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사랑에 빠질 때-43화 (43/87)

43화

* * *

아나샤가 웨일그레슬 공작저에 머무른 지도 사흘이 지났다.

“다 나으면 일단 카드점을 다시 보러 갈 거예요. 원래 잘 맞는 곳으로 유명하긴 했는데 진짜 너무 소름 돋게 맞았잖아요.”

“달리 하고 싶은 일은 없습니까?”

“음…, 아! 그리고 수도의 유명한 음식점들을 다 가볼 거예요. 유명하다고 얘기만 듣고 가보지 못한 곳이 많았거든요. 맛있는 걸 먹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잖아요.”

“그리고 먹는 것만큼 기력 회복에 좋은 것도 없을 겁니다.”

“역시 단장님. 뭘 좀 아시네요!”

쉬지 않고 조잘대던 아나샤는 제게 물을 따라 건네주는 리히르트의 행동에 겨우 입을 다물었다. 갈증이 나는 목을 축이는 동안 아나샤는 문득 든 생각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보다 단장님, 기사단에는 안 가봐도 돼요……?”

물을 꿀꺽 삼키기 무섭게 아나샤는 물었다. 이제까지 너무 익숙하게 옆에 있어서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이번 주는 휴가를 냈습니다.”

“어쩐지, 너무 평온해 보이신다 했어요. 그럼 일주일 동안은 계속 저택에서 쉬시는 거예요?”

“네. 그럴 생각입니다.”

“정말요? 그럼 계속 저랑 같이 놀아요. 단장님 없으면 저 진짜 심심해서 죽을지도 몰라요.”

제발 제 옆에 있어달라는 양 눈을 빛내며 아나샤는 말했다. 침대에 가만히 있으면 세상 편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고역이었다. 단장님이 없었다면 정말 몰래 탈출이라도 했을 테다.

“물론 같이 있겠습니다.”

“와, 감사해요!”

리히르트는 아나샤에게서 빈 잔을 받아 들고 다시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시녀를 붙여도 될 일이건만 그는 수발들기를 자청하는 중이었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 곁에서 보내었다. 침대 옆에 놓인 의자는 거의 고정석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간호를 하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감시의 목적도 있었다.

그녀의 성격상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몰래 돌아다닐 가능성이 높았다. 본인의 부상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리히르트는 그녀에게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무거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나샤는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내일 크리스 벨덴 경이 병문안을 올 겁니다.”

“삼촌만요?”

크리스 삼촌만 올 리가 없다는 확신이 담긴 물음이었다. 분명 다른 삼촌들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붙어 우르르 몰려올 것이 뻔했다.

벌써부터 쏟아질 잔소리들을 생각하며 끙 앓는 소리를 낼 때, 옆에서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다른 기사들에게는 아샤 경의 부상에 대해 알리지 않았습니다. 장기 임무로 인해 타 지역에 나가있는 것으로 처리해 두었습니다.”

“역시 단장님!”

아나샤는 그의 깊은 배려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삼촌들에게 달러스에 간 것에 대해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막막했는데 한시름 놓은 기분이었다. 물론 크리스 삼촌이 남아있긴 했지만, 크리스 삼촌쯤이야 싶었다.

“정말 고마워요, 단장님. 다 나으면 진짜 크게 한턱 쏠게요! 먹고 싶은 게 있으시면 말만 하세요!”

눈빛을 반짝이며 감사함을 표현하는 그녀의 모습에 리히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이었다.

* * *

다음 날 아나샤는 붕대를 새로 갈고 환복을 한 후 크리스를 만났다.

“너, 진짜…….”

방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크리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부터 쉬었다. 호화로운 객실의 풍경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양 크리스는 침대에 어색하게 웃으며 앉아있는 아나샤를 응시했다.

못 본 새 얼마나 야윈 건지 얼굴은 반쪽이 되어있었다. 낯빛은 또 얼마나 창백한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보였다. 평소의 아나샤답지 않게 병약한 모습에 크리스는 마음이 다 울컥했다.

“왜 그렇게 인상을 찌푸려, 삼촌. 그러다 얼굴에 주름진다?”

“…녀석아. 너는 이 상황에 농담이 나와? 나는 네가 죽는 줄 알고!”

방 안을 울리는 크리스의 호통에 아나샤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 삼촌이 화를 내다니. 고작해야 잔소리 한 시간 정도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당황해 있는데 이보다 더 당황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하필이면 왜 거기야. 왜……. 나는 정말 두 명 다 잃는 줄 알고.”

크리스가 고개를 돌리더니 팔등으로 눈을 벅벅 닦기 시작한 것이다. 아나샤는 아까보다 더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은지 한참 동안 서서 눈물만 훔치던 크리스는 뒤늦게 아나샤의 곁으로 가 앉았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던 탓인지 두 사람 사이엔 민망한 침묵이 흘렀다. 크리스는 큼큼하고 목을 가다듬었고, 아나샤는 괜히 눈동자만 굴렸다.

“어, 음, 삼촌 내가 미안.”

“…미안한 줄 알면 어서 낫기나 해.”

“근데 진짜 삼촌이 울 줄은 몰랐어.”

“내가 언제 울었다고!”

괜히 아닌 척 목소리를 높이는 크리스의 모습에 아나샤는 작게 킥킥거렸다. 웃음소리에 조금은 둘 사이의 민망함이 풀리자 아나샤는 평소처럼 재잘대기 시작했다.

“나 다른 곳에 임무하러 간 걸로 됐다며? 단장님한테 들었어. 다른 삼촌들은 의심 안 해?”

“의심은커녕, 네가 달러스에 갔을 거라곤 아예 생각도 안 하던 눈치던데.”

“하긴 그렇겠지?”

“당연히 그러지. 우리 기사단에서 거기에 가고 싶은 기사가 어디 있겠냐. 동료를 잃었는데.”

크리스는 착잡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러곤 아나샤의 표정을 살폈다.

“그보다 너 이런 얘기 해도 괜찮겠어……?”

“응. 이제 괜찮아.”

“너 괜히 괜찮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언제까지 그럴 순 없잖아. 리온 얘기가 나오면 화내는 것도, 피하는 것도 싫어. 그냥 마음 편하게 리온 얘기가 하고 싶어. 이제는 진짜 마음이 편해졌기도 했고.”

아마 단장님에게 털어놨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아나샤는 배시시 웃으며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리온 얘기 하자. 삼촌.”

그 말을 시작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레 리온에 대한 얘기로 흘러갔다. 그동안 금기시됐던 주제였던 만큼 쌓였던 얘기 또한 많았다.

대부분 아나샤의 어린 시절 얘기가 흘러나왔고, 간혹 아나샤는 모르는 리온의 얘기도 흘러나왔다.

크리스는 기사 견습생 시절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리온과 처음 친해진 이야기, 처음으로 싸웠던 이야기, 화해한 날 기사단 뒤뜰에 누워 밤새도록 대화를 나눴던 이야기. 아나샤는 그 따스한 추억들에 마음이 포근해짐을 느꼈다.

“너 묘지에 안 간 지 오래됐지?”

“응.”

“몸 다 나으면 같이 가자.”

“당연히 좋지!”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날 것처럼 신나서 외치는 아나샤의 모습에 크리스는 피식 웃었다. 지금 상황이 낯설면서도 무척 반가웠다. 늘 이렇게 되기를 바라왔던 걸지도 모른다고 여기며 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쉬어. 난 갈 테니까.”

“벌써 가게?”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났다, 녀석아. 종종 찾아올 테니까 심심해도 좀 참아.”

그렇게 말하며 크리스는 아나샤의 머리를 한번 지그시 누르듯 문질렀다. 아나샤가 애 취급하지 말라며 눈을 부릅 치켜뜬 순간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지만… 너 단장님께 잘해드려라.”

“갑자기 단장님은 왜?”

아나샤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가 뒤늦게 이해했다. 하긴 단장님이 편의를 봐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치료를 받고 편히 요양을 할 수도 없었을 테다. 한턱 크게 쏘는 걸로는 모자랄 지경이었다.

“삼촌이 말 안 해도 나 단장님께 잘하거든? 내가 언제 우리 단장님 실망시킨 적 있어? 오히려 기사단에서 가장 총애받는 부하가 난데!”

“그래그래. 네가 어련히 잘하겠지.”

콧방귀까지 뀌어대는 자부심 어린 얼굴에 크리스는 질린다는 양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나갈 것처럼 문을 연 그는 고개를 돌려 아나샤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너무 좋아하진 말고.”

“뭐래.”

“녀석아 알았어, 몰랐어? 적당히 좋아하라고. 내가 안보는 것 같아도 다 지켜보고 있어.”

엄한 충고처럼 몇 번이나 말을 반복하고서야 크리스는 방을 나갔다. 아나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잠시 문을 쳐다보다가 단장님은 언제 오실까 생각하며 빈둥거렸다.

* * *

아나샤는 낮은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창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샤 경.”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아나샤는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 옆을 보았다. 의자에 앉아서 독서를 하고 있었던 건지 그는 책을 내려놓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몇 시예요?”

“다섯 시입니다.”

창밖이 흐려 순간적으로 새벽인가 싶었지만 그가 있는 것을 보니 오후인 모양이었다.

점심을 먹고 그와 한참 동안 떠든 것까진 기억이 났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잠깐 졸려 헤드보드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잠든 자신을 편하게 눕혀주고 이불을 덮어준 사람이 누군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마워요.”

아나샤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말했다. 완전히 잠에서 깨기 위해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하던 그녀는 뒤늦게 말을 이었다.

“다 나으면 진짜로 크게 열 번 쏠게요.”

그 말을 예상했다는 듯 리히르트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동안 열 번도 넘게 들은 말이었고, 그때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던 리히르트였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그대에게 무언가를 원해서 베푼 게 아니듯이 그대도 저에게 무언가로 갚으려 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요. 사람이 받았으면 돌려줄 줄도 알아야 하는 거잖아요. 물론… 제가 엄청난 무언가를 해드릴 순 없겠지만요. 조금이라도 뭘 해드리고 싶어요.”

식사라도 한턱 크게 쏘게 해달라며 아나샤가 재차 말했으나 그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차분하게 제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대가 건강해진 걸로 대신 받겠습니다.”

“그게 뭐예요.”

아나샤는 작게 툴툴댔다. 예전의 단장님은 정 없는 무뚝뚝한 사람 같았는데, 이제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무한으로 정을 퍼주고 있었다. 너무 일방적으로 듬뿍 퍼줘서 문제일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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