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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32화 (32/87)

32화

손이 다 낫기 전까진 심부름은 시키지 말아달라 황녀에게 따로 부탁했었기에 그녀가 다른 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황녀와 함께 있는 건가 싶어 황녀가 있는 곳으로 곧장 안내받았으나 그곳에도 그녀는 없었다.

“아샤 경은…….”

“아샤 경은 제가 따로 시킨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 상태예요.”

시녀들이 나가자마자 묻는 그에게 엘리시아는 차분히 대답해 주었다.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죠. 하지만 이번 건 어쩔 수 없었어요. 아샤 경이 원했거든요.”

“언제 돌아옵니까?”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기세로 묻는 사내를 보며 엘리시아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샤 경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이 남자 앞에서는 역시 숨길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은 돌아오지 않아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샤 경에게 비밀 임무가 내려졌어요. 오늘 새벽에 달러스로 출발했고요.”

리히르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여겼다. 그것이 아니라면 황녀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제국과 제국의 속국인 전 라오드 왕국의 국경에 위치한 지역이 달러스였다. 제국의 통치를 거부하고 도망친 라오드의 귀족들이 몸을 숨긴 지역이기도 했다.

제국은 내몰릴 대로 내몰린 그들이 스스로 고립되어 자멸하기를 기다렸으나 긴 세월 동안 상황은 반대로 흘러갔다. 범죄 세력과 내통하며 그 안에서도 세력을 키운 것이다.

2년 전, 이를 뒤늦게 알아차린 황실이 달러스에 기사들을 보내었으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달러스의 세력은 황실이 예측한 것보다 훨씬 견고했고, 라오드의 추종자들은 귀족이자 기사로서의 존엄마저 버린 채 추악한 범죄를 일삼고 있었던 것이다.

더 내몰릴 곳조차 없는 자들의 독기를 우습게 본 제국의 실수였다. 제국의 부대 하나가 전멸하고, 민간인 희생자 수가 수백에 이르자 어쩔 수 없이 후퇴한 것이 재작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금 섬멸전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 위험한 지역으로 아나샤 그녀가 떠났다고 황녀는 말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격양된 감정을 한껏 내리누른 듯 낮은 목소리는 서늘했다. 리히르트는 엘리시아를 직시한 채 억누른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직 부상이 다 낫지 않은 이에게 출정 명령을 내린 겁니까?”

“전 그저 아샤 경의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에요.”

엘리시아는 차분히 말했으나 그의 모습에 내심 놀라있었다. 도저히 그 감정 없는 사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제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가 그런 부탁을 했을 리가…….”

“저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요. 하지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에요.”

리히르트는 무겁게 입을 다물었다.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그녀가 달러스로 간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 더 이상 황녀를 붙잡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리히르트는 급히 황녀궁을 나섰다. 어째서 그녀가 그곳으로 향한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과 어제만 하더라도 그녀는 평소와 같았다. 자신이 무엇을 놓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내지 못하던 중 문득 어제 본 점괘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미 각오했던 것일까. 그래서 크게 다칠 거란 불길한 점괘에도 아무 의문 없이 넘어갔던 것일까. 다칠 것을 알고도 그곳으로 향했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깊게 고민하는 동안에도 그는 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움직여 그가 도착한 곳은 황태자의 집무실이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근위병들을 지나쳐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업무를 보고 있는 에르디온을 향해 다가갔다.

“부탁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에르디온은 책상 바로 앞에 멈춰 선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목소리에서 이미 누군지 눈치챘으나 막상 마주한 얼굴에 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평소의 차분함은 온데간데없이 옷깃과 머리칼을 흩트리고 서있는 사내는 정말이지 다른 사람 같았던 탓이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건지 용건부터 듣지.”

“달러스에 저를 투입시켜 주십시오.”

“…이것 참 갑작스러운 부탁이군.”

진중한 눈빛의 기세가 도저히 가벼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부탁이라는 말을 쉬이 입에 담을 위인이란 말인가. 에르디온은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미 제2기사단에 작전 지휘권을 넘겨주었지 않나? 지난번 회의에 참석한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독단으로 움직이려 합니다. 허가해 주십시오.”

“…혼자서 말인가?”

더더욱 그의 생각을 알 수 없다는 듯이 에르디온은 눈썹 끝을 일그러뜨렸다. 갑작스러운 건 그렇다 쳐도, 무슨 일이기에 당장 안 떠나면 죽을 사람처럼 이렇게 조급하게 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당황스럽긴 하지만 알겠어. 공이 참전한다면 기사들의 사기도 높아질 테니까. 다만 단독으로 움직이기 전에 제2기사단 단장과 미리 상의해 두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리하겠습니다.”

“그보다 내게 개인적으로 부탁을 다 하고 말이야.”

그간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욕심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굴던 자가 이런 부탁을 해오니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르디온은 다시 봤다는 듯이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무엇 때문에 자네가 이렇게 조급하게 구는지 궁금하지만, 이건 나중에 천천히 듣도록 하지.”

* * *

리히르트는 곧바로 기사단으로 돌아왔다. 모든 업무를 부단장 칼리프에게 위임하고 막 떠날 채비를 갖췄을 때였다. 단장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단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누구지?”

“크리스 벨덴이라고 합니다.”

뒤늦게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자 크리스는 문을 열었다. 짐짓 무거운 분위기로 들어선 그는 더 무거운 분위기로 서있는 백금발의 사내를 발견하곤 그대로 굳어버렸다.

성가시게 누구냐는 듯 노려보는 서슬 퍼런 눈은 흉흉하기까지 했다. 크리스는 금방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오히려 기사단장의 기세에 밀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뭐 때문에 저렇게 기분이 안 좋은진 몰라도 이쪽도 만만치 않게 기분이 좋지 않은 참이었다.

밤새 두 사람의 관계를 추측하느라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내려앉았을 정도니 말이다.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질문이긴 합니다만 아샤 경의 보호자나 다름없는 입장으로서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당장이라도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것을 크리스는 간신히 참아내었다. 둘 다 성인이고 어련히 잘하겠거니 싶어도 아샤를 어릴 때부터 봐왔던 입장으로서는 불안한 게 사실이었다.

나이 차도 나이 차지만 둘 사이엔 어마어마한 신분 차가 있었으니 말이다. 귀족이 평민과 진지한 연애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공작이었다.

“사실 어제 아샤와 데이트하시는 걸 우연히 봤습니다. 아샤와 정말 진지하게 미래를 약속하고 만나시는 겁니까? 그런 게 아니라면, 저는, 전 이 관계를 도저히 인정할 수가!”

“크리스 벨덴 경.”

눈을 부릅뜬 채 강경하게 외치려던 크리스는 지나치게 낮은 목소리에 흠칫 정신을 되찾았다.

“아샤 경이 비밀리에 달러스의 잠복 임무를 맡은 것 같다.”

이어진 말에 크리스는 잠시 제 귀가 잘못되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맞은편에서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서있는 기사단장의 모습에 제가 옳게 들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왜 그곳에 간 건지 짐작 가는 것이라도…….”

“이런 미친…, 달러스라고 했습니까? 아샤가 달러스에 갔다고요?!”

믿기 힘든 사실을 들은 사람처럼 크리스는 방 안을 빠르게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불안한 사람처럼 돌아다니던 그는 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단장님, 모든 출발 준비를 마쳤습니다.”

기사의 목소리에 리히르트가 곧장 검을 챙겨 들고 나가려 하자 크리스가 그 뒤를 따랐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리히르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허가했다. 아나샤 그녀가 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작전에 투입되기를 자청했는지 그에게서 들을 필요가 있었다.

마차에 오른 두 사람은 긴 침묵을 지켰다. 각자의 생각에 잠겨있느라 심각한 표정만 짓던 중 크리스가 먼저 운을 떼면서 가까스로 침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까 왜 아샤가 그곳에 간 것인지 물으셨죠. 거의 2년 전 일입니다. 달러스에 기사단이 투입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절로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크리스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첫 작전 때 황실 제5기사단의 기사들도 투입됐었습니다. 그리고 달러스 영지성에 기사단 소속 첩자가 잠입했었죠. 아샤 말고 아샤 위에 있던 녀석이었는데…….”

크리스는 잠시 괴로운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담담히 말을 뱉어냈다.

“그놈은 아샤를 거둬 키운 양부였습니다. 그리고 달러스 잠입 임무 중에 죽었습니다. 하필이면 지원 나간 아샤가 그 시신을 발견했고요.”

“…….”

“아샤가 달러스에 지원한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그 얘기까지 한 크리스는 잠시 긴 침묵을 지켰다. 덩달아 깊은 침묵을 지키던 리히르트는 한 가지 추측이 떠오르자 무겁게 운을 뗐다.

“혹시 그자의 이름이 리온인가.”

“단장님께서 어떻게 아시는…, 아샤가 얘기해 줬습니까?”

아직도 리온 이름만 꺼내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나샤를 알기에 크리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먼저 리온에 대해 얘기를 하다니, 생각보다 이 남자에게 푹 빠진 모양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크리스는 더 많은 얘기를 풀어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날 사건 겪고, 아샤가 정말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었습니다. 방 안에 틀어박혀서 밥도 안 먹고, 그렇게 며칠을 지냈었죠.”

“…….”

“저희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문 앞에서 죽치고 앉아서 녀석이 괜찮은지 매일 확인하고…, 다들 마음 같아선 문을 부숴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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