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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41화 (41/87)

41화

헐떡임이 가라앉지 않은 채로 리히르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부디 그녀가 이곳에 있기를 바라면서 어두운 나무 사이를 누빌 때였다.

“여기예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여성의 외침에 리히르트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돌렸다. 우거진 수풀 뒤로 한 여인이 나타나고 얼마 안 가 막지 못한 훌쩍임이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리히르트는 그곳으로 움직였다. 이윽고 다다른 수풀 뒤편에는 그토록 찾던 아나샤 그녀가 있었다.

터질 것처럼 가쁘게 뛰던 심장이 순식간에 조용히 멎은 듯했다. 삼키지 못해 튀어나오던 거친 숨소리가 단번에 사그라들었다.

“절 지키려다가… 대신 찔려서…….”

눈물을 훔치는 여인들 사이에 누워있는 그녀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미동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눈을 떠 ‘단장님!’ 하고 외칠 것처럼 익숙한 얼굴이었으나, 평소와는 달랐다.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 낯설었다. 리히르트는 선뜻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크나큰 공포를 마주한 사람처럼 손끝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뒤늦게 리히르트는 그녀에게 다가가 몸을 낮췄다.

“아…샤 경.”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쳐 안았다. 몸은 차게 식어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상체는 어둠 속에서도 온통 붉은색으로 젖어 있어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피를 흘린 것인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전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무도회 날 밤의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자신이 늦지 않기만을 바랐으나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자신이 너무 늦었다.

7장 그녀가 사랑에 빠질 때

아나샤는 눈을 떴다. 야외인지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느껴졌다. 하지만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햇볕을 비스듬히 막아주는 커다란 손이 자신의 눈 위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나샤는 펼쳐진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연한 금색 머리카락을 눈에 담았다. 누군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것 같은, 그런 몽롱한 기분으로 손가락 틈새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왜? 잠이 안 와?”

생소하면서도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에 뭉클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퍼져나갔다. 리온의 무릎은 기억 속 그대로 따뜻하고 포근했다.

아나샤는 손을 뻗어 리온의 손을 붙잡았다. 역시나 따스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손이 너무 작다는 걸 알아차렸다.

“리온, 있잖아. 나 첩자 할 수 있을까?”

자신은 말을 하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릴 적 자신의 앳된 목소리였다.

“매일 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어?”

“그냥… 내가 리온만큼 잘할 수 있을까 싶어서. 리온은 너무 치사해. 싸움도 잘하고, 높은 곳도 쉽게 올라가고, 기척도 금방 지울 수 있고, 힘든 임무도 척척 해내고 말이야.”

‘어릴 적 기억이 꿈으로 나타난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이 상황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아나샤는 자신의 툴툴대는 목소리를 들으며 리온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제복을 안 주는지 모르겠어. 리온도 기사단 소속인데.”

웃음을 터뜨리는 리온은 새하얗게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쨍한 햇살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검은 첩자복 말고 새하얀 제복 입으면 엄청 잘 어울릴 것 같단 말이야. 리온이 입으면 진짜 멋질 텐데. 머리도 금발이라 어디 나라 왕 같을 거야.”

“고맙네요, 공주님.”

맑은 웃음소리가 너른 들판 위를 울렸다. 포근한 기분에 아나샤는 눈을 감았다. 솔솔 잠이 올 것처럼 전신이 나른했다.

“졸려?”

“…응. 있지, 리온.”

아나샤는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 어린 모습이었을 텐데 이제는 다시 본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꿈속이라 그런지 전부 뒤죽박죽이었다.

“어릴 적 일 완전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주 조금은 기억나. 리온이 나를 지켜줬던 거, 나를 안아줬던 것도.”

“…….”

“그래서 고마웠다고 꼭 말해주고 싶었어.”

이제야 말해서 미안하다고, 아나샤는 속으로 꾹 말을 삼켰다. 그리고 한참 후에 다시 입술을 뗐다.

“나는 있지. 어릴 때부터 항상 리온처럼 되고 싶었어. 정말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

“응. 그렇구나.”

머리를 만져주는 손길은 다정했다. 아나샤는 이 시간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이 꿈에서 깨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어릴 적 일 말인데 한 가지 바로잡아 줄 게 있어. 그날 내가 널 지켜준 게 아니야. 아샤, 네가 날 지켜준 거지.”

기억 속 목소리 그대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어릴 때도 얼마나 용감하고 씩씩했는지 몰라. 한 번 울지도 않고, 떼는 좀 많이 썼지만.”

“참 나! 어린애가 떼 좀 쓸 수 있지.”

아나샤가 대번에 바로 툴툴거리자 낮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나샤는 그를 따라서 입술을 끌어 올렸다. 곧 웃음소리가 멈추고 리온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널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아샤.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전부 널 만나서 알게 된 것들이니까.”

그 말에 아나샤는 가슴을 꽉 채우는 뭉클함을 느꼈다. 리온은 계속해서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코가 시큰거렸다.

“너도 나처럼, 너 자신을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해 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

“리온이 그래주면 되잖아. 계속…, 있어주면 되잖아.”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아나샤는 투정을 부렸다. 계속 곁에 있어달라고 말했지만 리온은 아무 말이 없었다. 동시에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을 쓰다듬어 주고 있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리온……?”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아나샤는 그제야 눈을 떴다.

어느새 자신은 어딘가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주위에서는 병장기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와 누군가의 외침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리온!”

아나샤는 뛰었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기사들은 저마다 부상자를 부축하고 있었다.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아나샤는 리온을 불렀다.

알 수 없는 기시감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달려야할 것 같은 조급한 기분에 아나샤는 이유도 모른 채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리온! 어디 있어, 리온!”

얼마나 뛰었을까, 아나샤는 바람에 실려오는 짙은 피 냄새를 맡았다. 펼쳐진 눈앞의 광경은 말 그대로 참혹했다. 누군지 모를 시체들이 아무렇지 않게 널브러져 있는 그곳에는 리온이 있었다.

아나샤는 쿵 내려앉은 심장에 잠시 멈춰 섰다가 빠르게 땅을 박차고 달렸다. 그리고 리온의 옆에 주저앉아 다급하게 그를 살폈다.

리온은 마치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목 주변과 가슴을 적신 피만 아니었다면 정말 자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나샤는 몇 번이나 그가 숨을 쉬는지 확인하고 맥박을 짚었다. 제발, 제발, 하고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중얼거림은 거의 바람과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나샤는 싸늘하게 식은 그 손을 꽉 붙잡았다. 이미 온기가 없는 손은 너무나도 차가워서 아나샤는 도저히 그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계속… 기다렸는데…….”

같이 임무에 나가자고 약속했는데. 아나샤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시큰한 눈가가 따가워서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리온의 곁에 설 만큼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릴 적 자신을 지켜줬던 리온처럼 자신도 그를 지켜주고 싶었던 건데. 그랬는데, 자신이 늦었다. 너무 늦어버렸다.

아나샤는 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도저히 그를 놓지 못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죽은 리온을 끌어안은 채 그 자리를 홀로 지켰다.

* * *

얼마나 오랫동안 꿈이 이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나샤는 미약한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흐릿하던 초점이 점차 제자리를 찾아갔다. 정신이 말갛게 깨어남과 동시에 느껴지는 강한 통증에 아나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으으…….”

배가 타들어 갈 것처럼 아팠다.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목이 잠겨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그저 소리 없이 끙끙댈 때였다.

아나샤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발소리에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옅은 빛깔의 금색 머리카락이었다.

순간적으로 리온이 떠올랐으나 뒤늦게 드러난 얼굴은 리온이 아니었다. 하지만 익숙한 얼굴이었다.

평소에 깔끔하게 쓸어 넘기던 옅은 색의 머리카락들은 그의 이마를 덮고 있었다. 그는 흰 셔츠를 입은 편한 옷차림이었지만 얼굴은 조금도 쉬지 못한 사람처럼 많이 피로해 보였다.

아나샤는 이곳이 단장님의 저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떼려는데 그 전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봉합한 곳이 다 아물지 않았을 겁니다.”

리히르트의 말에 아나샤는 왼손을 들려다가 시큰한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왼손은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아놓은 상태였다. 다시 왼손을 편히 늘어뜨린 그녀는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제 복부 위를 손끝으로 더듬어 보았다. 꿰맨 상처가 만져졌다. 따끔거렸으나 다행히 상처가 덧나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았다.

아나샤는 안도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죽지만 않았으면 되었다고 여겼다. 물론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어서 다시 끙끙거리는데 이마 위로 온기가 닿았다.

“주치의를 불러오겠습니다.”

가볍게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던 손길이 떨어졌다. 아나샤는 등을 돌려 문을 나서는 그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아나샤는 다시 눈을 떴다. 주치의가 몸 상태를 살피는 동안 그는 보이지 않았는데, 주치의가 검진을 끝내고 나가자 곧바로 단장님이 들어왔다.

“혹시 몰라 식사를 준비하라 일렀습니다. 물론 졸리면 더 자도 됩니다.”

“…아니요. 졸리진 않아요.”

아나샤는 목소리를 냈다. 오랫동안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목소리는 푹 잠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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