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사랑에 빠질 때-45화 (45/87)

45화

* * *

아나샤는 느리지만 조금씩 재활운동을 시작했다. 배의 상처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방 안을 걷는 것이 다였지만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이제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가능해지자 아나샤는 대부분의 시간을 저택 후원에서 보내었다. 주로 루시와 같이 산책을 하거나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시간을 때웠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게 있다면 어떻게 안 것인지 시녀들이 돗자리와 쿠션, 차와 피크닉용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이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돼요! 물론 감사해요.”

“저희에게 일일이 감사 인사를 하실 필요 없으세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루시를 통해서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시녀 하나가 예의 바른 미소를 띠며 말했다. 시중을 드는 일을 하면 했지, 시중을 받는 일에는 어색한 아나샤는 고개만 끄덕이며 마주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편히 쉬세요.”

곧 시녀들이 물러나자 아나샤는 그제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이 저택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친절한 건지 모르겠어요. 단장님의 사람들이라 그런가… 다들 단장님 닮았나 봐요.”

“그럴 수밖에 없죠.”

익숙한 손길로 차를 따른 루시는 아나샤에게 찻잔을 건네주었다. 그러곤 쿠키를 오독오독 씹으며 이어 말했다.

“아샤가 미래에 공작 부인이 될 확률이 높으니까요.”

“쿨럭, …제가요?”

당연한 듯한 그 말에 아나샤는 되레 놀라 하마터면 사레에 들릴 뻔했다. 루시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결혼은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결혼…은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기사단 때문에요?”

“음. 그것도 그거지만 뭐랄까, 결혼은 귀족들에게 중요한 거지 저 같은 사람들에겐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후계를 낳아서 이어야 할 가문이 있는 것도 아니니, 아나샤에게 있어 결혼은 조금 먼 나라 사람의 얘기인 것이다.

“그보다 루시, 공작 부인 얘기는 농담인 거죠? 아까는 너무 놀라서 못 웃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좀 웃기네요.”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소리였어요.”

아나샤는 해괴한 소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진심으로 한 얘기일 줄은 상상도 못 한 얼굴이었다.

“단장님이랑 제가요? 에이, 루시. 제가 어떻게 공작 부인이 돼요. 애초에 공작 부인이라구요. 그런 자리엔 단장님처럼 반짝반짝하고 우아한 귀족 여성분이 어울리…….”

“무슨 소리예요, 아샤!”

옆에서 크게 들려온 목소리에 아나샤는 입을 다물어야했다.

“공작님이 들으시면 얼마나 서운하시겠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애인이 그런 말을…….”

순간 스치듯이 들린 이상한 단어에 아나샤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3초 정도 곱씹다가 황급히 루시를 돌아보았다.

“잠깐! 잠깐만요! 애인요? 저랑 단장님이요?”

“설마 제가 모를 거라 생각했어요?”

“루시, 절대 아니에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착각을 한 거예요.”

“아니라고요?”

루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강하게 고개를 내젓는 아나샤를 보니 정말 아닌 것도 같았다.

“하지만 애인이 아니라고 하기엔…….”

루시는 당연히 두 사람이 애인 사이일 거라 짐작해 왔었다.

달러스에서 홀로 아나샤를 찾으러 온 그를 봤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사내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단장님이 워낙 부하인 저한테 잘해주셔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어요.”

‘그럼 짝사랑이신 건가?’ 아샤는 모르는 것 같지만 일단 공작님 쪽은 확실하다고 루시는 생각했다. 애당초 저녁에 돌아오자마자 아나샤부터 만나러 오는데 사랑이 아닐 리가 없는 것이다.

“단장님은 정말 성격이 좋으시거든요. 처음엔 조금 무뚝뚝해 보일 순 있는데 알고 보면 진짜 상냥하시다니까요. 배려심도 얼마나 깊은지! 예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냐면…….”

‘짝사랑이 맞는 건가……?’ 루시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다시 생각에 빠져야만 했다. 이쪽도 만만치 않게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 * *

한 달이라는 시간은 무척이나 빠르게 흘러갔다.

아나샤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 실밥을 제거한 이후로 흉터만 남아있을 뿐 상처는 완전히 아물어 있었다. 왼손도 이제는 부목을 댈 필요가 없어 깁스를 푼 상태였다.

물론 임무를 하거나 무거운 걸 드는 건 힘들겠지만 아나샤는 이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다.

장기 임무를 나간 걸로 되어있다지만 너무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는다면 삼촌들의 의심을 살 게 뻔했다. 지금도 크리스 삼촌을 통해 듣기론 제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무슨 임무이기에 안 돌아오냐며 다들 걱정하고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더 이상 요양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전체적으로 몸 상태가 좋았다. 물론 천천히 재활 훈련을 시작해야겠지만 말이다.

“아샤, 들어가도 돼요?”

“네. 들어와요!”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맞춰 아나샤는 들추고 있던 상의를 잽싸게 아래로 내렸다. 루시는 리본이 묶인 상자를 들고서 그녀에게로 걸어왔다.

“뭐예요? 그건?”

“별건 아니고 아샤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원피스 한 벌 샀어요. 내일 가는 거죠? 내일 갈 때 이거 입고 가요.”

“루시…….”

“괜찮은지 한번 봐봐요.”

상자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서 루시는 곧바로 그 자리에서 리본을 풀어 상자를 열었다. 그러곤 밝은 노란색의 원피스를 꺼내 들어 아나샤의 몸에 대보았다. 허리 뒷부분에는 긴 끈이 달려있어 리본을 묶을 수 있는 귀여운 원피스였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지금 당장 입고 싶을 정도로요! 고마워요, 루시… 정말 감동이에요.”

“건강해진 기념으로 주는 선물이에요. 아샤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는데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에요.”

아나샤는 그대로 루시를 와락 끌어안았다. 언니처럼 매일 옆에서 챙겨주던 루시와도 이젠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아나샤는 살짝 울상을 지어 보였다.

“고마워요, 정말로요……. 그리고 종종 보러 올게요.”

“아샤도 참, 멀리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제 동생보다 더하다니까요.”

작게 웃음을 터뜨린 루시는 그대로 아나샤를 꼬옥 안아주었다.

“언제든 와요. 기다릴게요. 그리고 기사단에서 무리하지 말고, 밥 잘 챙겨 먹고요.”

루시는 공작가에서 계속 시녀로 일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높은 봉급에 숙식까지 제공해 주니 그녀에게 있어선 이보다 좋은 일자리도 없었다.

다음 날, 아나샤는 루시가 선물해 준 원피스를 입었다. 허리 뒤의 리본은 루시가 직접 매주었다. 아나샤는 거울 앞에 섰다. 무릎 위에서 둥글게 퍼지는 노란 빛깔의 치맛자락이 예뻐 괜히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기까지 했다.

날아갈 것처럼 좋아하는 아나샤의 모습에 루시도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생기가 가득한 모습이 진심으로 보기 좋다는 듯이 말이다.

열린 창문 밖으로 말들의 투레질 소리가 들려오자 루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택의 정문 앞에 마차가 준비된 게 보이자 루시는 곧바로 아나샤를 이끌었다.

“이제 내려가요, 아샤!”

방을 나서기 전 아나샤는 방 풍경을 한번 돌아보았다. 다시 기사단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뜨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그동안의 꿈같았던 호화로운 요양 생활도 이제 끝이구나 싶은 것이다.

* * *

“이게 누구야!! 아샤!”

“뭐야! 언제 온 거야? 이 녀석아!”

“아샤 돌아왔대요!!”

“아샤가 왔다고?! 어디?!!”

황실 제5기사단에선 작은 소란이 일었다. 다름 아닌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나타난 아나샤 때문이었다.

“말도 없이 임무 나가버리고! 우리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맞다, 맞아! 무슨 임무가 한 달씩이나 걸려. 그동안 얼굴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네!”

대부분 잔소리였지만 기사들의 얼굴에선 저마다 안도감과 반가움을 숨길 수 없었다.

아나샤는 이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너무 그리웠다는 듯이 숨죽여 웃었다. 그러곤 더 긴 잔소리가 쏟아져 나오기 전에 먼저 선수 칠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요, 다들.”

“아구, 이뻐 죽겠네. 녀석!”

“야야, 아샤 찌그러지겠다!”

“마브릭! 네 덩치를 생각하라고!”

난장판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유유히 빠져나온 아나샤는 다른 기사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엘빈을 비롯한 젊은 기사들과 그나마 얌전한 인사를 주고받고서 아나샤는 떠오르는 한 사람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기사단 본관 건물의 정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도 마음이 설레어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나샤는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계속해서 억눌러야 했다.

이윽고 도착한 문 앞에서 한번 심호흡을 하고서 아나샤는 문을 열었다.

“단장님, 저 복귀했습니다!”

기세 좋게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의 모습에 리히르트는 하던 업무를 멈추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샤 경.”

이미 아침에도 봤다지만 두 사람은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사람들처럼 미소를 띠었다. 리히르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먼저 응접용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차를 마시자는 것으로 알아들은 아나샤는 곧바로 그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 익숙한 소파의 감촉에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도 잠시, 아나샤는 테이블 위에 놓인 큰 상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열어보십시오.”

“정말 제가 열어봐요? 단장님 거 아니에요?”

“아샤 경 앞으로 온 것입니다.”

리히르트는 고개까지 한 번 끄덕여 보였으나, 아나샤는 좀처럼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귀족인 단장님 앞으로 온 거면 몰라도 자신의 앞으로 온 것치곤 과할 정도로 질이 좋은 상자였다.

광택이 흐르는 고급 상자의 뚜껑에 조심스레 손을 가져간 아나샤는 꿀꺽 침을 삼켰다. 상자 뚜껑을 들어 올리자 안에는 믿기 힘든 물건이 들어있었다.

황실 소속 기사만이 입을 수 있는 금수가 놓인 새하얀 제복이 반듯하게 개여있었다. 아나샤가 눈을 크게 뜬 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양 리히르트를 쳐다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제복 밑에 문서가 하나 있을 겁니다.”

“…어, 어… 네, 있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