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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33화 (33/87)

33화

어떤 이유든 아샤에게 상처를 주면 기사단 삼촌들이 합심해 너를 부수겠다, 라는 의미의 경고도 담긴 말이었다. 크리스는 큼 하고 목을 한번 가다듬었다.

“그때는 이런 일을 겪었으니 첩자 일은 두 번 다신 못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아버트 단장님도 방에 틀어박혀 있는 아샤에게 억지로 리온의 뒤를 맡을 필욘 없다고, 언제든 첩자 일을 관두고 평범하게 살아가도 된다고 얘기했었죠.”

예전 일을 떠올리니 크리스는 괜히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다 여겼다.

“그랬더니 다음 날 바로 아샤가 방에서 나오지 뭡니까.”

꼴이 말이 아니어서 기사단이 한바탕 뒤집어지고 난리도 아니었었다. 안 그래도 바짝 마른 애가 거의 다 죽어가는 꼴로 나왔으니 말이다.

먹여야 될지, 재워야 될지, 의원부터 불러야 될지 몰라 허둥대는 기사들 사이에서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자기는 계속 첩자 일을 할 거라고 말하던 아샤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했다.

“어느새 기운을 차리더니 리온 녀석 뒤를 이어서 첩자 일도 다시 시작했죠. 처음엔 걱정밖에 안 들었는데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임무도 잘해내고, 평소처럼 장난도 잘치고 잘 지내니까 어느새 걱정도 사라졌었죠.”

“…….”

“한동안 괜찮아 보여서 괜찮은 줄 알았더니만…….”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쉰 크리스는 창문 밖을 응시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스쳐가는 풍경만 바라보고 있을 때, 여태껏 조용하기만 하던 맞은편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샤 경이 어렸을 때부터 봐왔었다고 했던가.”

“그렇죠. 아샤가 요만했을 때 기사단에 왔으니 커가는 모습을 다 지켜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서로 아샤를 키웠다며 싸우는 놈들과 동류가 되고 싶지는 않다지만, 아샤의 가장 친한 삼촌이라는 자부심은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리온의 가장 친한 친구가 자신이었으니 친삼촌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녀에 대한 얘기를 더 듣고 싶다.”

어쭈, 요것 봐라? 하는 눈으로 크리스는 맞은편 사내를 바라보았다. 늘 타인에겐 관심 없다는 듯 침묵만 고수하던 남자가 아샤에 대해 알고 싶다고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이 괘씸하면서도 썩 나쁘진 않았다.

“큼, 가는 길이 머니 얘기해 드리죠.”

달리는 마차 안에서 그렇게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 *

차가운 칼바람이 불어대는 거대한 나무 위. 까마득하리만치 높은 곳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온통 검은 복장의 남자는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래를 둘러보다가 멀리서 다가오는 열 명의 기사들을 발견했다. 눈 아래까지 검은 천을 끌어 올린 리온은 재빠르게 나무를 타고 지면 위에 내려섰다.

착, 하고 가벼운 발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그의 앞으로 말을 타고 다가온 남자가 입을 열었다.

“발견한 거라도 있나?”

“아뇨. 이 주변엔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한다.”

제8기사단 단장, 허드슨의 말에 기사들은 야영 준비에 들어갔다. 뿔뿔이 흩어진 기사들을 뒤따라 리온도 땔감으로 쓸 나뭇가지를 줍기 위해 산속을 걷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부족하다고 욕먹진 않겠지.’

리온은 두 팔 가득 들린 나뭇가지들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제법 깊은 곳까지 들어온 건지 사위가 조용했다. 다시 돌아가기 위해 한 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멀리서 부스럭거리는 아주 작은 기척을 잡아낸 그는 걸음을 멈췄다. 안 그래도 식량이 거의 떨어져 가던 중이었다. 들짐승이면 잡아서 저녁 식사 재료로 써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기척을 죽이고 빠르게 도착한 그곳에는 예상했던 들짐승은 없었다.

“아이……?”

너무나도 예상 밖의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작디작은 체구는 얼마나 말랐는지 뼈만 앙상해 보였다. 산발처럼 엉킨 긴 머리와 오랫동안 빨지 않은 듯한 옷은 까만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단순히 산속에 길을 잃고 헤맨 아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착잡한 생각으로 이어지려 할 때, 자신을 멍하니 보고 있던 아이가 움찔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리온은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몸을 낮추고 자신의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끌어 내렸다. 어두운 천에 숨겨져 있던 연한 금색 머리칼이 어둠 속에 드러나자 아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음, 이러면 조금 더 안심될까?”

“…….”

“이름이 뭐야? 난 리온이라고 하는데.”

리온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리온.”이라고 천천히 얘기해 주었다.

이에 조금은 경계심을 낮춘 듯 보였지만 입술만 오물거리는 아이의 모습에 리온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혹시 소리를 못 듣거나 말을 못하는 건가? 하는 생각으로 기울었을 때였다.

“…샤.”

들려온 작은 목소리에 리온은 귀를 기울였다.

“아…나샤.”

그를 따라 하듯 작은 손가락을 펴 자신을 가리키며 아이가 말했다.

리온은 아이가 제국어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이 산 근처에는 인가가 없었다. 말을 타고 꼬박 하루를 달려야 나오는 영지밖에 없다는 것과 생소한 억양의 이름을 생각한다면 아마 이민족의 아이인 것 같았다.

동시에 이민족에 대해 스치듯 들었던 정보 몇 가지가 떠올랐다.

이민족은 보통 겨울이 다가오면 식량을 아끼기 위해 체구가 왜소한 여자아이들을 버리는 풍습이 있다고 들었었다. 남자아이는 힘을 쓸 수 있으니 키우지만, 여자아이의 경우 자식을 낳기에 적합해 보이지 않으면 밖에서 죽게 만든다고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리온은 눈앞의 아이가 안쓰럽기만 했다. 리온은 품속에 지니고 있던 주머니에서 견과류와 건과일 조각 몇 개를 꺼내었다.

아이는 언제 경계했냐는 듯이 곧바로 리온의 앞으로 다가와 그 자리에서 야금야금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굶었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배를 채운 아이는 아예 경계를 허문 채로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기까지 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그 뒤를 따라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같이 갈까?”

리온은 먼저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껏 모은 나뭇가지들 중 반은 땅바닥에 내려두고 나머지 반을 한 팔에 안아 들었다. 그리고 반대 손으로는 작은 손을 잡은 채 진영으로 돌아왔다.

역시나 눈길은 마냥 따스하지만은 않았다. 아이에게 쏘아지는 차가운 눈길들에 리온은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같은 기사단의 동료라면 어떻게든 설득해 보겠지만 하필이면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각기 다른 기사단에서 차출된 기사들이었다. 리온은 아이를 따뜻한 불가에 앉히고서 작전부대의 총책임자인 허드슨 앞에 섰다.

“그래서, 저 아이는 뭐지? 리온 라이나 경.”

“산속에서 발견했습니다.”

“보나 마나 이민족의 아이겠군.”

“네.”

리온은 한번 숨을 고른 뒤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제가 보호하고 싶습니다.”

“설마 저 이민족 애를 데리고 가겠다는 건가?”

“이런 산속에 두고 갔다간 어떻게 될지 아시지 않습니까?”

“동정심에 호소하는 건가? 이민족을 몰아내러 와서는 이민족의 아이를 거두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이 아이는 이미 이민족에게 버림받은 아이입니다.”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으나 리온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어린아이입니다. 이 산속에 두고 갔다간 짐승에게 잡아먹히거나,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일밖에 더 있겠습니까?”

약자를 보고도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기사도에 어긋나는 일이지 않느냐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그것을 꼬집고 있는 말이었다.

“제가 책임지고 보살피겠습니다. 절대 작전에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당연한 소릴. 쯧… 절대 작전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도록.”

“네. 명심하겠습니다.”

탐탁지 않은 얼굴로 마지못해 허가한 허드슨이 등을 돌렸다. 리온은 그가 사라질 때까지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아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 * *

예상한 일이었으나 이민족 아이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기사는 없었다. 리온은 진영에서 조금 떨어져 따로 아이를 챙겼다.

원래도 첩자 신분 때문에 다른 기사단 기사들과 섞이지 못했기에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이와 단둘이 다니는 상황이 편하기까지 했다.

각 기사단의 정예들만 모인 가운데 출신 성분을 알 수 없는 첩자가 그들과 같이 행동하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겉도는 것은 당연했다.

황실의 기사라면 한 벌쯤 소지하고 있을 제복도 리온에게는 없었다. 첩자라는 특수한 직업이기에 정식 기사 작위조차 없었으나, 기사단 소속이기에 경의 호칭으로 불리기는 했다.

그것이 마음에 안 든 것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묘하게 배척하는 듯한 시선을 못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리온은 대부분 시간을 그들과 동떨어져 움직였으나 문제는 배식을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

“한 사람마다 한 개씩이야. 저 애 먹일 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그 순간 툭, 하고 누군가가 리온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언제 이민족의 기습을 받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 팔자 좋군.”

리온이 입을 다물자 다른 기사 하나가 이죽이듯 말했다. 리온은 인상을 찌푸린 채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몫의 찐 감자를 손에 쥐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배고팠지? 아나샤.”

리온은 감자를 아이의 작은 두 손에 쥐여주고서 얼른 먹으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매일 먹는 찐 감자였지만 아이는 음식 투정도 하지 않고 밝은 표정으로 먹어치우기 바빴다.

볼이 빵빵해진 채로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꼭 작은 초식동물 같다고 여기며 리온은 아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리온으로서는 울지도 않고, 힘들다고 보채지도 않고, 조용히 따라오는 아이가 기특하기만 했다. 오히려 자신을 보며 방긋방긋 웃기까지 했다. 예전에는 지칠 때마다 돌아갈 기사단을 생각했다면, 지금은 아이의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수도로 갈 수 있을 거야. 수도에 가면 맛있는 거 많이 먹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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