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사랑에 빠질 때-35화 (35/87)

35화

리온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뒤로 미루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가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다들 네놈 언제 오나 걱정했어. 지금이라도 식당에 가서 얼굴 비치지 그래?”

“그럴까?”

조금은 당황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던 리온이 먼저 걸음을 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크리스가 뒤따라오지 않자 다시 걸음을 멈췄다.

왜 같이 안 오냐고 의문을 띠는 눈길에 크리스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방 문고리를 잡았다.

“너 식당 내려갔다 오는 동안 방에 앉아있게.”

“…굳이? 그냥 같이 내려가서 식사하지 왜.”

“아니 난 이미 먹어서.”

“같이 내려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느새 다가온 리온이 크리스의 앞을 가로막듯이 섰다. 방문에 들어가지 못하게 제지하는 행동에 크리스는 역시나 하고 눈썹을 꿈틀거렸고 말이다.

“너 뭐 숨기는 거 있지?”

“…….”

“날 속일 생각 마라. 내가 이래 봬도 한때 독심술사라 불렸던 사람이야.”

방에 들어가려는 자와 막는 자의 끈질긴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2분간의 사투 끝에 승리는 결국 크리스가 가져갔다.

“대체 이 방에 뭘 숨기고 있길래, 우억!”

문을 열어젖힌 크리스는 침대 위에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는 크게 눈을 떴다.

“뭐, 뭐야! 저 애는, 읍.”

“쉿.”

어느새 뒤에서 크리스의 입을 틀어막은 리온이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두 사람은 방 한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러니까… 산속에 버려진 이민족 애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이 말이야? 그것도 아무도 몰래?”

긴 이야기를 들은 크리스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리온을 바라보았다.

“너 미쳤어? 아버트 단장님이 알면 어쩌려고, 기사단에 애를…….”

“부탁할게. 제발 한 번만 모른 척해주라.”

리온은 두 손을 쥐었다 펴며 크리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를 살려준 아이야. 이 아이가 없었더라면… 나뿐만 아니라 다들 그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몰라.”

모든 얘기를 전해 들은 크리스로서는 리온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었어도 일단은 아이를 이곳으로 데려왔을 테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아이는 내가 책임지고 키우고 싶어.”

“뭐? 미쳤냐?”

단순히 임시로 보호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자신이 키우겠다고 싸고도는 친구의 모습에 크리스는 이마를 짚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어린애였다.

스물한 살 남자가 혼자서 애를 키우겠다니, 이 무슨 생뚱맞은 소리란 말인가.

“나도 처음엔 수도까지만 보호할 생각이었어. 수도 고아원에 맡기거나 좋은 부모를 찾아줘야겠다고 말이야.”

“…그럼 그렇게 하면 되잖아?”

“그런데, 도저히 다른 곳에 보낼 수가 없었어. 나만 보고 여기까지 따라온 아이인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 손에 맡기려니까 힘들더라.”

“……하.”

“그리고 나도 이제 이 아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고.”

“무슨 소리야. 고작해야 얼마나 봤다고, 길어봐야 한 달 본 애를…….”

“나만 보면 안심하고 웃는 아이인데 어떻게 나한테서 떨어뜨려. 현실적으로 좋은 집에 입양을 보낸다 해도 거기서 아이가 정말로 행복하게 자랄지 확신할 수도 없고. 그리고 이민족 출신인 걸 알면 더 배척받을 텐데…….”

아이를 볼 때면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더더욱 아이를 다른 곳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열악한 시설의 마을 고아원에서 배를 곯으며 지냈던 기억. 부유한 가정에 입양이 되었지만 끝내 학대를 받고 거리로 도망쳐 나왔던 기억. 그 뒤의 삶이 어땠는지는 돌이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좋지 않은 기억뿐이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보호자 하나 없던 이 세상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리온은 아이를 다른 곳에 보내는 것이 망설여졌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네 나이에 양녀를 들인다는 게 쉬운 결정도 아니고.”

“…리온?”

그때였다. 침대 위에서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조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떠지는 눈을 비비면서도 리온을 찾으려고 몸을 일으키자 리온은 곧장 아이에게로 달려갔다.

“더 자지, 왜 벌써 일어났어? 응?”

아이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는 모습이 거의 애 아빠에 가깝다고 크리스는 여겼다. 한동안 그 광경을 동떨어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

어느새 아예 잠에서 깬 것인지 아나샤는 말똥말똥 뜬 눈으로 크리스를 응시했다. 그러곤 리온에게 저게 뭐냐고 묻듯이 짧은 손가락으로 크리스를 가리켰다.

“아 저건 크리스. 크리스라고 하는 내 친구야.”

“저거라니…….”

크리스가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키리스?”

“크리스.”

“크리스!”

“쉬잇.”

“…쉿!”

코앞에 검지를 갖다 댄 리온을 똑같이 따라 하며 아이가 방싯 웃었다. 그 모습을 투명 인간처럼 지켜보고 있던 크리스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리 말해두지만 난 안 도와줄 거야.”

서로를 마주 보고 있던 둘은 그제야 크리스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뚫어져라 쏘아져 오는 아이의 똘망똘망한 눈빛을 외면하듯이 크리스는 고개를 돌리며 재차 말했다.

“애를 몰래 키우든 말든 신경 안 쓰겠지만, 진짜 안 도와줄 거야. 애 돌봐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면 접어둬라. 나는 아무것도 못 봤어. 아무것도 모른다고.”

자신까지 휘말리게 하지 말라는 경고는 단호했다. 하지만 옆얼굴을 뚫을 듯이 빤히 이어지는 눈빛도 만만치 않았다.

한동안 아이의 눈길을 애써 모른 척하던 크리스는 결국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 번만이야. 진짜로!”

“고마워, 크리스.”

“우아!”

무슨 상황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함께 기뻐하는 아이의 모습에 크리스는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색도, 눈동자색도 전혀 다르게 생겼으면서 어째 웃는 얼굴은 둘이 판박이처럼 똑같다 여기며 말이다.

6장 리온 (2)

리온과 크리스, 두 사람만의 비밀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사단장과 부기사단장을 제외한 기사단 전원에게 아이의 존재를 들키고 만 것이다.

나름 조용조용히 지낸다 해도 한계가 있었다. 리온의 옆방 기사들을 시작으로 비밀을 알아챈 공범들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결국 모르는 이가 없어지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기사들 전원 모두 비밀을 지켜주기로 결정했다는 거였다. 아이의 딱한 사정과 그런 아이를 거둔 리온의 결정을 이해해 준 것이다.

리온의 일상은 아나샤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낮에 눈을 뜨면 아이의 식사부터 챙겼고 목욕을 시켜주고 옷을 갈아입혔다. 저녁에는 옆에서 책을 읽어주며 아이를 재우고 밤샘 임무를 나갔다.

최대한 아이가 외로워하지 않게 일어나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함께 있으려 노력했지만, 가끔 임무가 며칠 동안 이어지는 날에는 어쩔 수 없이 크리스에게 아이를 부탁해야 했다.

물론 크리스도 하루 종일 아이를 돌봐줄 수가 없었기에 나머지 시간은 아나샤 혼자 방 안에 남아있어야 했다.

“미안해, 아샤. 오늘도 혼자 있게 했지?”

“…….”

최대한 서둘러 돌아온 것이었지만 이미 늦은 밤이었다. 리온은 침대 위에서 볼을 부풀린 채 앉아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임무 안 나가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졸리면 자고 있어.”

단단히도 삐친 모양인지 아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리온은 난감한 얼굴로 욕실로 들어갔다. 방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아무리 검은 옷이래도 먼지와 피로 얼룩져 있는 것을 아이에게 보이는 것은 좀 그러니 말이다. 첩자복을 벗어 빠르게 빤 그는 혹시라도 피비린내가 배었을까 몸을 여러 번 씻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아직까지도 침대 위에 앉아있는 아이가 보였다. 이제는 부루퉁하게 입까지 튀어나와 있었다.

“아샤, 안 잘 거야?”

“…….”

“그럼 어쩔 수 없네. 오랜만에 무릎베개 해주려고 했는데…….”

언제 돌처럼 꿈쩍 않고 있었냐는 듯이 아이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무릎베개 해줘!”

자신의 무릎 위에 그대로 냅다 엎어지다시피 눕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리온은 미소 지었다. 토닥토닥 아이의 몸을 도닥여 주는 동안 어느새 졸음이 몰려왔다. 그는 눈을 감았다. 평온한 밤이었다.

* * *

아나샤가 기사단에 온 지도 약 세 달이 지났다. 리온의 방은 기사들의 필수 방문 코스로 자리 잡았다.

“이거 봐라~ 삼촌이 뭐 사왔게?”

“와아아!”

오늘도 리온의 방에는 훈련을 마친 기사들이 몰려와 있었다. 선물로 받은 토끼 인형을 안고 신나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아이의 모습에 기사들은 저마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샤는 누구 삼촌이 제일 좋다고?”

“마브릭 삼촌!”

“야 치사하게, 선물은 또 언제 준비했대. 아샤야 여기도 삼촌 있다~”

“하나같이 덩치만 커서는! 좀 비켜봐, 애 간식 좀 먹이게.”

“그만 먹여 이 자식아. 너무 많이 먹이면 이따가 저녁을 못 먹잖아!”

기사들이 아나샤와 놀아주는 동안 리온은 밀린 집안일을 처리해 나갔다. 차곡차곡 아이 옷을 개는 리온의 옆에 앉아 정신없는 광경을 바라보던 크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만간 그의 입이 열렸다.

“돈은 좀 모였어?”

“어느 정도는. 앞으로 한 반년 정도만 더 모으면 수도 외곽에 작은 집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리온은 아나샤와 단둘이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돈을 모으는 중이었다. 일단 아이를 키우려면 제대로 된 집이 필요했다. 이왕이면 아나샤가 맘껏 뛰어다닐 수 있는 마당이 딸린 집이면 더 좋겠다고 리온이 생각할 때였다.

“야, 도움 필요하면 말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안 그래도 이미 많이 도움받고 있는걸.”

리온은 작게 미소 지으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친구한테까지 빚져서야…….”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 문밖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무겁게 울리는 발소리와 따라붙는 여러 개의 발소리들은 다급했다.

기척을 알아차린 방 안의 기사들은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문 앞에서 여러 개의 발소리가 뚝 끊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