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사랑에 빠질 때-39화 (39/87)

39화

“들어갈 때 한 명만 들어가지 않았던가?”

“네가 못 봤나 보지.”

“아닌데… 분명 한 명이었는데.”

“그럼 유령이게?”

“무시해. 저 새끼 술 마시고 헛소리하는 게 한두 번이냐.”

자신이 분명 기억한다며 사내가 항의했지만 다른 이들은 술과 마약에 취해 몽롱한 상태였다. 그렇게 사내의 말은 묵살되었다.

* * *

리히르트와 크리스가 탄 마차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달러스 영지 초입에 도착했다. 검은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는 작은 불빛조차 없이 조용했다. 2년 전의 전투로 민가는 모두 폐허가 됐으니 사람의 기척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영주성까지 거리가 꽤 되었지만 마차를 타고 갔다간 들킬 위험이 있어 내린 것이다.

폐허를 무거운 눈으로 둘러보던 크리스는 앞에서 걷던 리히르트가 걸음을 멈추자 자연스레 검에 손을 가져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진 벽 옆으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5기사단 단장님 되십니까?”

거리를 정찰하고 있던 기사였다. 리히르트가 굳이 황실 문장이 새겨진 검자루를 내보이지 않아도 기사는 이미 그의 신분을 짐작한 듯 입을 뗐다.

“서신 받았습니다. 단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렇게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버려진 빈 여관이었다. 1층은 식당으로 사용되었었는지 식탁과 의자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리히르트가 2층에 올라서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어둠 속에서 일제히 거수경례했다. 그러나 리히르트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바로 안쪽 방에 들어섰다. 복도에 남게 된 크리스는 머쓱함에 헛기침을 내뱉었다.

방 안에는 작전의 총책임 및 지휘를 맡은 제2기사단 단장과 제1, 제4기사단의 부단장들이 앉아있었다. 램프 하나 켜놓은 방 안은 어두웠으나 희미한 불빛조차 새어나가지 않게 창문은 두꺼운 모포로 가려져 있었다.

작전 내용을 다시 읊고 있던 제2기사단 단장, 하멜은 방에 들어선 리히르트를 발견하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오셨군요. 제2기사단 단장 하멜 아돌프라고 합니다.”

하멜이 먼저 악수를 청하자 리히르트는 가볍게 그 손을 붙잡았다. 잠시 서로의 소개가 이어졌으나 곧바로 진지한 태도로 돌아와 작전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날이 밝으면 부대 전체가 영주성으로 진격할 겁니다. 작전부대는 세 부대로 나뉘어 각 맡은 구역을 시작으로 소탕 작전에 돌입할 겁니다.”

각 부대의 지휘를 맡은 부단장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독단으로 행동하겠다고 하시니 원하시는 부대에 합류하셔서 적들을 처치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자세한 작전설명은…….”

“지금 바로 향할 생각입니다. 함께 온 기사도 대동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지원 부탁드립니다.”

리히르트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하멜이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잠깐, 멈추십시오! 지금 영주성에 쳐들어가겠다니요? 아직 날이 밝지도 않았습니다. 조금만 기다렸다가…….”

“기다릴 여유가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을 자른 리히르트가 문고리를 쥐었다. 대답하는 이 순간조차 시간 낭비로 느껴질 만큼 조급함을 느끼고 있는 현재 그에게 대화란 무의미했다.

정말 이대로 나갈 것 같은 태도에 하멜의 표정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조급해하시는진 몰라도 이런 단독 행동은 너무 무모합니다. 자칫하다간 이번 작전 모두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단 말입니다!”

작전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건 원치 않는다며 하멜은 강경하게 말했으나 리히르트는 대답도 하지 않고 문을 나가버렸다. 완전한 무시에 하멜은 기가 차 쾅 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뭐 저런…….”

“입조심하십시오.”

문밖에서 들을세라 제1기사단 부단장이 그를 말리듯 말했다. 상대가 공작인 만큼 괜히 험담을 했다가 불이익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된 이상 작전 시간을 조금 앞당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기사들에게 한 시간 내로 출정할 수 있게 준비하라고 이르세요.”

하멜은 애써 분을 삭이며 말했다.

* * *

아나샤는 차가운 벽에 기댄 채로 창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체감상 몇 시간이 흐른 건진 알 수 없었다. 장소의 영향 탓인지 잠시 예전 일이 떠올랐다.

‘단장님이랑 처음 만났을 때도 감옥이었는데.’

이쯤 되면 감옥과 인연이 있는 게 아닐까. 실없는 생각을 하던 아나샤는 머리를 흔들어 잠기운을 완전히 떨쳐냈다.

자신과 같은 감옥에 갇혀있는 여인들은 불안하게 몸을 웅크린 채였다. 하나같이 탈출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은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었다.

아나샤가 감시자의 눈을 피해 곧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을 때 여인들의 반응은 딱 두 가지로 나뉘었었다.

하나는 왜소해 보이는 여자애가 과연 자신들을 탈출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스러운 반응이었고, 다른 하나는 괜히 탈출하겠다고 나섰다가 죽임을 당하진 않을까 불안해하는 반응이었다.

아나샤는 그녀들을 이해했다. 이런 상황에서 긍정적인 생각을 유지하는 것은 누구라 해도 힘들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나샤는 더 이곳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희망을 되찾아 밝아진 얼굴들이 보고 싶었으니까.

“음, 몇 명이라도 좋으니까 잠깐 제 얘기 좀 들어주실래요?”

아나샤는 웅크려 있는 여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루시가 가장 먼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경청할 준비를 하자 다른 여인들도 하나둘 아나샤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아침이 되면 제국 기사들이 이 성에 쳐들어올 거예요. 모든 영주성의 병력이 성벽 쪽으로 가면, 우리는 그 소란을 틈타 이 감옥을 나갈 거구요.”

숨죽여서 듣고 있는 여인들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성의 뒷문을 빠져나가면 바로 뒤뜰로 가서 숨어있을 거예요. 성에서도 떨어져 있고 몸을 숨기기 제일 적합한 곳이거든요. 그리고 제3부대 기사들이 오면 기사들과 합류해서 안전하게 탈출하는 거죠.”

“그게… 가능할까요? 정말로요?”

“만약에 잡히기라도 하면…….”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들에 아나샤는 왼쪽 손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확실한 건, 여기 있으면 더 위험하단 거예요.”

아까 전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아진 것인지 손목 옆이 퉁퉁 붓고 있었다. 고통은 어떻게든 참으면 된다지만 문제는 제 생각대로 움직여 주질 않는단 거였다. 아나샤는 제 손목을 쏘아보듯이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도… 이곳에서 전투가 일어났었어요. 성안에 내몰린 적군과 성을 탈환하려는 제국군 간의 전투였죠. 처음엔 우리 제국군이 우세했어요.”

“…….”

“그런데 적군들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노예로 팔기 위해 잡아온 민간인들을 인질로 삼았어요. 인질의 목숨을 앞세워서 제국군의 후퇴를 요구했고요. 시간을 끌면 끌수록 인질들이 계속 죽어나가니까…, 다른 선택지가 없었죠.”

전세는 단번에 뒤집어졌고, 제국군은 인질을 구출하려다 더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는지 성벽의 안과 밖에는 시신들이 한가득 쌓였을 정도였다.

아나샤는 그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지원군으로 달러스에 도착했을 땐, 인질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끝까지 성에 남았던 자들은 모두 죽어있었다.

“아샤……?”

아나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제야 주위를 볼 수 있었다. 가라앉은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다. 인질로 잔인하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젖어 하얗게 질린 얼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 미안해요. 겁줘서……. 여기 갇혀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할까 봐 사실대로 얘기한 거였어요. 진짜 겁줄 의도는 아니었어요!”

오른손을 저으며 아나샤는 급하게 변명해야 했다.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조금은 귀여워 몇몇의 얼굴이 풀릴 때였다.

“제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거 알아요. 좀 우락부락하게 생겼으면 믿음직스러웠을 텐데…….”

“풉!”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한 그 중얼거림에 근처에 있던 여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은 사방으로 전염되었다. 그 작은 웃음소리만으로 얼어붙어 있던 분위기는 단숨에 부드럽게 풀렸다.

“아니에요. 아샤가 얼마나 잘 싸우는지 제가 봤는걸요. 지금도 엄청 믿음직스러워요.”

루시가 말하자 주위 여인들이 정말이냐는 눈빛을 보내왔다. 믿지 못하겠다는 감정이 주로 섞여있었는데 이를 알아차린 루시는 간단하게 자신이 겪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그 얘기를 들은 여인들은 새로운 감정이 깃든 눈으로 아나샤를 바라보았다. 신뢰라는 희미한 감정을 읽어낸 아나샤는 그 감정에 보답하듯이 당차게 말했다.

“저 약속할게요. 절대 한 명도 다치지 않게, 끝까지 지켜드린다고요.”

단호하기까지 한 그 맹세에 여인들은 잠시 서로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듯이 서로를 바라보던 여인들이 머지않아 하나둘씩 아나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믿어보겠다는 듯이 조금은 결연한 눈빛들이었다.

“그럼 일단 열 명씩 나눌까 해요.”

인원이 많으면 호위하기도 힘들고 들킬 위험이 컸다. 열 명씩 탈출을 할 거라는 말에 여인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상의하기 시작했다. 오랜 상의 끝에 나이순으로 해서 총 네 팀으로 나누기로 결정했다.

어린 팀부터 탈출을 하기로 순서가 정해지자 아나샤는 바닥에 영주성의 구조를 대략적으로 그리며 탈출 계획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설명을 끝내고 아나샤는 벽에 편히 기대어 앉았다. 잠시라도 체력을 보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잠시 눈을 감기도 무섭게 소란스러운 소리가 지하 문밖에서 들려왔다.

“…성문…에서… 일…나는…….”

“…다… 깨워……!”

외침과 다급한 발소리가 밖의 상황을 짐작게 했다.

‘벌써 해가 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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