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아나샤는 어두운 천장 위로 기어 올라가 타일을 대충 제자리에 돌려놓고 움직였다.
“천장 위에서 무슨 소리 나지 않아?”
“보나 마나 큰 쥐겠지. 소리 한두 번 들어보냐?”
밑에서 떠드는 두 명의 문지기를 작은 구멍 틈새로 내려다보다가 아나샤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제발… 제발, 그만둬 주세요.”
천장 아래에선 작게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방 안의 상황을 침착하게 파악할 새도 없었다. 아나샤는 단검 손잡이를 입에 물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휘장이 길게 쳐진 침대 위에서 여자를 희롱하고 있던 바칸이 갑작스러운 소리에 뒤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휙, 하고 빠르게 그어진 단검이 그의 두꺼운 목을 그어내었다.
“그, 으윽!”
벌거벗은 채로 발버둥 치는 바칸을 짓누르고 아나샤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목에 더 깊게 단검을 찔러 넣었다. 침대 시트가 붉은 피로 흠뻑 적셔지고 얼마 안 가 바칸의 몸뚱이가 완전히 멈췄다.
아나샤는 단검을 거두고 고개를 들었다.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침대 헤드보드에 바짝 붙어 바들바들 떨고 있는 금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소리를 지르려는 낌새를 보이자 아나샤는 빠르게 여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붉은 피가 여자의 입 주변과 턱에 묻자 그제야 아차 싶어 손을 떼어냈다.
“쉿. …구해주러 왔어요. 정말이에요.”
“…아.”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요.”
아나샤는 빠르게 검은 복면을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살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한 얼굴이 드러나자 금발 여인은 오히려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여자애?”
“…어, 잠시만요.”
아나샤는 품에서 작은 병과 기다란 침 두 개를 꺼내었다. 조심스럽게 병의 마개를 연 후 기다란 은색 침들의 끝부분을 그 안에 담갔다.
“바칸 님? 안에서 무슨 일…….”
아나샤는 두 개의 침들을 손에 쥐고 있다가 문이 열리자 기다렸단 듯이 침을 던졌다. 두 개의 침은 한 명의 이마에, 또 다른 한 명의 목에 정확히 박혔다.
소량만으로도 거대한 짐승의 사지를 단번에 마비시킬 수 있는 독약이었다. 소지만 해도 극형에 처하는 금지된 독극물이었지만 황실에서 임무 수행을 위해 직접 제공해 준 것이었다.
“윽…….”
문지기 둘은 얼마 안 가 바닥에 쓰러져 마비 증세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이 큰 소리를 내기도 전에 아나샤는 재빨리 그들을 처리하였다. 그리고 병을 다시 갈무리해 품속에 넣고 여인을 돌아보았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빨리 구해드려야 될 것 같아서……. 그보다 괜찮으세요?”
“…흐으윽.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정말로…….”
여인은 여전히 몸을 떨었지만 아나샤를 두려워하진 않았다. 잠시 눈물을 흘리던 여인은 거의 벗겨져 있던 몸을 간신히 추슬렀다. 아나샤는 손에 묻은 피를 이불에 닦은 후 주위에 떨어져 있던 카디건을 주워 여인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고마워요…….”
“아니에요. 전 아나샤예요. 아샤라고 불러주세요.”
“전, 루시예요.”
루시는 카디건에 팔을 끼우고서 시체를 피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나샤의 팔을 힘주어 잡았다.
“지, 지하에 여동생이 있어요. 여기 잡혀온 다른 사람들도요. 전부 지하에 갇혀있어요.”
도와달라는 그 말에 아나샤는 안심하라는 듯이 루시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전부 무사히 나갈 수 있게 도울게요.”
“…….”
“해가 뜨면 제국의 기사들이 이 성을 기습할 거예요. 그 틈을 노려 밖으로 도망칠 거구요.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요.”
확신에 찬 그 말에 루시는 안도의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루시가 다시 고맙다고 말을 하려 할 때 아나샤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전에 간부 하나를 더 없애야 해요. 루시, 혹시 다른 간부 하나가 어디 있는지 알면 날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다른 간부요? …잘 모르겠어요. 저도 줄곧 지하에 갇혀있다가 끌려 나온 거라…….”
간부 얼굴은커녕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며 고개를 젓던 루시는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모르지만 제가 안내해 드릴 순 있을 것 같아요.”
루시는 4층으로 올라갔다. 성 복도에서 시답지 않은 얘기를 나누며 킬킬대던 더글라스의 수하들이 루시를 발견했다.
“뭐야?”
사내 하나가 성큼성큼 루시의 앞으로 다가왔다. 노예로 끌려온 여자들은 지하 감옥에 죄다 가둬놓았으니 홀로 이곳에 있는 루시가 수상쩍기만 한 것이다.
“바칸 님께서… 더글라스 님을 모시라고 하셔서요.”
루시는 떨리는 손을 꾹 억누르며 말했다. 숙여진 고개와 간헐적으로 떨리는 어깨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두려워하는 여인 같았다. 그것에 의심을 푼 사내가 다른 사내에게 눈짓했다.
“데려가.”
다른 사내는 루시를 안쪽 복도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던 그는 어느 방문을 열어 루시를 밀어 넣었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투박한 손이 루시의 엉덩이 부근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치심에 입술만 깨물고 있던 루시는 닫히는 문을 노려보다가 곧 제 할 일을 깨닫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더글라스로 추정되는 인물은 없었다. 루시는 커다란 침대 옆에 있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4층이라 도망칠 수 없다고 여겼는지 창문은 수월하게 열렸다.
“아샤. 아샤.”
부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문 밖에서 아나샤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말곤 아무도 없어요.”
루시의 말에 아나샤는 곧바로 창문을 타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루시를 돌아보며 말했다.
“혼자서 무서웠을 텐데 고생했어요.”
“아니에요.”
“루시, 침대 아래에 숨어있어요. 나머지는 저한테 맡기구요.”
루시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한편으로는 아나샤가 걱정되었다. 그녀의 실력을 의심해서는 아니었다. 혼자서 사내 여럿을 해치웠던 것을 눈앞에서 직접 보았으니 의심이 될 리 없었다.
그저 자신보다 작은 그녀가 제 여동생 같아서 괜히 다칠까 염려되었다.
“조심해요.”
“네.”
루시의 말에 아나샤는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루시가 침대 밑에 들어가 있는 동안 아나샤는 더글라스를 기다렸다. 반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바깥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발소리는 방문 앞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고 짙은 붉은 갈색의 머리를 한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나샤는 문 뒤에 숨은 채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암살 대상인 더글라스의 인상착의와 맞아떨어졌다.
아무도 없는 침실에 남자가 수상함을 느끼고 다시 문 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 아나샤가 독을 바른 단검을 쥐고서 신속히 남자의 목덜미를 노렸다.
“큭!”
단검이 목덜미를 얕게 파고들기 무섭게 남자가 곧바로 팔을 휘둘러 왔다. 그 강한 힘에 단검은 아나샤의 손을 벗어나 바닥 위로 떨어졌다.
“여기 암살…….”
독에 시야가 울렁이는 와중에도 남자는 피가 흘러내리는 뒷목을 부여잡고서 달려 나갔다. 문밖으로 도망치려 하자 아나샤는 곧바로 등 뒤로 달려들어 남자의 입을 왼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리고 무게중심을 왼쪽으로 쏠리게 하며 남자의 머리를 왼쪽으로 강하게 돌렸다.
두둑, 하는 뼈가 어긋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얼마나 세게 돌렸는지 그녀의 왼손도 함께 꺾였을 정도였으나 아픔을 신경 쓸 시간조차 없었다.
남자와 함께 바닥 위로 쓰러진 아나샤는 다리로 남자의 목을 감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교차한 다리로 남자의 목을 졸랐다. 컥컥대던 남자는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게거품을 물었다.
몸을 일으킨 아나샤는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죽은 남자에게서 멀어졌다. 그 짧은 사이 필사적으로 힘을 써서인지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한숨을 내쉰 아나샤는 벽에 기대었다. 긴장이 풀리자 그제야 왼손 손목에서 고통이 밀려왔다. 한번 다쳤던 곳을 또 다쳐서 그런지 고통이 배가된 느낌이었다. 아나샤가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자 루시는 침대 밑에서 나와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샤, 괜찮아요? 어디 다친 거예요?”
“아, 크게 다친 건 아니고 손목이 좀 욱신거려서요.”
“어디 봐요.”
루시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아나샤의 왼쪽 손목을 조심스레 살폈다. 조금만 만져도 아픈지 아나샤가 움찔거리자 루시는 조금 욱신거리는 정도가 아니라고 여겼다.
“…벽을 타는 건 무리겠죠?”
“네. 이 상태로는 절대 안 돼요. 너무 위험해요.”
“일단 감옥으로 가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루시.”
다행히 모든 암살 임무는 완료한 상태였다. 이제 남은 임무는 인질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탈출을 돕는 것이었다. 아나샤가 남은 임무에 대해 루시에게 설명하자 루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뒤늦게 그녀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인질들과 함께 숨어있으려고 안에 원피스를 입고 있다고 했죠? 그럼, 지금부터 인질인 척하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들어올 때 루시 한 명이었으니까 들키지 않을까요?”
“아마도 자세히 기억하진 못할 거예요. 지금 시간이면 다들 술에 취해있거든요.”
작전이 새롭게 세워지자 아나샤는 곧바로 루시와 함께 시체를 침대 밑에 숨겼다.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핏방울들을 지워낸 아나샤는 첩자복을 벗었다. 안에 입고 있던 얇은 재질의 원피스가 드러났다.
허벅지에 둘러진 가죽 끈에 필요할 만한 무기들을 꽂아 넣고 아나샤는 루시를 돌아보았다. 준비가 되었다는 말에 루시가 먼저 문을 열고 나섰다. 아나샤는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자 떠들고 있는 사내들이 보였다. 뿌연 연기를 허공에 뻐끔대며 뿜어대던 사내 하나가 루시를 발견하고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빨리 나올 리가 없을 텐데.”
“생긴 거랑 다르게 안는 맛은 별론가 보네.”
사내의 투박한 손이 루시의 가슴을 콱 움켜쥐었다. 루시가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빼자 사위에서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빼기는.”
사내는 픽 웃으며 다른 사내들에게 설렁설렁 손짓했다.
“이년들 다시 가둬놔. 그리고 너는 더글라스 님 방에 가보고.”
“더글라스 님께서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주무시겠다고요.”
다른 이가 움직이기 전에 아나샤가 황급히 끼어들어 말했다. 이에 사내가 “그래?” 하고 성의 없이 대답하고는 명령을 철회했다.
대신 사내 둘이 아나샤와 루시를 끌고 내려갈 때 한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