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그, 그럴 리가 없겠죠! 안 물을게요!”
“만일… 맞는다고 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아나샤는 그를 바라봤다가 그대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온전히 자신만을 담고 있는 그의 두 눈이 무언가를 바라듯 간절하면서도 조심스러워 보였다.
곧 그가 먼저 시선을 피하며 반걸음 물러섰다. 아나샤는 그 벌어진 간격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불편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습니다. 방금 한 얘기는 그저, 아샤 경?”
그 부름에 아나샤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은 자신의 손을 알아차렸다.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라 급하게 손을 떼고 횡설수설 말을 이어야 했다.
“부, 불편할 리 없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단장님인데. 오히려 저 때문에 그 일까지 떠맡느라 그렇게 바빴던 건가 싶으니까, 뭔가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고…, 아무튼 마음이 찡한 거 있죠! 물론 제가 눈을 피한 건 그러니깐, 불편하다기보다는 뭐랄까…….”
“그렇습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딘가 쓸쓸해 보이던 벽안이 부드럽게 사르르 접혔다. 불편하게 여기지 않아 다행이라는 듯이 말이다.
아나샤는 뻣뻣하게 따라 미소 지었다. 속으로 이렇게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여겼지만, 한편으로는 아까 자신이 왜 그랬는지 이상하기만 했다. 왜 순간적으로 그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던 건지 말이다.
하지만 뭐 하나 붙잡고 오랫동안 진지하게 생각하는 성격은 못 되는 그녀였다. 단 1분 만에 머릿속에서 훌훌 털어내고서 아나샤는 그와 함께 다시 걷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리히르트는 황녀궁을 찾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그를 보며 황녀궁의 시녀들은 각자 속으로 탄성을 삼켰다.
매번 갑작스레 방문해 오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엘리시아도 어딘가 즐거워 보여서 시녀들은 더 들떴다. 드디어 자신들이 모시는 황녀님께 진정한 사랑이 찾아온 거라 의심치 않으며 말이다.
“솔직히 황녀님께 어울리는 남자가 세상에 존재할까 의문이었는데, 웨일그레슬 공작님 같은 완벽한 분이 계셨을 줄이야.”
“매일같이 찾아오시니 마음이 있으신 게 분명해.”
“당연한 거 아니니? 듣기론 무도회장에서 처음 뵈었다던데 그날 황녀님께 단단히 반하신 거지.”
오늘도 두 사람의 만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밖으로 나온 시녀들은 속닥속닥 이야기꽃을 피웠다. 차갑고 무심해 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며칠째 하루도 빠짐없이 황녀궁을 찾아오는 그는 시녀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얼음 같아 보여도 그 속엔 열을 품었을 게 분명한 푸른 눈동자는 황녀님만을 가득 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일처럼 설레어하는 그녀들을 보며 아나샤는 ‘그런가?’ 하고 갸웃했다.
자신도 처음엔 그런 쪽으로 오해하긴 했지만 단장님이 아니라고 말했으니 말이다. 아마 시녀들을 전부 나가게 한 걸 보면 암살자에 대한 대화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이 되었다.
한편, 방 안의 모든 시녀들을 물리고 그와 단둘이 차를 마시던 엘리시아가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상냥한 눈웃음을 그리며 그녀가 매끄러운 입술을 뗐다.
“오늘은 암살자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낸 게 있을까요?”
“아직입니다.”
남녀의 다과 자리에 오갈 만한 대화라 하기엔 지극히 일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시녀들이 듣는다면 통탄할 대화였지만 두 남녀는 조금도 사무적인 태도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노력해 주고 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충분히 시간을 드렸다고 생각해요.”
“…….”
“이번 주까지만 시간을 드릴게요. 그래도 알아내지 못한다면 오라버니께 수사 권한을 넘길 생각이에요.”
조용히 침묵만 지키고 있는 사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읽어내기 힘들었다. 엘리시아가 그의 표정을 살피며 찻잔을 들어 올릴 때,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배후로 짐작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죠?”
엘리시아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변화 없는 표정으로 그녀만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뒤늦게 리히르트는 형식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심증일 뿐입니다. 아직은 밝힐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엘리시아는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아쉬운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추궁한다고 해서 입을 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아 다른 주제로 전환했다.
“오늘도 잠깐 있다가 갈 생각인가요?”
입가에 미소를 그려 넣은 그녀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실례가 된다면 가보겠습니다.”
“아니에요.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편하게 있다가 가세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차를 옆으로 치우고서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책을 읽기 시작했다. 대화 소리를 대신해 사락사락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침묵이 내려앉은 방 안은 평온함을 넘어서 서늘할 정도였다. 대략 10분 정도가 지나자 리히르트는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안내해 줄 시녀가 필요하겠죠.”
엘리시아는 책을 덮고 다과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은색 종을 흔들었다. 경쾌하게 울리는 종소리에 곧 문이 열리며 시녀 하나가 안으로 들어섰다.
“사샤를 불러오렴.”
“네.”
익숙하다는 듯이 시녀는 곧바로 아나샤를 불러왔다. 문안으로 들어선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무표정하던 그의 눈동자 위로 처음으로 부드러운 기색이 스쳤다.
엘리시아는 아나샤에게 부탁한다는 양 웃으며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였다. 공작님을 밖까지 안내해 드리라는 지시는 따로 필요 없었다. 매번 그의 배웅을 맡는 것은 아나샤였기 때문이다.
아나샤는 그와 함께 다시 문을 나섰다. 며칠 새에 완전히 몸에 밴 예의 바른 태도로 그를 안내하던 그녀는 아무도 없는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공손히 모으고 있던 양손을 위로 쭉 폈다.
“끄으응! 이제 살 것 같다!”
아예 멈춰 서서 기지개를 켠 아나샤는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 열려있는 복도 창문으로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서있는 그녀를 보던 리히르트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무슨 일은 없었습니까?”
“전혀요! 아침부터 지금까지 가만히 방 안에만 있었는걸요? 물 떠오는 것도 갑자기 다른 시녀가 하게 돼서 할 게 없어졌거든요. 진짜 그거라도 해야 그나마 몸을 움직일 수 있었는데 말이에요.”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어투였다. 그에 반해 리히르트는 잘되었다는 듯이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보다 단장님은 별일 없으시죠?”
“네.”
“기사단은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씰룩 웃은 아나샤는 멈췄던 발을 움직였다. 빨리 들어가고 싶지 않아 부러 느릿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단장님 덕분에 이렇게 잠깐이라도 자유를 만끽할 수 있어서 망정이지, 정말 단장님도 안 오셨으면 지루해서 돌아가실 뻔했어요. 아 참, 내일도 오실 거죠?”
“내일도 오겠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제 걸음걸이에 맞춰 느릿하게 걷는 그가 고마워 배시시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나 단장님을 배웅해 주는 시간이 제일 좋았다.
황녀님의 비밀 호위를 하는 동안은 단장님의 코빼기도 못 보겠지 싶었는데 매일같이 이곳에 와주는 그가 고맙기까지 했다. 물론 단장님은 황녀님께 암살자에 대한 보고를 하러 오는 거겠지만 말이다.
아나샤는 신나서 떠드느라 발이 가는 대로 막 걷다가 잠시 길을 헤매기까지 했다.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이 아예 길을 외운 그가 도리어 아나샤를 안내하고 있었다.
결국 도착하게 된 황녀궁 후문 앞에서 두 사람은 길고 긴 대화를 끝내야만 했다. 마차에 오르기 전 그는 늘 그랬듯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십시오.”
“단장님도요.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제가 바로 달려가서 도와드릴게요!”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아나샤도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녀를 바라보던 시린 색의 눈동자가 잠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가 마차에 오르고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그가 떠난 후에도 봄기운처럼 따스한 둘만의 기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 * *
아나샤는 평소와 같이 변화 없는 잔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방문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바쁘실 텐데 이곳까지 걸음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동생을 보러 오는 것인데 미안할 게 뭐가 있겠니?”
황태자와 황녀의 대화를 들으며 아나샤는 지정석인 창문 옆에 서있었다.
사이좋은 남매 사이를 보여주듯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황태자 에르디온은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일에 대해 얘기하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는지 입가에 짙은 미소를 걸었다.
“그보다 방금 웨일그레슬 공작이 다녀간 것 같던데.”
“네, 맞아요.”
“역시나. 매일같이 이곳에 방문한다는 얘기가 귀족들 사이에서 자자하더구나. 흠…, 그가 너에게 구애를 하고 있다는 소문도 사실이니?”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오라버니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분이 암살자에 대한 수사를 맡았잖아요.”
보고차 들르는 것뿐이라고 엘리시아는 얘기했지만, 에르디온은 의심쩍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일 때문이래도 그렇지, 그 무뚝뚝한 사내가 번거로움도 감수하고 매일같이 찾아온다? 조금 의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애당초 자신의 동생을 위해 직접 사건을 맡겠다고 나서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분에게는 따로 사랑하는 분이 있는 모양이거든요.”
그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에르디온은 물론, 앞에서 듣고 있던 아나샤까지 놀라 휘둥그레 눈을 떴다. 엘리시아는 태평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며 잠시나마 아나샤와 눈을 마주했다.
“물론 안타깝게도 짝사랑인 것 같지만요.”
“그 상대가 네가 아니란 말이니?”
에르디온은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되물었다. 그 웨일그레슬 공작이 따로 사모하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상대가 제 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그보다 오라버니, 저번에 부탁드리고 싶다고 했던 것에 대해 얘기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