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단장님,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기사들이 아이흉내를 낸답시고…….”
기사의 당황한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쾅 하고 문이 열어젖혀졌다.
문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선 회색 머리의 중년 사내의 모습에 방 안에 있던 모든 기사들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함부로 대적할 수 없는 무거운 존재감을 풍기는 그는 다름 아닌 제5 황실 기사단장 아버트 벨더스였다.
“리온 라이나.”
리온은 곧바로 아버트의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단체로 기사단의 규율을 어긴 것도 모자라, 감히 단장인 나를 속여?”
“단장님… 따로 설명드리겠습니다. 다른 기사들은 제가 끌어들인…….”
“시끄럽다.”
아버트의 엄한 눈초리가 리온의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눈을 들어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좁은 침대 구석에 멀뚱멀뚱 앉아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근엄한 얼굴로 서있는 아버트에게로 다가갔다.
“누구데요?”
제법 제국어에 익숙해진 아나샤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방 안을 울리는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기사들이 모두 숨을 삼키며 허옇게 질리는 동안, 아버트의 엄격한 눈은 아이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기만 했다.
곧 아버트는 거대한 몸을 숙여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착 하고 작은 머리에 손을 얹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다.”
“할아버디?”
“그래그래.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때 기사들의 눈앞에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스윽 아버트의 입술이 올라가더니 그가 한없이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웃는 얼굴을 한 것이다.
아버트는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아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할아버지가 기사단 구경시켜 주마.”
“응!”
“리온 라이나, 네놈은 조금 있다가 나와 따로 얘기하지.”
“할아버지!”
“그래, 오냐오냐. 어서 가자꾸나.”
* * *
“그 좁은 곳에 애를 가둬놔!!”
그리고 몇 시간 뒤, 단장실 안에선 크나큰 호통이 울려 퍼졌다. 응접용 소파에 앉아있는 리온은 눈앞에 있는 아버트의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한창 뛰어놀아도 모자랄 나이에, 그 좁은 곳에서 얼마나 답답했을지 생각해 봤냔 말이다!”
“…….”
“좋은 보호자가 되어주고 싶으면 그럴 자격부터 갖춰야지. 무턱대고 아이를 책임지겠다고 하면 끝이냔 말이다.”
“…면목 없습니다.”
리온은 꾹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트는 크흠 소리를 내며 턱수염을 문질렀다.
“아샤에 대한 얘기는 전해 들었다.”
“…네.”
“돈을 모으고 있다고?”
“집을 사서 아샤와 따로 나가서 살 생각이었습니다. 아샤를 방에 숨긴 채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게 아니라 아이한테 미안해해야지.”
그 말에 리온은 결국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질렀다.
“아샤에게도 당연히 미안합니다. 제가… 능력이 없어서 결국 이렇게 돼버렸으니까요.”
“그래. 고작해야 3년 치 기사 봉급으로 집을 사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사실은 돈을 빌릴 생각이었습니다. 빌려줄 수 있는 곳도 몇 군데 알아봤고요. 일단 집이 있어야 아샤를 키울 수 있으니까…….”
“집을 구하면? 네놈이 임무에 나가있는 동안은? 그 어린애를 혼자 두고 나갈 생각이었겠지. 보호자가 없는 집에서 혹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그런 일은 고려해 보지도 않았겠지.”
“…….”
리온은 진심으로 할 말이 없어졌다. 집만 구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 여겼던 제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던 것인지, 거기까지 생각 못 한 자신이 진심으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만일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아나샤가 크게 아프거나 강도가 침입한다거나 하는 상상을 하니 머릿속이 아득해지기만 했다.
“기숙사 방 중에 제일 괜찮은 방으로 비워두라고 했다.”
그때, 맞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리온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엄한 눈초리를 한 단장 아버트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어갔다.
“아이 방도 생겼으니 굳이 집을 구해서 나갈 필요도 없겠지. 네가 임무에 나가있는 동안은 나나 다른 기사들이 돌봐줄 테고, 아이에게 필요한 게 있다면 내가 사주면 되는 일일 테고. 흠 그럼 되겠지.”
그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리온은 고개를 푹 숙였다. 목이 메어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그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감사…합니다.”
“널 위해서가 아니다. 다 아샤를 위해서지.”
* * *
3년의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아나샤는 아홉 살이 되었다.
이제는 제국어를 완벽히 구사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아나샤는 다른 공부도 하게 되었다. 또래 귀족 아이들이 배우는 역사, 지리, 산술 등의 다양한 공부였다. 단장실에서 아버트가 틈틈이 공부를 가르쳐 준 덕분에 아나샤는 날이 갈수록 똑똑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리온의 증세도 심각해져 갔다.
“있지, 크리스. 아샤가 나중에 커서 훌륭한 학자가 되려나 봐……. 단장님께서도 아샤가 다른 또래에 비해 똑똑한 것 같다고 칭찬하시고. 어제는 간단한 시험을 봤는데 세 개밖에 안 틀려온 거 있지?”
“그래. 열 개 중에 세 개 틀렸지.”
크리스는 포기한 얼굴로 담담히 중얼거렸다. 중증도 이런 중증이 없었다.
아샤가 뭐만 해도 ‘우리 아샤 천재인가 봐.’를 시작으로 칭찬을 늘어놓기 바쁜 이 딸 바보가 진심으로 성가셨다. 뭐 한두 번이어야지.
“돈 열심히 모아서 나중에 우리 아샤 아카데미 입학시킬 거야. 중등부부터는 평민도 받는다고 하니까.”
“너… 정말 아카데미에 보내게? 열세 살 때 입학한다 치면 못해도 6년은 떨어져 지내야 될 텐데?”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방학이라는 것도 있다니까, 일 년에 두 번은 볼 수 있을 테니 아예 못 보는 것도 아니고.”
리온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있잖아. 이런 소리 해서 미안하지만…, 아샤 생각은 어떤지 물어봤어? 내가 보기엔 아샤는 공부에 관심이 없어 보여. 오히려 연무장에서 기사들 따라서 훈련받을 때 제일 열심이던데.”
흙투성이가 되도록 연무장을 뛰어다니는 것도 모자라 기사들과 힘겨루기를 한답시고 달려들기까지 했다. 요즘엔 단검 던지기를 기사들한테 배워서 과녁이 된 나무가 단검투성이가 되어있을 지경이었다.
어린애라 체력이 남아돌아 그러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크리스가 봤을 땐 아나샤는 얌전히 앉아 공부하는 타입은 전혀 아니었다.
“어쩌지, 공부도 잘하는데 운동신경마저 좋으면… 나중에 학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될지도. 원래 천재는 어릴 때부터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다잖아. 역시 우리 아샤는 천재인 게 아닐까…….”
정말 그런 것 같다며 심각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크리스는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기사단에서 매년 빠지지 않는 중요한 행사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아나샤의 생일이었다. 아나샤의 태어난 날을 정확히 알 수 없어 아나샤가 기사단에 처음 온 날을 생일로 정한 것이었다.
아나샤는 생일이 좋았다. 신나게 연무장에서 뛰어놀고, 방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선물을 받고, 맛있는 것을 실컷 먹는 날이었으니까.
그리고 늘 저녁부터 나가 다음 날이 되어야 오는 리온이 밤새 곁에 있어주는 날이기도 했다.
“아샤, 이제 눈 떠도 돼.”
리온의 등에 업혀있던 아나샤는 눈을 떴다. 시원한 바람이 앞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작은 빛들이 쏟아지듯 눈 안으로 들어왔다.
아나샤는 탄성을 내질렀다. 수도 저 멀리까지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자신이 있는 것도 신기한데, 온 세상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별들이 아래로 내려온 것만 같았다.
리온은 아나샤를 근처의 널찍한 바위 위에 내려주었다. 좀처럼 야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나샤의 모습에 그는 미소 지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이런 멋진 곳은 어떻게 알아낸 거야?”
“다 방법이 있지.”
“역시 리온은 대단해!”
잔뜩 상기된 얼굴로 아나샤는 외쳤다. 오늘 받은 선물들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든다며 흥분해 조잘대는 아이의 말에 리온은 푸스스 웃었다.
뒤늦게 웃음을 그친 리온은 아나샤를 돌아보았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동자 속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앞으로 네가 자라면서 많은 걸 보게 되겠지만, 항상 이 풍경처럼 아름다운 것만 보길 바라. 아샤.”
“…….”
“아홉 살 생일 축하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나샤는 리온의 품에 와락 안겼다. 머리에 손을 얹은 그는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샤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뭐든 이루어지게 같이 소원 빌까?”
“나 이미 정했어.”
“정말? 섭섭한걸.”
대체 무슨 꿈이기에 자기한테도 말 안 해주고 꽁꽁 숨겨두었냐며 리온이 살짝 몸을 간질였다. 간지럼에 약한 아나샤가 꺄르륵대며 뒤로 넘어가자 그제야 그는 간지럼을 멈추었다.
“그래서 정말 나한테 얘기 안 해줄 거야?”
“아니, 나 있지.”
뜸을 들이던 아나샤가 별안간 작은 주먹을 움켜쥔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 리온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뭐……?”
학자든, 기사든, 멋진 꿈이 나오리라 예상하고 있던 리온은 당황스러웠다. 나처럼이라니? 그런 의문 어린 눈길에 아나샤는 다시 한번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크면 첩자 할 거야.”
“…첩자라니.”
예상과는 다른 리온의 반응에 아나샤는 놀라 입을 다물었다. 한 번도 자신의 앞에서 인상을 쓴 적이 없던 리온이 미약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곧 그것을 알아차린 리온은 애써 얼굴을 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나는 찬성 못 해. 네가 이 직업이 어떤 일인지 몰라서 그래. 절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훌륭한 직업이 아니야. 오히려…….”
인정은커녕 괄시를 받으면 모를까. 같은 기사단 동료들은 자신의 노고를 이해해 준다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