 있어요!”

이렇게 마음씨가 고울 수가 없었다. 새삼스럽지만 오늘도 단장님의 인품에 감탄하며 아나샤는 다시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단장님이 사과를 좋아하셨다니, 정말 몰랐어요. 지금은 사과 철이 지나서 사과를 팔지 모르겠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에 사과 철일 때 많이 가져다 드리는 건데…….”

아나샤는 문득 스치듯 떠오른 기억에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에 그의 책상 위에 사과를 몰래 올려놓고 간 적이 있었다. 물론 들켰지만 말이다. 그때가 사과 철일 때라 사과가 무척 맛있어서 한번 드셔보시라고 가져갔던 기억이…….

“아.”

아나샤가 순간적으로 따가운 느낌에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종이 끝에 손가락이 베였는지 작게 핏방울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샤 경, 괜찮습니까?”

“별거 아니에요. 그냥 살짝 베인 것뿐이에요.”

“피가 나지 않습니까.”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든 리히르트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나샤는 어정쩡하게 그에게 손만 내민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비스듬히 내리깔린 벽안은 제 손끝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세심하다 못해 정성스럽게 느껴지는 손길로 손가락 끝에 손수건을 감아주었다. 어쩐지 내려다보는 얼굴엔 서운한 기색마저 어려있는 것 같았다.

“의무실에 가서 약을 바르는 게 좋겠습니다.”

“고작 종이에 베인 거라서 그렇게까진 안 해도…….”

“그럼 제가 가서 약을 가져오겠습니다.”

“아뇨! 그냥 제가 갔다 올게요!”

아나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그가 나가기 전에 먼저 선수 치듯이 단장실을 빠져나왔다.

“금방 다녀올게요!”

문을 닫은 아나샤는 바로 움직이지 않고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아나샤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손가락에 둘둘 감긴 손수건을 말이다. 상처 때문에 따끔거려야 될 텐데 이상하게도 간지러운 기분만 들었다.

‘에이, 그럴 리 없겠지.’

그가 살면서 먹어본 사과가 한두 개도 아닐 테고, 설령 그날 먹었던 사과가 기억에 남을 만큼 유독 맛있었다고 해도 그건 자신 때문이 아니라 사과 철이었기 때문일 테다.

아나샤는 빠르게 머릿속에서 사과에 관한 기억을 떨쳐냈다. 그러지 않는다면 간질거림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

손가락을 얕게 베였을 뿐이었지만 아나샤는 일을 쉬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류를 정리하는 일조차 하지 못하게 되자 하루 종일 소파에 앉아 빈둥대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물론 업무 도중에 종종 다과 시간을 가지는 단장님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평소라면 마냥 즐거웠을 다과 시간이었겠지만 아나샤는 현재 아무 말이 없었다.

아나샤는 포크로 애꿎은 케이크를 콕콕 찌르기를 반복했다. 크림 겉면에 구멍이 늘어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던 리히르트는 한참 뒤에 운을 뗐다.

“아샤 경.”

“네, 네?”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습니까?”

아나샤는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걱정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의 시선이 다정해서 아나샤는 슬그머니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어, 고민 있어 보였어요?”

“요즘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지 않습니까.”

그 말에 뜨끔한 아나샤는 포크를 내려놓고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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