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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40화 (40/87)

40화

아나샤는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체감상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을 텐데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흐른 건지, 아니면 작전이 앞당겨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하라 창문이 없는 게 아쉽기만 했다.

어찌 됐든 계획대로 움직여야 했다. 아나샤는 원피스 속에 숨기고 있던 무기와 가는 쇠핀을 꺼내 들었다. 잠겨있는 철창문의 열쇠 구멍에 쇠핀을 넣어 몇 번 돌렸을까,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바깥으로 나가는 문 앞에 선 아나샤는 잠시 인기척이 있는지 살피다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갔다. 감시자 한 명 없이 텅 비어있는 공간이 보였다. 좁은 계단 통로 위에도 별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나와도 돼요.”

다시 안으로 돌아온 그녀는 첫 번째 팀부터 밖으로 나오도록 했다. 그중에는 루시의 여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금 이따 만나.”

“응.”

루시는 여동생과 짧은 포옹을 나누었다. 이윽고 아나샤를 포함한 열한 명의 여인들이 문밖을 나섰다. 탈출의 시작이었다.

* * *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피가 튀었다. 리히르트는 그 피를 뒤집어쓴 채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이들을 묵묵히 베어낼 뿐이었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본 적 없는 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나무토막을 베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그러나 그는 평소보다 과하게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빠른 궤도를 그리는 검이 팔 하나를 날려버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 살려줘!!”

용케도 기절하지 않고 살아남은 남자가 절박하게 외쳤다.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붙잡은 채 도망가려는 남자를 리히르트는 놓치지 않았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잘린 머리가 피가 흥건한 땅바닥 위를 굴렀다.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지나쳐 리히르트는 성 내부로 진입했다.

그런 그의 뒤를 뒤따르며 크리스는 질색한 얼굴을 했고 말이다. 최근에 분위기가 조금 물러져서 잊고 있던 사실이었으나 원래는 이렇게 손속에 자비라곤 없는 자였었다.

흐트러짐 없는 무감정한 얼굴로 적의 목을 꿰뚫고 다시 날카로운 검을 휘두른다. 레스토랑에서 아나샤와 단둘이 있던 모습이 떠올라 더욱 현재의 모습에 괴리감이 들었다.

‘이쯤 되면 아샤가 대단하다고 해야 될지…….’

두 사람이 연인 사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크리스로서는 사랑의 대단함을 몸소 체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후방에서 도망치려는 떨거지들을 해치우는 역할을 성실히 이행하며 말이다.

역시 살을 베는 감각은 언제 느껴도 기분 나쁘다 여기며 검을 회수한 크리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와 시체로 더럽혀진 복도의 풍경 어디에도 리히르트 그는 보이지 않았다. 자기 혼자 묵묵히 다 처리하고 또 다른 곳으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같이 좀 갑시다! 좀!!’

마음 같아선 그렇게 외치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크리스는 그를 찾아 뛰었다.

* * *

성안이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 도망치는 것은 수월했다. 감옥 안에는 이제 마지막 팀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루시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초조하게 지하에서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며 아나샤가 나타나자 그제야 다들 안심한 기색을 드러내었다.

“밖에 아무도 없어요.”

아나샤의 말에 여인들은 서로의 손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나왔다. 모두 나오자 아나샤는 성의 뒷문으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계획보다 이른 탈출이었지만 아나샤는 작전대로 움직였다. 이만한 소란이 일어날 정도면 기사단이 쳐들어온 것은 확실할 테니까.

“뒷문으로 나가면 서쪽 방향으로 갈 거예요. 그럼 창고가 하나 보일 텐데 창고 뒤쪽부터는 뜰이 펼쳐져 있어요. 뜰에 가면 어느 한 곳만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데 그곳에 숨어있다가 기사들과 합류할 거예요.”

긴 복도를 가로지르는 동안 아나샤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다시 한번 계획을 알려주었다.

성의 뒷문까지 가는 길은 수월했다. 성의 사용인들이 사용했을 낡은 문은 고작해야 성인 한 명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작았다.

“한 명씩 나갈 거예요. 나가면 제가 알려준 대로 바로 서쪽 방향으로…….”

말을 잇던 아나샤는 문밖의 희미한 인기척을 알아차리고 먼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뒤에 서있는 여인들에게도 쉿 하고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인질이 있으면 …도 지금처럼… 날뛰진 못하겠지.”

뒷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 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오려는 모양이었다.

“…고작해야 두 명인데 상대조차 안 되잖아. …제기랄!”

“…서둘러! 다들 뒈지고 싶은 게 아니면!”

느껴지는 기척은 대략 다섯 명 정도였다. 아나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휑한 복도 어디에도 열 명이 숨을 만한 마땅한 장소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되돌아가기엔 사내들은 이미 뒷문 근처에 와있었다.

“제가 나가면 다들 힘껏 달려요. 그리고 제가 알려준 대로 가는 거예요.”

아나샤는 오른손으로 무기를 꽉 말아 쥐었다. 멀쩡하지 않은 왼손으로 전부 상대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잠시 심호흡을 고른 뒤 아나샤는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그리고 가장 근처에 있던 사내의 급소를 베며 외쳤다.

“가요!”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란 사내들은 무기를 들었다. 아나샤를 향해 날붙이들이 휘둘러지는 동안 여인들은 빠르게 좁은 문을 빠져나와 도망치기 시작했다.

막 일곱 명째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남자 하나가 급작스럽게 타깃을 바꿔 어느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전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남자는 여인의 머리채를 단단히 틀어쥔 채 도망치기 위해 움직이려는 여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노예 년들까지 우리를 우습게 여겨! 당장 안 멈춰!”

“꺄아악!”

남자가 본보기로 여인을 찔러 죽이려 할 때였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앞으로 허물어졌다. 쓰러진 남자의 목 뒤에 깊게 박혀있는 검이 드러났다.

아나샤가 첫 번째로 처리했던 남자가 떨어뜨린 검이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그것을 루시가 주워 들어 뒤에서 찌른 것이다.

루시는 처음 한 살인에 두려움조차 들지 않았다. 자신들이 당했던 일들을 생각한다면 수차례 난도질을 해도 모자라다고 여겼다.

“설 수 있겠어요?”

“고, 고마워요.”

“어서 가요.”

루시는 구한 여인을 일으켜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아나샤는 세 명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다. 한 명의 눈에 단검을 박아 넣고 곧바로 단검을 휘둘러 다른 이의 칼을 막아내었다.

강한 힘에 밀려났으나 그것도 잠시 빠르게 몸을 숙여 휘둘러진 칼을 피하고 남자의 손목을 베어냈다. 민첩함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그녀였다. 잘 벼린 단검 끝은 눈앞의 남자의 급소를 정확히 가르고 허공에 멈췄다.

다른 한 명도 빠르게 해치운 아나샤가 나머지 한 명을 찾아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어느새 루시의 뒤에 바짝 따라붙은 남자가 보였다.

아나샤는 달렸다. 그리고 남자가 휘두르는 검이 루시의 등을 베려는 그 찰나의 순간, 단검을 날렸다. 곧게 날아간 단검은 남자의 손등에 정확히 꽂혔다.

“…윽!”

남자의 손이 멈칫 허공에 멈췄다. 그러나 끝내 검을 놓진 않았다. 검끝은 정확히 루시를 향해 움직였다. 뒤를 돌아본 루시가 검에 찔리려는 순간, 아나샤가 그 앞을 막아서며 루시를 밀어냈다.

아나샤는 고통에 파르르 눈꺼풀을 떨었다. 순간 눈앞이 점멸될 만큼 강한 통증에도 아나샤는 손을 움직여 남자의 손등에 박혀있는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곤 힘껏 남자의 턱밑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컥… 커…윽.”

남자가 뒷걸음질 치자 아나샤의 배를 관통하고 있던 검도 함께 빠져나갔다. 뜨거운 피가 후두둑 바닥 위로 쏟아졌다.

“아샤!”

몰아닥친 통증과 함께 순식간에 시야가 흐려졌다. 바로 옆에서 붙잡아 주는 손길이 느껴졌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나샤는 결국 잠시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울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그것이 루시라는 것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모든 사물이 흐릿하게 보였다.

멀어져 가는 의식 때문인지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가고, 눈꺼풀이 점차 무거워져 갔다.

아나샤는 눈을 감았다.

* * *

기사들이 뒤늦게 성안에 쳐들어왔을 때 복도는 적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누가 한 일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경외감이 서린 눈들이 피로 물든 한 사내에게로 가닿았다.

리히르트는 그 시선들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성안을 수색하기에 바빴다. 기사들은 그가 성안에 숨어있는 적을 찾아내는 것이라 여겼지만 실상 그는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이미 성안을 몇 번이나 수색했으나 성안에 잠입해 있을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리히르트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핏줄이 도드라진 주먹은 도저히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크게 다쳐 어디선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온갖 불길한 상상들이 그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뒷목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는 불안한 예감에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점차 금이 가기 시작할 때였다.

“지하 감옥에는 아무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첩자가 원래 작전보다 이르게 움직인 것 같습니다.”

그때 멀리서 들려온 기사의 목소리에 리히르트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다른 부대 상황은?”

“2부대는 현재 맡은 구역의 적들과 대치 중입니다. 3부대는 부상자를 수습한 후 예정대로 성의 뒤뜰에서 첩자와 합류할 예정입니다.”

“이곳 상황은 얼추 정리된 것 같으니 다른 부대에 지원을…….”

성의 뒤뜰, 그 단어만을 머릿속에 새기기 무섭게 리히르트는 곧장 몸을 돌려 성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으나 이상하게도 초조함은 가라앉지 않았다.

성의 정문을 빠져나와 뒤편으로 향하자 얼마 안 가 드넓은 뜰이 나타났다. 해가 뜨지 않아 어슴푸레한 뜰의 전경을 빠르게 둘러보던 그는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있는 곳으로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아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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