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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31화 (31/87)

31화

가죽 주머니 안은 1실루나 동전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의 준비성에 아나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정말 놀려고 작정하셨구나. 그런 그에게 맞춰 자신도 분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저번에 데려가고 싶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못 갔던 데가 몇 군데 있었거든요. 오늘은 다 가봐요! 제가 다 알려드릴게요!”

자신만 믿고 따라오라며 아나샤는 들뜬 얼굴로 조잘댔다. 두 사람은 곧장 시장 거리로 향했다. 환한 빛을 내는 마법 가로등은 없었지만 천막 새로 흘러나오는 불빛 때문에 더 고즈넉한 분위기가 났다.

지난번보다 사람이 적어 움직이기도 훨씬 수월했다. 아나샤는 그를 이끌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어느 작은 천막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 카드점 진짜 잘 맞거든요. 한번 볼래요?”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갈 기세인 리히르트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좁은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선 그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침묵을 지켰다.

램프 속 타오르는 작은 불씨가 밝히고 있는 천막 안은 협소하고 허름했다. 그리고 탁자 맞은편에는 칙칙한 옷차림의 노파가 앉아있었다.

“여기 앉아요.”

먼저 나무 의자에 앉은 아나샤가 옆의 작은 의자를 탁탁 두드렸다. 그가 앉자 노파는 무엇이 궁금한지를 물었다.

“앞으로의 운세를 보고 싶어서요.”

“범위가 넓은데, 먼 미래? 아니면 가까운 미래?”

“가까운 미래요.”

“그래, 그래. 일단 세 장 뽑아봐.”

노파가 섞은 카드들을 탁자 위에 길게 펼쳐놓았다. 아나샤가 한 장씩 빠르게 골라내자 노파가 바로 카드들을 뒤집어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이 카드들은 하나같이 악재를 상징하는 건데, 어떻게 이렇게 안 좋은 카드들만 나온 건지……. 몸조심해야 될 일이 하나 생기겠어.”

아, 하고 아나샤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었다. 부상 정도는 당연히 각오하고 부탁한 일이었지만 점의 결과도 안 좋게 나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자신이 그곳으로 가는 것을 반대라도 하듯이 말이다.

“안 맞길 바라야겠죠?”

하지만 이제 와 무를 생각은 없었다. 언제 입술이 딱딱하게 다물렸냐는 듯이 아나샤의 입가에는 결심처럼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우리 운세 말고 다른 것도 봐요. 연애점은 어때요?”

리히르트를 돌아보며 물었으나 대답은 그가 아닌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연애점이면 두 사람이 같이 보는 거 말이지?”

“아뇨. 따로따로요.”

“궁합 보는 거 아니었어?”

“네?! 아니에요! 저희 연인 사이 아니고 그냥 그, 친한 관계예요.”

“그래?”

노파가 의심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자 아나샤는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단장님이 옆에서 듣고 있기에 더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빨개진 볼의 열을 식히기 위해 열심히 손부채질하는 동안 리히르트는 세 장의 카드를 뽑았다. 노파는 그가 뽑은 카드들을 살피고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곧 애인이 생기겠네.”

“정말요?!”

당사자보다 더 놀란 아나샤가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그래, 그래. 아주 밝고 명랑한 아가씨랑 마음이 통하겠어.”

“세상에! 성격이 좋은 분인가 봐요!”

잘됐다며 아나샤가 눈을 반짝이는 동안 정작 당사자인 그는 조용히 침묵만 지켰다.

“어떻게 생겼어요? 단장님만큼 아름다우신가요? 어떻게 만나요? 원래 알던 사람이에요?”

오히려 아나샤가 노파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기에 바빴다. 노파는 자신도 점으로 본 것이기에 자세한 것은 모른다며 적당히 둘러대며 그녀의 질문을 피했다.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아 아쉬운 얼굴로 아나샤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고 말이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먼저 천막 입구에 선 아나샤가 그가 일어나길 기다릴 때였다. 어딘가 곤란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그가 무겁게 운을 뗐다.

“따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잠시 기다려 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되죠! 안 엿들을게요. 편하게 점치고 나오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나샤는 밖으로 튀어나갔다. 잠시나마 그 애인에 관한 질문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것이라면 굳이 제 앞에서 숨길 필요가 없으니 다른 사적인 질문이겠거니 싶었다.

그녀의 인기척이 멀어지자 리히르트는 그제야 노파를 응시했다.

“정확히 맞는 겁니까?”

아까 점의 결과가 믿을 만한 것이냐고 그는 물었다. 그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질문에 노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 나이쯤 먹으면 굳이 점을 안 쳐도 보이는 게 있어.”

“…….”

“딱 보니까, 남이랑 가깝게 어울려 본 건 저 아가씨가 처음이지? 그동안 마음 털어놓을 상대 하나 없이 삭막하게 살아온 것 같은데 말이야.”

자신의 눈은 속이지 못한다는 양 노파는 주름진 눈을 가늘게 접었다.

“자네 얼굴만 봐도 그래. 나는 다른 사람에겐 관심 없습니다 하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 같어. 인상 좀 펴. 안 그래도 삭막한 인생인데 저 아가씨까지 없으면 어쩌려고. 당연히 붙잡아야지.”

꾸지람이라 하기엔 썩 부드러운 어투였다. 하지만 리히르트는 미약하게 찌푸려진 미간을 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펼 수 없다는 게 옳았다.

“그런 것 따윈 상관없습니다. 아까 그녀의 운세에 대해 묻는 겁니다. 몸조심해야 될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하지만 그의 진지한 물음은 노파의 웃음소리로 인해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웃긴 사내구먼. 껄껄껄.”

“…….”

“그래, 그래.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데 이걸 묻는 게 당연하겠지. 사랑이 무슨 대수겠어.”

오랜만에 재밌는 손님을 상대해 본다는 양 노파는 웃음소리를 흘리다가 어느 순간 웃음기를 싹 거두었다.

“아까 그 아가씨한테도 얘기했지만, 나도 어디까지나 점을 통해 나온 것만 볼 수 있어. 그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얘기하는 것뿐이지. 그런데 아까 그 점괘는 정말 불길해.”

“…….”

“점이 안 맞길 바라야겠지만 정말 운이 나쁘면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점괘야. 그러니 그쪽 청년이 떨어지지 말고 잘 지켜보고 있어. 무슨 일 안 생기게.”

“…도움 됐습니다.”

여전히 그는 점을 믿지 않았으나 노파의 말은 귀에 새겼다. 만에 하나라도 그녀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면, 그것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면 새겨들어서 나쁠 것은 없으니 말이다.

돈을 치르고 밖으로 나온 그는 멀찍이서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는 아나샤를 볼 수 있었다. 쭈그리고 앉아 신기하게 생긴 장식품들을 보고 있던 그녀는 그의 발소리에 바로 고개를 들었다.

“점 잘 보고 왔어요?”

“네.”

“어때요? 잘 맞죠?”

“아쉽게도, 잘 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아나샤는 그의 표정이 조금 어둡게 가라앉아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안 좋은 결과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뭐 하고 놀까요?”

리히르트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미소를 입가에 가득 띤 채 아나샤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원래 점은 좋은 얘기만 듣는 거랬어요. 안 좋은 얘긴 훌훌 털어내고 우리 마저 신나게 놀아요.”

이끄는 손은 작았지만 리히르트는 마치 큰 힘에 의해 이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조한 기분 속에 빠져있던 자신을 이렇게 쉽게, 단번에 위로 끌어 올려주니 말이다.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이런 마음을 품게 된 것도 불가항력이 아닐까, 하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내내 맞잡은 두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6장 리온 (1)

어스레한 빛이 내려앉은 새벽, 리히르트는 잠에서 깼다. 쌀쌀한 새벽공기에 공허한 기분이 몰려들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왼손을 움켜쥐었다가 폈다.

이 손에 닿았던 따스한 온기가 떠올랐다. 꿈같았던 어젯밤 풍경이 떠오르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미안합니다. 이런 일에 익숙지 않아 제대로 에스코트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신경 썼어요?’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던 그녀의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 않고 생생했다. 조금 심통이 난 것 같은 얼굴이었었다.

‘단장님도 참! 저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거 알잖아요. 그리고 단장님보다도 이런 거에 무지한 사람이 전데!’

‘저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가 즐거우면 됐다고 생각해요. 전 오늘 무척 즐거웠거든요. 평생 동안 한 번 입어볼까 말까 한 옷도 다 입어보고, 멋진 곳에서 식사도 하고, 솔직히 지금도 꿈꾸는 기분이에요.’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며 아쉬워하는 얼굴로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여전히 포개고 있는 손이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황녀궁 앞에 도착했을 땐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충동마저 느껴야 했다. 그녀와 있을 땐 마치 꿈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으나, 그녀가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저택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만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리히르트는 깊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공허하리만큼 넓은 침실 안에서 옷을 갖춰 입고 방을 나섰다.

그의 하루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흘러갔다. 기사단에 출근하여 서류를 보았고, 홀로 점심 식사를 했으며, 잠깐의 휴식도 없이 다시 일을 했다.

서류를 보는 도중에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어젯밤의 기억에 그는 습관적으로 왼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어서 그녀를 보고 싶었다. 평소에도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오늘은 그 생각이 한층 더 강했다.

그리고 물어보고 싶었다. 어젯밤 일들이 단순히 꿈이 아니라면, 그녀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진 않을까. 자꾸만 맞잡았던 손의 온기가 떠올라 마음이 들떴다.

결국 리히르트는 평소보다 일찍 업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황녀궁에 들어서자 전속 시녀들이 가장 먼저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그녀의 얼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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