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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30화 (30/87)

30화

어떤 말도 부드럽게 넘겨버리는 황녀님의 말발에 아나샤는 할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렸다. 더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하자 엘리시아는 기분 전환 겸 다녀오라며 가볍게 그녀의 등을 밀어주었다.

“그럼 아샤 경, 아니 라이나 영애. 즐거운 시간 보내고 와요.”

아나샤는 떠밀리듯 몇 걸음 옮기다가 제 옆에 따라 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괜찮겠냐고 눈으로 물었으나 그는 입매를 가다듬듯이 입술 끝을 매만질 뿐이었다.

‘단장님 뭔가 들떠 보이잖아?’

제 착각인가 싶어서 그의 옆얼굴을 다시 살펴보았으나 역시나 그는 어딘가 들뜬 모습이었다. 물론 입가만 살짝 올라갔을 뿐이었지만 아나샤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일에 치이며 바쁘게 지냈으면 놀다 오라는 말에 저렇게 사람이 행복해 보일 수 있을까 싶었다. 매일 야근을 하던 그를 생각하면 충분히 나올 만한 반응이었다.

‘노는 게 얼마나 그리웠으면…….’

아나샤는 속으로 짠한 기분을 느끼며 동시에 다짐했다. 이렇게 된 거 그에게 완벽한 휴일을 선물해 주기로 말이다.

“가요, 어디든!”

언제 마지못해 움직였냐는 듯이 아나샤는 위풍당당하게 태세를 전환했다. 풍성하게 부풀려진 드레스 자락을 펄럭이며 당차게 걷는 그녀 뒤로 커다란 키의 사내가 따라붙는 요상한 모습이 되었지만, 엘리시아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혹시 가고 싶은 곳 있습니까?”

마차에 오르고서 리히르트가 처음 꺼낸 말이었다. 일단 마부에게는 수도 번화가로 가달라고 말했으나 두 사람 다 뚜렷한 행선지가 없는 상태였다.

“단장님은요?”

“저는 어디든 좋습니다.”

“그러면 밥 먹고 싶어요.”

치장을 받느라 점심도 못 먹었다고 아나샤가 말하자 그는 곧바로 행선지를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으로 바꾸었다.

“레스토랑 한 번도 안 가봤는데! 휴, 이게 뭐라고 떨리네요. 단장님이 보기엔 어때요? 저 좀 귀족 같아 보여요?”

“…귀족 같아 보인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잠시만요! 저 마음의 준비를 해야 될 것 같아요.”

아나샤는 과하게 숨을 들이켰다가 후 내쉬었다. 어떤 혹평도 담담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그녀가 해도 된다고 사인을 주자 리히르트는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네?”

예상과 다른 말에 아나샤는 잠시 당황해 버렸다.

어느새 머리로 열이 서서히 올라오자 그녀는 딴청을 부리듯이 손부채질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리히르트는 그녀가 눈을 마주쳐 오자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저도 그런 곳은 처음입니다.”

“정말요?”

“네. 그래서 기대됩니다.”

리히르트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잔잔한 푸른빛의 호수처럼 고요한 눈길이었으나 그의 심장은 어느 때보다도 빠르고 거세게 뛰고 있었다.

“저도요! 엄청 기대돼요.”

자신도 마찬가지로 기대된다는 양 활짝 웃는 모습에 리히르트는 다시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 만큼 순간순간이 떨리고 설렜다.

어느새 꽉 쥐어진 그의 손등 위로 힘줄이 돋아났다. 마음은 접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하루만, 하루 정도는 바라도 되지 않을까.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기로 결정한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으나 리히르트는 오늘도 이것을 뒤로 미루었다. 단 한 번도 제 결정을 미뤄본 적도,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했던 적도 없던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날이 갈수록 실행을 미루는 게 일상이 되고 있었지만 그 자신은 이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크리스는 오랜만에 외출을 나와있었다. 항상 땀내 나는 사내들로 복작거리는 기사단 식당에서만 밥을 먹다가 아름다운 연주 소리가 흐르는 넓은 공간에 앉아 식사를 하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수도에서 가장 큰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상위층 귀족들이 자주 찾는 곳답게 예약하는 데만 한 달이 걸렸지만 크리스는 이 정도 수고는 감수할 만하다고 여겼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세실리아 그녀도 감동한 눈치였고, 음식도 입에서 녹아내릴 것처럼 맛있었다. 모든 게 완벽한 하루였다.

우아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이어갈 때였다. 갑작스레 주위에서 작은 술렁거림이 일었다. 약혼녀와 대화를 나누던 그는 잠시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기 무섭게 식당 입구로 들어서는 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차마 안 보려 해도 눈에 안 띌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한 올 흐트러짐 없이 포마드로 쓸어 넘긴 백금발은 깔끔했다. 곧고 유려한 선이 흐르는 조각 같은 얼굴을 든 채 걸어 들어오고 있으니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새하얀 황실 제복까지 입고 있어 모두 그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고 가녀린 체구의 여인이 함께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대충 어느 귀족 가문의 영애이겠거니 하고 시선을 흘리려던 크리스는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에 시선을 멈췄다.

“…컥, 쿨럭쿨럭!”

그리고 크리스가 사레에 들리기까지 단 3초도 걸리지 않았다.

“크리스?”

세실리아가 당황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복잡한 머릿속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샤가 왜 여기에 있는……? 아니아니아니, 저 옷은 또 뭐고. 왜 단장님이랑 같이 있는 거지?’

크리스는 기침을 하며 벌겋게 얼굴을 물들인 상태에서도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상한 태도로 의자를 빼주는 저 신사 같은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무표정하던 얼굴은 어디다 던져두고 왔는지 입가에 온화한 미소까지 지은 채 아나샤와 얘길 나누고 있었다.

‘뭐야, 저 둘이 대체 왜…….’

주위의 시선이 힐긋힐긋 모아지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들만의 세상에 푹 빠져있는 두 남녀의 모습에 크리스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그때, 문득 예전에 기사들이 우스갯소리로 떠들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도 붙어 다니니 저러다 애인 사이로 발전해서 1년 안에 결혼하는 것은 아니냐는 우스갯소리였다.

물론 그 당시에는 개소리로 취급했지만, 두 사람의 데이트 장면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크리스는 도저히 개소리로 취급할 수 없었다.

막 성인이 된 딸아이가 외간 남자와 몰래 데이트하는 것을 목격한 아버지의 심경이 이럴까. 거기다 그 외간 남자가 자신의 상관이라면…….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크리스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참으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 * *

식당을 나온 아나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또 이런 곳에 와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멋진 곳이었다. 식탁 위를 빼곡히 채운 수십 가지 음식은 하나같이 입 안에서 사르르 녹을 만큼 끝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만족스럽게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처음 입어본 건데, 드레스가 이렇게 불편한 옷일 줄은 몰랐어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들을 눈앞에 두고 배 터지게 먹지 못했으니 드레스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나샤의 투덜거림을 조용히 듣고 있던 리히르트는 마차에 오르려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이라도 갈아입으러 가는 건 어떻습니까?”

“그래도 돼요?”

“저도 제복이라 갈아입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나샤는 그제야 그의 옷차림이 놀러가기엔 많이 이목을 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가 손을 겹치자 리히르트는 곧바로 그녀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두 사람이 내린 곳은 의상점 앞이었다. 기사단 숙사나 그의 저택으로 가는 줄 알았던 아나샤는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 통이 크신 거 아니에요? 밥도 단장님이 사주셨잖아요.”

“예전에 단둘이 만났을 때도 그대가 전부 사줬지 않습니까.”

“그거랑 퉁친 게 아까 밥이잖아요.”

사실 퉁쳤다고 하기엔 가격 차가 어마어마하다지만. 아나샤가 더 받을 순 없다고 우기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빌려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빌려주는 것도 결국 사야 되는 거 아닌가……?’

아나샤는 헷갈렸지만 헷갈려 할 새도 없었다. 의상점에 들어서자마자 이 드레스는 어떠냐, 저 드레스는 어떠냐며 추천하는 직원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바지요! 바지로 주세요!”

벌 떼처럼 몰려드는 드레스들에 파묻히기 직전 아나샤는 다급히 외쳤다. 직원들의 표정엔 의아함이 묻어났지만 곧 그녀 말대로 바지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여러 옷 중에서 아나샤는 가장 편해 보이는 셔츠와 멜빵바지를 선택했다. 갈아입고 나오자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그가 보였다.

가장 흔한 검정색의 무늬 없는 기성복으로 갈아입은 그였지만, 마치 그를 위해 제작된 세상에 단 한 벌뿐인 옷 같았다. 아나샤는 척 하고 엄지를 세웠다.

“엄청 잘 어울려요. 최고 멋져요.”

“그대도 잘 어울립니다.”

리히르트는 미소를 숨기지 않고 말했다. 아나샤는 괜히 부끄러운 기분에 볼만 긁적였다. 모른 척하긴 했지만 제게서 떨어질 줄 모르던 그의 시선 때문에 더 그랬다.

“흠, 아무튼, 이제 어디 갈까요?”

의상점을 나오며 아나샤가 물었다. 노을이 져 어두워진 거리에는 하나둘 가로등에 불이 켜지고 있었다.

귀족들이 다니는 거리라 마법 가로등도 많구나, 아나샤가 형형색색 빛나는 거리에 작게 감탄하는 동안 리히르트가 슬며시 운을 뗐다.

“저번에 갔던 시장은 어떻습니까?”

“시장 좋죠. 근데 제가 돈을 안 챙겨와서 뭘 사 먹거나 할 수가 없을 텐데 괜찮겠어요?”

그에게 돈이 있다고 해도 보나 마나 번쩍거리는 금화일 테니 시장은 무리였다. 어떡해야 될지 몰라 가만히 서있을 때였다.

아나샤는 제게 내밀어진 그의 손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는 웬 가죽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조금 묵직한 주머니를 받아 들고 안을 열어본 그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언제 다 바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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