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사랑에 빠질 때-29화 (29/87)

29화

왠지 모르게 아쉬워 보이는 그의 모습에 엘리시아는 모른 척 매끄럽게 웃어 보였다.

“제 휘하에 기사단을 하나 두고 싶어요.”

“기사단을 말이니? 이건 또 예상 밖의 말이구나.”

“…저번 사건으로 절실히 느꼈어요. 저만을 위해 움직여줄 자들이 필요하다는 걸요. 저번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요.”

남에게 수사 권한을 줄 바에야 자신이 믿고 맡길 수 있는 자들이 직접 움직이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 그녀는 덧붙여 말했다. 잠시 깊게 고민하던 에르디온은 손끝으로 턱을 문지르며 대답을 내놓았다.

“일단 아버지께 말씀은 드려보마. 하지만 시간이 조금 걸릴 거란다. 안 그래도 달러스 영지 건으로 많은 병력을 차출해야 돼서 말이야.”

“…달러스요?”

그 멍한 중얼거림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엘리시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에르디온은 창가 옆에 서있는 한 시녀를 돌아보았다. 못 보던 얼굴인 게 최근에 새로 뽑은 모양이었다.

“무례라 생각지 않으니 긴장할 것 없다.”

에르디온은 웃으며 창백하게 굳어있는 어린 시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엘리시아와 시선을 마주하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두 사람의 얘기는 길어졌다. 대략 삼십 분 넘는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에르디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시녀들이 예를 갖추는 동안 단 한 사람만이 방 안에 서서 굳어만 있었다.

“아샤 경?”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엘리시아가 시녀들을 내보내고 그녀를 따로 불렀을 때였다. 언제 멍한 얼굴이었냐는 듯이 아나샤가 엘리시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슨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단호함마저 서린 얼굴이었다.

“황녀님, 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 * *

“달러스 영지라…….”

엘리시아는 달이 떠오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단실처럼 매끄러워 보이는 머리카락 위로 달빛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부탁을 들어줘야 할까?”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목소리는 방 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엘리시아는 창틀에서 떨어져 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자넌.”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머리에 쓴 검은 복면으로 인해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흘러나온 거친 저음의 목소리는 남성의 것이었다. 그의 주위로 희미하게 피비린내가 풍겼으나 엘리시아는 약간의 두려운 기색조차 없었다.

“괜히 그곳에 보냈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아깝잖아? 네가 굳이 살려뒀을 만큼 유능한 아이인데.”

오히려 매끄럽게 입술을 휘어 올리며 엘리시아는 익숙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목격한 자는 모두 가차 없이 제거했던 자넌이 살려두었단 것은 그만큼 죽이기 아까운 상대란 얘기였다.

물론 자넌을 ‘황녀를 해하려고 기습한 암살자’로 오해했기에 살려두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겠지만.

“지금이라도 처리하라고 명하신다면…….”

“나도 아샤 경이 꽤 마음에 들어서 하는 말이야.”

이 말은 사실이었다. 자신의 심복들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이가 자넌이었다. 자신을 지키려던 자넌보다 더 빠르게 제 앞을 막아서서 방어 태세를 갖췄던 아나샤는 확실히 제 마음에 들기 충분했다.

전투 실력은 아직 자넌에게는 못 미치지만 민첩함만큼은 그와 비등하게 겨룰 정도는 되었다. 기사단 소속 첩자만 아니었다면 제 밑에 두고 싶을 만큼 탐이 나는 인재였다.

“그리고 그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패인 만큼 소중히 다뤄야지.”

“남자를 다루는 패… 말입니까?”

“첩자들은 모두 이런 쪽으로는 둔감한 건가? 다른 건 기민하게 잘만 눈치채면서 말이야.”

엘리시아는 혼잣말로 낮게 중얼거리며 자넌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좋아하는 여인을 잠시라도 보기 위해 매일같이 찾아오는 그 사내나,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아샤 경이나 둘 다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5장 두 사람의 거리 (2)

“저번에 말한 부탁 들어줄게요.”

다음 날 엘리시아는 아냐사를 따로 방에 불렀다. 엘리시아의 깜짝 발언에 아나샤는 댕그랗게 눈을 떴다가 곧 고마움을 가득 담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신 내 부탁도 들어준다면 말이에요.”

“뭐부터 하면 될까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이 아나샤가 즉각 대답해 왔다. 이에 엘리시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종을 흔들었다. 딸랑딸랑, 울리는 종소리에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일제히 안으로 들어섰다.

“준비해요.”

준비? 아나샤가 그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 골똘히 머리를 굴리려던 순간이었다. 시녀들이 다가와 아나샤를 양쪽에서 덥석 붙잡았다. 그러곤 어딘가로 재빠르게 끌고 가기 시작했다.

“황녀님? 황녀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라 당황한 아나샤와 달리 엘리시아는 여유롭게 시녀가 내온 차를 들이켤 뿐이었다.

* * *

“그대로 가만히 계세요. 입꼬리도 다시 위로 올리시고요.”

아나샤는 현재 황녀궁의 뒤편에 위치한 꽃밭에 앉아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피어난 꽃들 사이에서 리본이 달린 하늘색 보닛을 쓰고 레이스 양산을 든 채로 말이다.

어설프게 입꼬리를 올렸지만 이내 다시 파르르 떨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상황은 이러했다. 엘리시아가 후원하는 젊은 화가들은 정기적으로 황녀의 궁에서 인물화를 그리는데, 오늘 그 모델이 되어주기로 한 영애가 그만 아파서 오지 못한 것이다.

모델이 필요한 그때, 마침 엘리시아의 눈에 아나샤가 들어왔고 말이다.

풍성한 프릴이 달린 귀족 드레스를 입어본 것은 아나샤의 인생에 있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에야 마냥 기쁘고 들떴던 그녀지만, 두 시간 동안 돌처럼 가만히 있으려니 엉덩이가 배기기 시작했다. 거기다 표정 관리까지 해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저기요… 얼마나 더 남았어요?”

“거의 다 끝나가요. 자, 다시 활짝 웃어보세요.”

아나샤는 억지로 입술을 끌어 올렸다. 예쁜 옷을 입고 고문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버텼을까, 분명 낮이었을 텐데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화가가 완성되었다는 듯이 만족한 얼굴로 붓을 거두자 아나샤는 양산도 버리고 뒤로 벌러덩 누웠다. 한동안 화구를 정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안 가 화가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아마도 황녀님께 끝났다고 얘기하러 가는 것 같았다. 그동안 자신은 잠깐 쉬어도 되겠지. 이대로 10분은 더 누워있을 생각으로 편하게 대자로 뻗어있을 때였다. 지척에서 들려온 발소리에 아나샤는 속눈썹을 살짝 움직였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떴다. 노을을 등진 낯익은 얼굴이 보이자 아나샤는 반가움에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단장님!”

오늘은 못 바래다줘서 당연히 못 볼 줄 알았던 그가 바로 앞에 있으니 반가움이 두 배로 밀려왔다. 아나샤는 어떻게 알고 여기로 왔냐며 그의 주위에서 종알거리다가 뒤늦게 그가 너무 조용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려던 찰나, 문득 제 옷차림이 어떤지 떠올랐다.

“어, 앗, 이게요! 그, 황녀님한테 들으셨는진 모르겠지만 사정이 있어서.”

드레스까지는 그렇다 쳐도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달린 보닛은 조금 창피했다. 버벅거리는 손으로 턱 아래 리본부터 풀려고 했지만 생각대로 잘되지 않았다.

“어떤 사정인지는 이따가 얘기해 줄게요. 그보다 이거 어떻게 묶은…….”

그때, 볼 옆으로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아나샤는 얕게 숨을 들이켰다. 솜털을 스치는 간질간질한 감각을 뒤로하고 커다란 손은 금방 멀어졌다.

아나샤는 뒤늦게 긴 손가락 끝에 들려있는 작은 꽃잎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단순히 꽃잎을 떼어줬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언제 긴장했냐는 듯 몸이 느슨해졌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아 맞다! 이거 좀 풀어주실래요?”

리본 매듭 좀 풀어달라고 아나샤는 제 턱밑을 가리켰다. 리히르트가 순순히 손을 움직여 리본 매듭을 풀어주자 아나샤는 잽싸게 보닛을 벗었다.

“이제 가요. 바래다드릴게요.”

하지만 화원을 벗어나기도 전에 그녀는 걸음을 멈춰야 했다.

“밖으로 안내하러 가는 길인가요? 성실하기도 하지.”

마침 화원으로 들어오던 엘리시아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아니에요. 이것 말고는 딱히 하는 것도 없는걸요.”

쑥스럽다는 양 아나샤가 대답하자 엘리시아는 입가에 띤 미소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이왕 예쁘게 꾸몄는데 고생만 하고 바로 풀면 아깝잖아요. 밖에 나갔다 오는 건 어때요?”

“네?”

“우아한 곳에서 식사도 하고, 공연도 보고, 마지막으로 야경까지 보고 오면 딱이겠네요. 그러니 아샤 경의 에스코트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어진 말은 아나샤를 향한 말이 아닌, 그녀 옆에 서있는 리히르트를 향한 말이었다. 아나샤는 입을 떡 벌렸다. 에스코트? 자신과는 평생 인연이 없을 것 같은 단어가 아닌가!

마음이 들뜨고 설레는 것과는 별개로 너무 갑작스러웠다. 거기다 단장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나샤는 그의 바르고 친절한 성격상 거절을 못 할 거라 여기고 재빨리 끼어들었다.

“조금 갑작스럽지 않을까요? 단장님도 오늘 저녁엔 바쁠 수도 있고…….”

“설마 바쁘실 리는 없겠죠?”

곱게 눈을 휘며 엘리시아는 리히르트를 바라보았다. 분명 부드럽고 상냥한 시선일 텐데 아나샤는 왠지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제가 나가면 황녀님 비밀 호위는…….”

“오라버니께서 오늘 새로운 호위들을 보내주셔서 말이에요. 평소보다 더 안전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 그치만 드레스가 더럽혀지기라도 하면…….”

“더럽혀도 괜찮아요. 원래는 아샤 경에게 줄 생각이었는걸요.”

“아뇨! 저 주셔도 저는 입고 갈 데도 없고 혼자 입을 수도 없는걸요.”

“그러네요. 평소엔 입을 수 없는 옷이니 지금 입었을 때 즐겨두는 게 좋겠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