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제 말을 제대로 이해한 건진 모르겠지만, 이틀 전에 배운 ‘응’으로 열심히 대답해 주는 아이가 예뻐 리온은 푸스스 웃었다.
“너는 참 씩씩하구나?”
“……?”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던 걸까…….”
“응!”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씩씩한 대답에 리온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돼. 아나샤.”
“응!”
“아니면 나랑 빨리 대화가 하고 싶은 거야?”
감자 부스러기가 묻은 입술 주변을 천으로 문질러 닦아준 리온은 아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오늘도 단어 공부 할까?”
“응!”
낙엽을 깔아놓은 땅 위에 모포를 깔고 그 위에 아이를 눕힌 리온은 자신의 로브와 여분용 모포를 아이의 몸에 덮어주었다. 잠들기 전 리온은 하늘, 달, 별, 땅, 나무 등 보이는 것을 가리키며 단어를 알려주고 있었다.
“저건 뭐였지?”
“별!”
“저건?”
“나무!”
“그럼 저 위에 있는 건?”
“우우움… 하누? 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답을 내놓는 아나샤의 모습에 리온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답은 하늘이야.”
하고 말해주자 백점을 못 맞아 아쉬운지 아이는 작게 볼을 부풀렸다.
그래도 잘했다고 말해주려는데, 그 전에 짧은 손가락이 뻗어져 왔다. 콕 하고 리온의 뺨에 손가락이 닿기 무섭게 아나샤가 외쳤다.
“리온!”
“푸흡.”
이건 꼭 맞힐 수 있다는 듯이 당찬 목소리가 귀여워 차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소리 내어 웃던 리온은 손을 들어 작은 머리에 손을 얹었다.
“맞아. 아나샤는 똑똑한걸?”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이가 방긋 웃었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아이는 어느새 졸린지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졸려? 이제 잘까?”
“…응.”
리온은 아이가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켰다. 배를 토닥이던 그는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머리에 검은 두건을 눌러쓴 그는 가직한 곳에 있는 거대한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무의 꼭대기에서 혹시라도 기척을 숨긴 채 접근해 오는 적은 없는지 아래를 살폈다.
이 근처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곧바로 조용히 처리할 생각으로 무기를 꺼내 들었으나, 다행히 동이 터올 때까지 수상한 인기척은 없었다. 불침번 외에도 다른 기사들이 하나둘 깨어나는 것이 보이자 리온은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아이의 옆에서 잠시나마 눈을 붙였다. 이대로 수도에 복귀할 때까지 아무 일이 없기를 기도하며 말이다.
* * *
식량은 점차 떨어져 가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산맥을 따라 움직인 지 벌써 보름이 다 되어갔으나 이민족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기사들 모두 지친 기색을 보였으나 이 작전의 총책임자 허드슨은 계속해서 수도 복귀를 미루었다.
“겨울 산에서 식량을 얻을 수 없을 테니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 같습니다.”
“멀리 가지 못했을 거다. 적어도 어디로 숨었는지 찾아내야 될 거 아닌가.”
“초기 작전 목적은 발견된 이민족들을 이 산에서 몰아내는 것이지 그들의 토벌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책임자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허드슨이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총책임자인 내 명령을 무시하겠다는 건가?”
“…아닙니다.”
허드슨이 선두에서 말을 몰자 기사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리온은 맨 뒤에서 아이와 함께 말을 탄 채 움직였다. 얼마나 멀리 왔을까, 말을 타고 달리기 힘든 경사진 절벽이 나오자 선두에 있던 허드슨이 말에서 내려섰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간다.”
근처 나무에 말을 묶어두고서 기사들은 낭떠러지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끝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득한 절벽 아래가 두려운 듯 기사들이 하나같이 진지하게 굳은 얼굴일 때, 리온의 품에 안긴 아이는 눈만 말똥말똥 뜬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섭지 않아? 무서우면 눈 꼭 감고 있어.”
어려서 두려움을 모르는지, 아니면 이런 길을 자주 지나다녀서 익숙한 건지 아이는 덤덤해 보였다. 리온은 어찌 됐든 아이가 울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여기서 울었다면 보나 마나 아이를 버리라는 말이 나왔을 테니 말이다.
한 시간가량 절벽 길을 지나자 더 험준한 산길이 이어졌다. 바위와 나무가 우거진 깊은 산골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다들 숙여요!”
리온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기사 두 명이 화살에 맞았다. 그중 한 명이 치명상을 입고 쓰러지자 더욱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대열을 벗어나지 마라!”
허드슨의 외침에도 기사들은 적을 찾아 베기에 바빴다. 그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도 리온은 부상을 입은 기사를 챙겼다. 이민족의 아이를 챙길 여유가 있냐며 비꼬았던 기사들 중 한 명이었으나 리온은 그를 어깨동무를 한 채 최대한 먼 곳까지 그를 옮겼다.
기사를 나무 밑에 앉히고서 그는 아나샤를 그의 옆에 숨기듯 내려놓았다.
“아이를 부탁합니다.”
“…….”
피가 흘러나오는 배를 꾹 쥔 채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온은 다시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상황은 더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고작해야 열 명의 기사들 중 반이 부상을 입었고, 설상가상으로 허드슨은 이민족의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사내에게 붙잡혀 무릎이 꿇린 채였다.
날카로운 날붙이를 목에 가져다 댄 채 위협해 오는 이민족들의 모습에 나머지 기사들도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열 명 모두 포위당한 상황을 숨어서 지켜보던 리온은 조용히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잘게 떨리는 손끝을 억누르며 그는 근처에 있던 이민족 사내의 목 뒤를 찔렀다. 곧바로 달려드는 다른 이민족들을 단도 하나로 해치웠으나 홀로 수십 명을 해치우기엔 무리가 있었다.
결국 리온마저 붙잡혀 땅에 처박히게 되었다. 머리를 짓밟힌 그가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일어난다 해도 이미 무기를 빼앗겨 싸울 수도 없었다.
‘이렇게 죽게 될 줄은 몰랐는데…….’
허탈한 기분을 느끼며 리온은 눈을 감았다. 삶에 미련은 없었지만, 문득 죽기 전에 떠올릴 만한 부모도, 가족도 없다는 사실에 가슴 한편이 허전했다.
제 죽음을 슬퍼해 줄 사람은 동료들뿐인가. 그렇게 생각할 때, 멀리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리온은 눈을 떴다. 설마, 하고 옆으로 눈동자를 굴리자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아이가 보였다. 눈물로 푹 젖은 작은 얼굴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더 서럽게 구겨졌다.
“아나샤! 이쪽으로 오면 안, 큭……!”
머리 위에서 강하게 내려찧는 발힘에 리온은 다시 한번 고개를 처박혔다. 차갑게 언 흙바닥을 긁으며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이었다.
“윽!”
이민족 사내가 갑작스레 고통을 호소하며 주춤거렸다. 달려든 아나샤가 그대로 남자의 팔을 힘껏 문 것이다.
리온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일으켜 다리에 걷어차이기 직전의 아나샤를 끌어안았다. 품 안에 아이를 감싼 채 구른 그는 바닥에 버려진 검을 쥐었다.
리온은 빠르게 몸을 일으켜 이민족들을 향해 검을 겨눴다. 한 번도 장검을 다뤄본 적이 없어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와 이민족 간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를 때였다.
“흐… 끄윽…….”
그의 품속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껏 꾹 억누르고 있던 설움이 터져버린 건지 아이의 울음소리는 더더욱 커져가기 시작했다.
조용한 산속을 쩌렁쩌렁 울리는 울음소리에 리온은 검도 내려두고 아나샤를 달래야만 했다. 아이를 안아 들고 이제 괜찮다며 등을 토닥였지만 그동안 겪어온 공포스러운 상황 속에서 안도하기란 쉽지 않은지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때였다. 이민족의 우두머리가 돌연 무기를 내린 것은. 그가 무어라 말하자 이에 다른 이민족 사내들도 하나둘 무기를 거두었다. 인질로 삼고 있던 허드슨을 팽개치듯 내버려 둔 채 빠르게 그 자리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목숨을 건진 기사들은 하나같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혹여라도 다시 공격해 올 것을 대비해 서둘러 무기를 주워 부상자들을 챙겼다.
리온은 자신의 품에서 겨우 울음을 그친 아이를 살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리온은 이민족들이 무기를 거둔 이유가 아나샤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버린 아이에 대한 죄책감에서인지, 단순히 아이의 울음소리에 마음이 약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작은 아이가 자신들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 * *
황실 제5기사단, 기사 견습생 크리스는 지친 몸을 이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엄격하기로 유명한 단장 아버트가 직접 훈련을 지도해 오늘은 더더욱 죽을 맛이었다.
뻐근한 팔을 간신히 움직여 식사를 하던 크리스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었다.
“리온 그 녀석은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야?”
“다른 기사단 녀석한테 들어보니까 다들 어젯밤에 도착했다던데? 방에서 쉬고 있는 거 아냐?”
약 한 달 전 북방의 산맥으로 떠났던 리온이 돌아왔다. 그 반가운 소식에 크리스는 속으로 안도하면서도 괜스레 투덜거렸다.
“참 나,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지. 꼭 내가 먼저 찾아가야 된다니까.”
“쉬게 놔둬. 고생 많이 한 것 같던데. 이민족에게 포위당하고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는 얘기가 있…….”
“뭐?!”
크리스는 쾅 하고 식탁을 내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다른 기사들이 말릴 새도 없이 빠르게 식당을 벗어난 그는 기사단 숙소로 향했다.
익숙한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자 한참 뒤에 문이 열렸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살이 더 빠져 보이는 옅은 금발의 남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크리스. …무슨 일이야?”
리온은 곧바로 문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무슨 일? 섭섭하게시리, 왔으면 말을 해야 될 거 아냐.”
“아 미안. 피곤해서… 오자마자 바로 누워서 자느라.”
“그보다 어디 다친 곳은? 이민족들한테 포위당했다면서? 사실이야?”
“다친 곳은 없어. 말하려면 길어서, 나중에 얘기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