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갈증이 나진 않습니까?”
“조금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침대 옆으로 다가온 그가 몸을 숙였다. 조심스레 어깨 밑으로 들어온 손이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주었다. 그는 등 뒤에 푹신한 베개를 받쳐주고는 직접 물을 따라서 건네주었다.
이에 아나샤는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단장님이신데, 아니 그 전에 공작님이신데 본의 아니게 부려먹게 됐으니 말이다.
“감사해요……. 저 근데 얼마나 잠든 거예요?”
“이틀 정도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틀씩이나요? 엄청 오래 잤네요.”
정확히 따지자면 사흘에 가까웠지만 리히르트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저 잔을 쥔 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며 기다렸다.
“그… 죄송해요. 단장님한테는 한마디도 안 하고 멋대로 임무 받아서요.”
“…….”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삼촌들의 귀에 들어가면 절대 못 가게 말렸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단장님에게까지 비밀로 한 것은 실수였다.
이렇게 다쳐서 온 것도 모자라, 심지어 단장님의 저택에서 신세를 지게 될 줄은 알았을까.
단장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수도에 있는 줄 알았던 부하가 뜬금없이 달러스에서 중상을 입고 수도에 실려온 것일 텐데 얼마나 놀라고 어이가 없었을까 싶었다.
“저…, 혹시 화나셨어요?”
아나샤는 말이 없는 그를 힐끔힐끔 올려다보며 살폈다. 이에 리히르트는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화나진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리히르트는 며칠째 물도 대지 않아 퍼석한 입술을 잠시 다물었다가 뗐다.
“그저 걱정했습니다. 아샤 경.”
“…….”
“몇 시간이 지나도, 하루가 지나도, 눈을 뜨지 않아서 많이 걱정했습니다.”
아나샤는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얼굴은 더 혈색이 없이 파리했다. 며칠째 밤을 새운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나 있었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그보다 단장님 또 밤새운 거 아니죠?”
“일이 조금 많아서 말입니다.”
“저 말고 단장님이 누워서 쉬셔야 될 것 같은데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말이었지만 그는 아예 농담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나샤는 잠시 걱정스레 그의 낯빛을 살피다가 뒤늦게 떠오른 말을 꺼냈다.
“그보다 작전은 어떻게 됐어요? 저랑 같이 있던 여자분들은 모두 무사한 거죠? 혹시 들은 거 있어요?”
“아샤 경 덕분에 다들 무사히 구출됐습니다.”
“휴… 다행이네요.”
아나샤는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검에 찔린 후 정신을 잃은 것은 확실히 큰 실수였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루시를 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이번 잠입 임무요. 예전에 제 아버지가 맡았던 임무였어요. 물론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은 없지만요. 왠지 리온은 리온이지 아버지라고 부르기엔 좀 낯간지럽다고 해야 되나. 암튼.”
오른손으로 잔을 만지작거리며 아나샤는 리온에 대해 짧게나마 얘기하기 시작했다. 리온이 달러스 영주성의 잠입 임무를 맡았고 임무 중에 사망했다는 얘기였다.
“처음엔 리온이 죽었단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나중에 상황을 알게 되니까 납득이 가더라고요. 끝까지 성에 남아서 인질들을 지키려 했대요. 정말 멋지죠?”
작게 미소를 띠며 아나샤는 리히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용히 제 얘기를 경청해 주고 있었다.
“이번 임무를 제가 맡고 싶다고 황녀님께 부탁한 건 뭐, 복수심 같은 것도 있었지만 리온이 해낸 일을 저도 똑같이 해내고 싶어서였어요.”
“…….”
“사실 달러스에서 돌아오면 같이 임무 나가기로 약속했었거든요.”
“힘들진 않습니까?”
한동안 조용히 듣고만 있던 그가 물었다. 그것이 무엇을 묻는 건지 아나샤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말이지 사려 깊은 단장님이 아닐 수 없었다.
“예전에는 리온 얘기만 꺼내도 엄청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그리고 어찌 됐든 달러스 임무는 리온이랑 둘이 같이 완수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이렇게라도 이뤘으니까 이젠 슬픈 얘기는 아닌 거죠.”
아나샤는 후련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그녀를 응시하던 리히르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운을 뗐다.
“아샤 경의 어린 시절 얘기를 조금이나마 들었습니다.”
“정말요?”
“네. 크리스 벨덴 경이 얘기해 줬습니다.”
“삼촌도 참, 말이 많아서 탈이라니까요. 분명 이상한 얘기만 했죠?”
아나샤가 툴툴대는 것을 묵묵히 들어주던 리히르트는 한참 뒤에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 아버지도 제가 어릴 적 전투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낮고도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나샤는 그가 어린 시절 얘기를 해주는 것이 신기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거의 십 년도 더 된 일이라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그 당시 며칠간은 식사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는 잠시 생각하듯이 입술을 다물었다. 깊어진 푸른색 눈동자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흐릿해진 어릴 적 기억처럼 슬픈 감정도 충분히 무뎌졌다고 여겼습니다.”
“…….”
“하지만 유품인 브로치를 잃어버렸던 날,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래서인지 왠지 마음을 다독여 주듯 다정하게 느껴졌다. 아나샤는 그의 눈동자에 담긴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아샤 경이 찾아주지 않았다면 분명 힘들었을 겁니다.”
살짝 입술을 끌어 올린 건지, 아니면 입술을 구긴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나샤는 그런 제 표정이 우스꽝스럽다고 여기면서도 도저히 표정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아샤 경이 괜찮다고 해도 사실은 괜찮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
“제 말이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아샤 경이 더는 혼자 숨어서 슬퍼하지 않았으면 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괜찮은 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자신은 정말로 괜찮았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말에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자신은 정말 괜찮은 걸까? 하고.
“모르겠어요. …리온이 죽고 나서 분명 많이 힘들었는데 어느새 다시 평소처럼 지낼 수 있게 됐거든요. 지금도 괜찮고요.”
아나샤는 눈을 내리깔고 잔을 만지작거렸다.
“이번 임무도 그랬어요. 사실 이번 임무를 완수하면, 분명 마음이 후련할 거라 생각했어요. 정말 이걸로 된 거라고 여기려고 했어요.”
사실은 마음이 복잡했다. 조금도 후련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꽉 막힌 듯이 답답해 아나샤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더는, 리온을 떠올리면서 슬퍼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좋은 기억만 떠올리고 싶었어요. 나쁜 기억 때문에 리온을 떠올리는 게 힘든 게 싫었어요. 그랬는데…….”
달러스의 악몽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꿈에서조차 리온은 싸늘하게 죽어있었다. 달러스로 뒤늦게 지원을 간 날에도, 리온을 대신해 임무를 완수한 오늘날에도 자신은 이미 늦은 후였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첩자가 되고 싶었던 것도 리온 때문이었다. 리온이 곁에 없는데 자신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쭉… 같이 있고 싶었는데…….”
자신도 그날 달러스로 함께 떠났다면 좋았을 텐데. 아나샤는 열기가 몰린 눈을 감았다. 어느새 고여있던 뜨거운 눈물이 이불 위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꾹 깨문 입술 새로 작은 흐느낌이 터져 나오려 할 때였다. 아나샤는 자신의 팔을 살며시 붙잡는 손길을 느꼈다. 힘을 주지 않고 부드럽게 앞으로 끌어당기는 손에 살짝 고개를 드니 어깨 뒤를 감싸 안아주는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
아나샤는 울음을 삼키고 눈을 떴다. 눈물이 맺혀 시야가 흐릿한 와중에 새하얀 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마치 햇살에 비친 리온의 머리카락과 닮아있었다.
혹여라도 상처에 무리가 갈까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조심스레 자신을 안아주었다. 온기가 느껴지는 그 든든한 품에 아나샤는 눈을 감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창밖에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도 리히르트는 아나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잔잔히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끝날 줄을 몰랐다.
“제가 떨어질까 봐 삼촌들이 놀라서 소리 지르던 게 아직도 기억나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저 어릴 적에 엄청 사고뭉치였나 봐요.”
아나샤는 작게 키득거리며 이불을 끌어 올렸다. 슬슬 노곤한 기분이 드는 게 잠이 올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나샤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아 눈만 깜빡이는 동안 리히르트는 기민하게 그녀의 몸 상태를 읽어내었다.
“졸리면 자도 됩니다.”
“괜찮아요. 막 엄청 졸리진 않거든요.”
“얼굴은 졸려 보입니다.”
“이틀씩이나 자서 그런지 정신은 말똥말똥해요. 그보다 단장님은 안 주무셔도 돼요? 피곤해 보이는데 어서 가서 주무세요.”
“괜찮습니다. 더 얘길 나누고 싶습니다.”
서로 괜찮다며 자는 것을 미루던 두 사람은 결국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보였다. 아나샤는 배시시 웃다가 이불 속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더 나눌 얘기도 없을 텐데 이상하게 그와 얘기가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아마 단장님도 같은 마음인 것 같았다.
“그래서요. 어떻게 됐냐면요…….”
떠오르는 아무 얘기나 조잘대던 아나샤는 옆이 너무 조용하자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길게 내려앉은 옅은 속눈썹과 조용히 다물린 입술이 조는 사람답지 않게 아름다웠다.
오히려 잠이 든 자세마저 흐트러짐이 없어 아나샤는 조금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아나샤는 잠시 소리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부드러운 불빛이 비친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아나샤는 바로 그를 깨우지 않았다. 아니 깨우지 못했다는 게 맞는 말일 테다. 오랜만에 안심하고 깊게 잠이 든 듯한 얼굴에 차마 깨우기가 미안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