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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44화 (44/87)

44화

“단장님은 사람이 좋으시니까 그걸로 된다고 쳐도 저는 아니에요.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어떻게 입 싹 닦고 넘어가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후, 역시 안 되겠어요. 양심이 콕콕 쑤셔서 편히 못 쉬겠어요.”

“…한 번은 받는 걸로 하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그가 말했다. 아나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무른 단장님이었다. 확답에 이제야 만족스럽다는 양 아나샤는 홱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엄청 맛있게 잘하는 곳으로 데려갈 테니까.”

“기대하겠습니다.”

웃음기가 담긴 낮은 목소리가 허밍처럼 잔잔했다. 그는 조용히 손을 움직였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 아나샤의 자세에 맞게 베개를 고쳐주며 그녀가 편히 벨 수 있게 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물론 편해요. 고마워요.”

아나샤는 그와 마주하고 있던 눈동자를 슬그머니 천장을 향해 굴렸다. 단장님과 계속 눈을 마주한다면 아마 심장이 조금 떨릴 것 같았다.

아나샤는 이것이 특별한 감정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보기 드문 아름다운 외모에다 모든 말과 행동이 다정하신 단장님이었다. 거기다 이런 세심한 배려가 몸에 배어있어 괜스레 사람을 설레게 만들었다.

한동안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간질간질한 기분에 입술을 오물거리던 아나샤는 뒤늦게 한숨을 내쉬었다.

“단장님은 뭐랄까…, 너무 친절하세요. 저야 단장님이 원래 이렇게 천성이 좋으신 분인 걸 아니까 그러려니 해도요.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 안 할 수도 있다구요.”

“…….”

“좋은 행동인 건 알지만요. 너무 좋아서 탈이라고 해야 될까, 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

“아샤 경.”

횡설수설하던 아나샤는 그의 나직한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좋아합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흐트러짐 없는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듣는 아나샤조차 순간 그가 정말 대수롭지 않은 얘기를 하는 것이라 여길 정도였다.

“어…, 네?”

아나샤는 뻐끔뻐끔 입을 벌렸다. 당혹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만 크게 뜨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던 리히르트는 다시금 잔잔히 제 말을 이었다.

“깊은 뜻은 없습니다. 그저 이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나샤는 눈을 느리게 두 번 깜빡였다. 순간 남녀 간에 할 법한 사랑 고백이 아닌가 싶었지만 담담해 보이는 단장님의 모습을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나샤는 빠르게 당혹감을 떨쳐내었다. 언제 크게 놀랐냐는 양 입가에 방긋 미소까지 띠었다.

“저도 단장님이 좋아요. 애초에 단장님처럼 좋으신 분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좋다고 할걸요?”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렇게 말했으나 아나샤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론 깊게 안도하고 있었다. 쿵쾅거리던 심장은 겨우 진정되어 있었다.

* * *

일주일 넘게 묽은 유동식만 먹던 아나샤는 이제는 가볍게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 상태가 호전되었다.

매일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하루 세끼 건강식을 챙겨 먹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아나샤는 이제껏 자신이 끼니마다 먹은 유동식에 그녀의 한 달 치 봉급과 맞먹는 값비싼 식재료가 들어갔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아나샤의 몸 상태가 어느 정도 호전되자 리히르트는 기사단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모든 업무를 자택에서 처리하는 식으로 출근을 미뤄왔지만 그 방식에도 한계가 있던 것이다.

그가 기사단에 가있는 동안에는 아나샤는 따분하게 창밖을 구경하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생활을 한 지 사흘째였다. 찾아온 깜짝 방문객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루시였다.

“세상에, 루시! 정말 루시예요?”

긴 금발 머리를 가지런히 묶은 채 차분한 녹색 원피스를 입은 루시는 전보다 훨씬 생기 있고 건강해진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날 것처럼 반가워하는 아나샤와는 달리 루시는 그녀를 보자마자 깊게 안도부터 했다.

“걱정했어요, 아샤. 정말로.”

루시는 의자에 앉자마자 아나샤의 손을 붙잡은 채로 눈시울을 붉혔다.

“몸은 괜찮은 거죠? 그날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걱정 많이 했어요. 혹시라도 못 깨어났을까 봐 그동안 얼마나 불안했는지…….”

“그날은 미안해요. 제가 지켜드린다고 했는데 그렇게 쓰러져 버리기나 하고…….”

“아니에요, 사과는 제가 해야죠! 저 때문에 다친 거잖아요. 아샤에겐 얼마나 큰 빚을 진 건지 모르겠어요.”

“빚이라뇨. 제가 멋대로 끼어들어서 다친 것뿐이에요. 루시가 책임을 느낄 필요 없어요.”

“…하지만 절 대신해서 다친 거잖아요.”

울먹임이 담긴 목소리에 아나샤는 난처한 미소를 띠었다. 루시가 본인의 탓이라 여기고 슬퍼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틀려요, 루시. 사실 원래 제가 막았어야 하는 일인데… 제가 못 막아서 하마터면 루시가 다칠 뻔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제 책임인 거죠. 애초에 처음부터 약속했잖아요. 한 명도 다치지 않게 지켜드리겠다고요.”

좀 더 씩씩해 보이려는 듯 아나샤는 부러 허리를 세운 채 당당하게 말했다. 물론 얼마 못 가 배가 욱신거려 다시 편하게 기대야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요. 흠, 사실은요. 부끄럽지만… 어릴 적에 로망 같은 게 있었어요.”

루시가 의문을 띤 얼굴로 바라보자 아나샤는 뺨을 긁적였다.

“그, 위기에 빠진 사람을 몸을 던져 구하는 상상 같은 거요. 많이 했었거든요. 소설 속에 나오는 영웅 같고, 얼마나 멋져 보일까 하고…….”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아나샤는 발갛게 볼을 물들였다. 쑥스러워 보이는 그 모습에 루시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웃긴 거 알아요. 루시.”

“흠흠, 아니에요. 웃긴 건 아니고 뭔가 귀여워서.”

“웃어도 돼요. 어차피 어릴 때의 로망이었는걸요. 어릴 때는 누구나 그런 멋진 상상 같은 거 하잖아요.”

“아샤도 충분히 소설 속 영웅처럼 멋있어요. 거기다 귀엽기까지 하구요.”

“…놀리지 마세요, 루시.”

토라진 것 같은 말투에 루시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그보다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

“음? 아샤가 먼저 저를 찾은 게 아니었어요?”

루시의 말에 아나샤는 무슨 말이냐는 듯 휘둥그레 눈을 떴다. 이에 루시는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을 얘기해 주었다.

“아샤를 만나고 싶은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몰라서 소식을 기다리고만 있었는데, 이곳 공작 가문의 집사님이 먼저 저를 찾아오셨어요. 아샤 얘기를 듣고 바로 수도로 온 거예요.”

아나샤는 문득 예전에 단장님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루시와 감옥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전부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고, 혹시 연락할 수 있다면 자신은 괜찮다고 얘길 전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 정확히 일주일 전이었다.

잊지 않고 정말 루시와 만날 수 있게 해준 단장님의 배려에 아나샤는 작은 감동을 느꼈다. 애꿎은 입술만 꾹꾹 깨물다가 아나샤는 입을 열었다.

“맞다, 이걸 가장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다들 무사히 잘 지내는 거죠?”

“감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친 곳 없이 무사해요.”

루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 그 전투가 있고 나서 다들 며칠간은 많이 불안해했었어요. 당장 머물 곳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서 하루하루가 불안했죠. 근데 기사단에서 많이 도와주셔서 덕분에 빠르게 기운 차릴 수 있었어요.”

지금은 다들 고향으로 돌아갔거나, 다른 영지에 정착해 있을 거라며 루시는 덧붙여서 얘기해 주었다.

“동생에게 아샤를 보러 간다고 얘기했더니 자기도 가겠다는 거 있죠? 말리느라 힘들었어요. 아무래도 아픈 사람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일단 저 혼자만 왔고요.”

루시는 웃음을 삼키고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좋은 소식을 말하자면요. 다 나을 때까지 여기서 지낸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저도 여기서 같이 머무르려고요.”

“정말요?”

“네. 집사님이랑 얘길 나눴는데 제가 원하면 여기서 시녀로 일해도 된다고 하셔서요.”

아나샤는 거의 기쁨의 비명을 지르기 직전이었다. 그녀의 모습에 루시도 더욱 짙은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마치 동생을 위한 깜짝 선물을 준비한 언니 같은 모습이었다.

“아샤도 자주 볼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고 좋은 기회인 것 같아서 그러겠다고 했어요. 물론 동생에게는 이미 허락을 받았고요.”

“정말 잘됐어요, 루시! 그럼 하루 종일 저랑 있어줘요. 네? 저 진짜 심심했거든요.”

“물론이에요. 벌써부터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뭐부터 말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 * *

이른 아침, 리히르트는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을 위해 저택을 나섰다. 마차에 오르기 전 그는 습관처럼 저택의 한곳을 응시했다.

“단장님!”

동시에 기다렸다는 양 밝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히르트는 창가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는 아나샤와 눈을 마주쳤다. 먼 거리였지만 그녀의 얼굴은 어쩐지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의 표정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와는 달리 아나샤는 하품까지 하며 느긋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오늘도 일찍 나가시네요!”

너무 먼 거리라 아나샤는 거의 외치다시피 말해야 했다. 직접 내려가서 배웅해 주고 싶어도 내려가기가 힘드니 매일 이렇게 창문 앞에서 배웅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무리하진 마시고요! 아침 안 드셨죠? 점심은 거르지 말고 꼭 드세요! 그리고 잘 다녀오세요!”

“다녀오겠습니다.”

리히르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이윽고 그가 탄 마차가 저택을 떠나가자 아나샤도 침대로 돌아왔다. 다시 단잠에 빠져들기까지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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