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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37화 (37/87)

37화

더러운 하수로든, 천장이든 임무를 위해서라면 기어 들어가야 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숨은 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된 일을 홀로 해내야 하는 직업이었다.

그래서 아나샤만큼은 인정받고 대우받을 수 있는 직업을 가졌으면 했다. 그랬는데, 리온은 눈앞의 울상인 아이를 바라보았다.

“싫어! 왜 나는 리온처럼 첩자 하면 안 돼?”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인 채 아나샤가 고집스럽게 눈썹을 모았다.

“나도 첩자 할 거야! 리온이 못 하게 하면 할아버지한테 따로 부탁할 거야!”

“하아. 아샤, 분명 할아버지도 반대하실 거야.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었지? 그러려면…….”

“어른이 돼서도 리온이랑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이 떨어졌다. 작은 손등으로 벅벅 눈가를 문지르며 아나샤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나 나무도 잘 타! 단검도 잘 던지고, 달리기도 빠르다고… 흡, 삼촌들도 칭찬해 줬단 말이야.”

“…….”

“아직은 리온처럼 엄청 멋지게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노력했단 말이야. 나도 리온처럼 되려고…….”

그 말에 리온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자신처럼 되고 싶다니, 평생 동안 듣지 못했던 인정과 칭찬을 한꺼번에 몰아 받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그에 반해 가슴속은 저릿하기만 했다.

아이에게 나는 훌륭해 보이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목 위로 뜨거운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그는 아나샤를 품속에 끌어당겨 안았다.

아나샤의 훌쩍이는 소리는 얼마 안 가 멎었지만, 반대로 아나샤의 어깨는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리온 울어?”

“…아니.”

“내가 말 안 들어서 그래? 그러면, 나 리온 말 들을게. 첩자 안 할게…….”

“아냐, 아냐. 그냥… 아샤가 날 멋있다고 생각해 주니까 고마워서 그래. 그냥 고마워서…….”

“그럼 나 첩자 해도 돼?”

“응. 아샤는 분명 나보다 멋진 첩자가 될 거야. 분명히.”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이에 아나샤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활짝 웃었다.

“좋아! 내가 크면 리온 옆에서 도와줄게.”

“응.”

“같이 임무도 하고, 계속 같이 있는 거지?”

“응.”

리온은 올라오려는 울음기를 애써 꾹 누르며 대답했다.

* * *

“아샤!!”

본관 4층 외벽에 올라가 있는 아나샤를 발견한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기사단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벽에 튀어나와 있는 구조물은 어린아이 발 하나 겨우 디딜 수 있을 만큼 좁다래 보였다.

그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모습에 기사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들이었다.

“대체 저기를 어떻게 올라간 거야!”

“으아악! 위험하잖아!!”

“내가 올라갈 테니까 좀 잡아봐!”

“아니 네가 저길 어떻게 올라가! 누가 리온 녀석 좀 데려와!”

아래가 소란스러운 와중에 아나샤는 벽에 달라붙은 채 한 발 한 발 옆으로 움직였다. 이에 기사들 사이에서 다시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만에 하나 아이가 떨어질 상황을 대비해 서로 받아주기 위해 기사들이 우왕좌왕할 때였다.

“역시 우리 아샤!”

기사의 말을 듣고 달려온 리온이 순수하게 감탄을 터뜨렸다.

“언제 저렇게 높이 올라갈 수 있게 된 거야? 난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지금 감탄할 때냐?!”

크리스가 경악해서 외친 순간이었다. 아나샤가 아래에 도착한 리온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이에 다시 “허억!” 하는 숨넘어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세찬 바람에 작은 몸이 기우뚱하더니 아나샤가 벽을 붙잡기도 전에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추락하는 아찔한 느낌에 아나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몇 초 뒤, 눈을 뜨자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연한 금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올라가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낙법부터 배우는 게 좋을 거야.”

리온의 품에 안정적으로 안겨있던 아나샤는 입을 큼지막하게 벌렸다. 역시 리온이었다!

“혼자서 저기까지 올라간 거야?”

“응!”

“우리 아샤 대단한걸! 벌써 나랑 같이 임무하러 다녀도 되겠는걸?”

아나샤를 두 팔로 번쩍 들고서 리온이 천재라고 기뻐하는 동안 기사들은 하나같이 십 년은 늙은 얼굴이었다.

* * *

첩자가 되겠다는 아나샤의 결심은 열세 살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이젠 혼자서도 가뿐히 벽과 나무를 오르고, 천장과 지붕 위를 쏘다니니 리온도 아나샤를 말릴 수 없었다. 낙법 같은 기본적인 것만 가르쳐 주던 리온은 본격적으로 임무에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체술과 은신술, 그 외에도 열쇠 없이 자물쇠를 따는 법이나 표적을 감시하는 법, 건물 안에 잠입하는 법 등 첩자로서 필요한 기술들을 아나샤에게 전수해 주었다.

리온도, 기사단의 다른 이들도 눈치채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아나샤는 첩자가 되기엔 정말 천부적일 정도의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반사 신경과 균형 감각은 웬만한 기사들보다 뛰어났으며, 몸도 날랬다. 거기다 몸집이 작으니 어디에 숨거나 잠입하기에는 최고였다. 게다가 악착같은 면이 있어 배우는 속도 또한 빨랐다.

아나샤가 열일곱 살이 됐을 때는 리온의 임무에 따라 나섰다.

아직 임무를 시키기에는 어리고, 그렇다고 임무를 안 시키기에는 아나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1년 동안은 리온을 따라다니며 옆에서 보고 배우는 것으로 단장 아버트와 합의를 본 것이었다.

그렇게 어엿한 열여덟 살이 됐을 때 아나샤는 혼자 첫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당당히 완수해 내었다.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는 듯이 콧방귀를 뀌어대며 말이다.

리온과 함께 임무를 맡는 날도 머지않았다며 아나샤는 하루하루 들떠있었다. 매일 단장실에 찾아가 리온이랑 같이 임무에 보내달라고 조르기 일쑤였다.

하지만 첩자가 하는 일은 혼자서 수행하기 적합한 일들뿐이었다. 둘이서 할 만한 임무는 없었다. 그러던 중 달러스 잠입 작전에 리온이 투입되었다.

아나샤는 따라가려 했지만, 리온은 이제 막 첫 임무에 성공한 아나샤에게는 조금 위험할지 모른다며 만류했다. 대신 달러스에서 돌아오면 함께 임무에 나가자고 얘기했다.

평생 바라왔던 일이었기에 아나샤는 그날만은 고집을 꺾었다.

리온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뛰어난 첩자가 되겠단 꿈이 바로 코앞에 와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 밤을 부푼 마음을 달래며 아나샤는 리온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아나샤가 꿈꿔왔던 일이 이루어지는 날은 영영 오지 않았다.

* * *

달조차 뜨지 않은 짙은 밤이었다.

낡은 고성을 둘러싼 성벽 위였다. 캄캄한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아나샤가 벽을 오르고 있었다. 검은 옷으로 전신을 위장해 멀리서 보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나샤는 고개를 들었다. 성벽 위쪽에는 횃불이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별다른 장애물이 없는 성벽은 쉽게 타 넘을 수 있는 구조였지만 내려갈 때 눈에 띌 가능성이 있었다.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성벽의 둘레를 따라 움직이던 아나샤는 아치형 구멍을 발견했다. 바람이 윙윙 부는 통로 안에선 걸걸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많은 노예 중에서 한 명 빼돌린다고 알아차리겠어?”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애초에 네놈 거길 보고 고분고분할 여자가 어디 있겠어?”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아나샤는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구멍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통로 안의 기척이라고 해봐야 앞쪽에서 걷고 있는 사내들이 전부인 것 같았다. 아나샤는 그들을 조용히 미행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끄윽, 급하다, 급해.”

그들은 나타난 나선형 돌계단 위로 허겁지겁 올라가기 시작했다. 급하다며 바지 버클을 푸는 모습이 감시탑 위에서 뭘 하려는지 안 봐도 훤했다.

범죄자들의 소굴로 함락되어 버린 성이었다. 진지하게 보초를 서는 병사가 있는 것도 이상했다. 아나샤는 그들과 반대로 돌계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래에는 횃불이 드문드문 걸린 넓은 통로가 있었다. 아나샤는 통로를 따라가다가 맞은편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들려오자 황급히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또 한 소리 듣겠군.”

“알면 빨리 움직여.”

“짜증 나네. 왜 우리만 술 심부름꾼 노릇이나 해야 되냐고.”

“그럼 대신 밤 시중이라도 들든가. 듣기론 바칸 님께선 남자 여자 안 가린다던데 혹시 알아?”

“미친 새끼… 그걸 말이라고.”

이어진 거친 욕설을 무시하고 아나샤는 바칸, 그 이름에만 집중했다. 익숙한 이름에 머릿속에 새겼던 정보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노예상단을 운영하는 바칸, 반제국파의 수장인 더글라스. 현재 이 성을 차지한 범죄 조직의 간부들 이름이었다.

아나샤의 임무는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간부 두 명을 암살하고, 성안에 붙잡혀 있는 인질들의 위치를 파악한 후 구출 신호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몸을 숨기고 있던 아나샤는 뒤늦게 묵직한 술통을 나르는 사내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성안에 들어서는 것은 수월했다. 관리가 잘되지 않아 쿰쿰한 냄새가 나는 고성의 복도 안은 술을 마시며 노는 듯한 왁자지껄한 소음이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사내들은 어둠이 깔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벽 뒤에 숨은 아나샤는 사내들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기다렸다가 다시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왼쪽으로 돈 것 같은데…….’

3층으로 올라선 아나샤는 사라진 사내들의 인기척을 뒤쫓았다. 그들은 복도의 왼쪽으로 돌아 어느 방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두 명의 문지기와 짧게 대화를 나눈 후 문 옆에 술통을 내려놓았다.

사내들은 왔던 길을 다시 돌아 나갔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숨어서 듣고 있던 아나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를 수 있을 기둥과 그 윗부분에 일어난 천장 타일의 작은 틈새가 보였다.

어떻게 움직일지 머릿속으로 구상할 필요도 없었다. 곧바로 민첩하게 기둥을 타고 올라간 아나샤는 타일 틈 사이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우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오래된 타일은 쉽게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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