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무슨 일에도 무신경한 그는 현재 한 가지가 신경에 거슬려 참지 못하는 중이었다. 어젯밤 잠이 드는 와중에도, 아침에 눈을 떠서도, 걷는 도중에도, 업무를 보는 중에도, 한 단어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정확히는 단어가 아닌 ‘리온’이라고 하는 어느 사내의 이름이었다. 그 낯선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후부터 줄곧 이 상태였다.
무의식중에 이름을 부를 정도면 가까운 사이일 터였다. 그녀의 주변엔 늘 사람이 많으니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 또한 많을 터였다. 저번에만 해도 친한 사내에게 무도회 파트너 신청을 받았던 그녀였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마음에 둔 사내가 없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리히르트는 이 거슬림이 저번에 그녀로부터 파트너 신청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미간을 슬며시 접었다.
자신이 얼굴도 모르는 사내를 상대로 질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감정을 배제한 냉담한 표정으로 돌아와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잡념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매서운 기세였다.
그렇게 점심 식사도 거른 채 단장실에만 틀어박혀 바쁘게 업무를 처리하던 중이었다.
똑똑. 들려온 노크 소리에 그의 손이 우뚝 멈췄다. 리히르트가 고개를 들고 들어오라고 허하자 한 기사가 안으로 들어섰다.
“단장님. 업무 중에 방해드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지?”
“황녀 전하께서 기사단에 찾아오셨습니다.”
뜻밖의 인물에 리히르트는 잠시 못마땅한 듯 침묵을 지켰다. 그동안 기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현재 아나샤 경이 본관 응접실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들려오기 무섭게 리히르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더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빠른 행동이었다.
“바로 가지.”
* * *
아나샤는 한가롭게 기사단 부지를 돌아다니며 같이 놀 사람을 찾았다. 자신처럼 한가하며 시간이 남아도는 인간이 없나, 주위를 돌아보던 그녀의 눈에 어떤 굉장한 인물이 들어왔다. 멀리서 봐도 결이 고와 보이는 은빛 머리칼이 부드럽게 넘실거렸다.
마차에서 내려 기사단 본관 정문으로 향하는 황녀님의 모습은 눈이 부시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아나샤가 멍하니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돌연 황녀의 고개가 자신을 향해 돌아갔다.
“아.”
눈이 마주치자 아나샤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법 같은 것은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머릿속이 하얗게 빈 기분이었다. 들지 않고 얼마나 숙이고 있었을까. 아나샤는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야 했다.
“이곳에 여기사가 있었던가요?”
“아, 아뇨. 저는 여기사가 아니라!”
아나샤는 황녀의 곁에 서있는 호위 기사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그녀가 제게 물은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차렸다. 혹시 말실수를 한 건가 싶어서 속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였다.
“그 목소리는 혹시…….”
놀란 듯이 눈을 키운 엘리시아가 곧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아나샤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지난번 무도회장에서 저를 구해주었던 사람이 당신이군요.”
목소리는 물론 체구 또한 또렷하게 기억난다는 듯이 확신에 찬 말투였다. 아나샤가 맞다 아니다 말도 못 한 채 입술만 뻐끔거리는 동안 엘리시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만나면 꼭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그날은 고마워요.”
“아,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결과적으론 아무것도 한 게 없는걸요.”
‘암살자도 놓쳐버렸고…….’ 아나샤는 아랫입술을 조용히 깨물었다. 시무룩한 그 모습에 엘리시아는 손을 뻗어 아나샤의 손을 부드러이 붙잡았다.
“아무것도 한 게 없다니요. 덕분에 이렇게 무사한걸요.”
그러다 그녀는 아나샤의 반대 손이 붕대로 감겨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손은… 그날 다친 건가요?”
“거, 거의 다 나았어요.”
잔뜩 긴장한 아나샤는 황녀에게 붙잡힌 손을 감히 빼지도 못한 채 눈을 굴렸다. 바로 눈앞에 있는 황녀님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거기다 풍기는 옅은 향은 얼마나 향기로운지 코를 절로 킁킁대게 만들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그래도 미안해요. 저 때문에 다친 걸 텐데…….”
이 얼마나 상냥하신 분일까. 아나샤는 그녀의 눈빛에 어린 미안함을 알아차리고 고개만 저어댔다. 조금 이 상황이 편해지자 긴장이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저… 그보다 여기는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웨일그레슬 공작을, 아니 기사단장을 만나러 왔어요.”
“아, 그렇군요! 그럼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럼 응접실로 안내해 줄 수 있을까요?”
엘리시아가 쥐고 있던 손을 놓자 아나샤는 냉큼 걸음을 옮겨 그녀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본관 건물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호위 기사는 신경 쓰지 않은 채 계속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은인의 이름도 못 들었네요.”
‘은인…….’ 간질간질한 기분에 아나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기분이 좋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나샤는 헤실헤실 입가에 미소를 단 채 대답했다.
“전 아나샤 라이나라고 해요. 저, 괜찮으시다면 편하게 아샤라고 불러주세요.”
“그래요. 아샤 경.”
엘리시아는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응접실에 도착하자 호위 기사는 자연스레 문 앞을 지켰다. 아나샤도 이제 나가보려 했으나 엘리시아가 그녀를 붙잡은 탓에 떠날 수 없었다.
“사례를 하고 싶은데 혹시 원하는 것이 있을까요?”
“네? 아뇨, 아뇨. 전혀 가당치 않아요!”
“거절하지 않아도 돼요. 제 마음이 편치 않은걸요. 혹시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얘기해 줘요.”
“음, 그럼… 필요한 게 딱 하나 있기는 한데요…….”
아나샤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가 지금 아무것도 못 하게 금지당한 상태라서요. 혹시 사소하게 시키실 일 같은 거 없으실까요? 아주 간단한 거라도 좋아요. 뭐든 시켜만 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잘됐네요.”
의외로 엘리시아는 흔쾌히 허락했다. 오히려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이 여유로이 미소 지었다. 아나샤는 숨이 다 트인다는 양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제아무리 단장님이래도 황녀님께서 내리신 임무를 못 하게 막진 못하실 테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자 아나샤는 언제 눈을 빛냈냐는 양 얌전히 뒤를 돌아보았다. 곧 문이 열리고 리히르트가 들어섰다.
그의 차분한 눈길은 응접실에 서있는 아나샤부터 찾았다. 그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황녀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애써 고개를 돌렸다. 가볍게 머리를 숙여 예를 표한 리히르트는 황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엘리시아였다. 아나샤는 나갈 타이밍을 잡지 못해 어정쩡하게 황녀의 옆에 서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엘리시아는 그녀에게 옆자리를 권했다.
“아니에요. 두 분이서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아샤 경, 경에게도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사양 말고 앉아요.”
상냥한 그 목소리에 아나샤는 별다른 거절의 말을 찾지 못한 채 얌전히 착석했다.
“아직 암살자를 잡지 못하셨다고요.”
아나샤가 앉자 엘리시아가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암살자’라는 단어가 들려오기 무섭게 리히르트는 민감하게 눈썹 끝을 움직였다. 아나샤만이 암살자와 단장님이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어 눈만 깜빡거렸다.
“아직도 그날 일로 불안해요. 언제 또다시 나타나 저를 해칠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내리깐 눈동자에는 걱정과 불안함이 깃들어 있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물론 믿고 있어요. 공께서 직접 잡겠다고 하신 것은 의외였지만, 저를 위해 나서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나샤는 새롭게 안 사실에 휘둥그레 눈을 떴다. 대각선 방향에 앉아있는 그를 향해 눈빛을 건넸지만, 리히르트는 그 눈빛을 묵묵히 외면할 뿐이었다.
“오늘 찾아온 이유는 호위할 사람이 필요해서예요.”
“호위는 직접 뽑으실 겁니까?”
“실은 이미 정해두었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시아는 옆자리로 시선을 주었다. 아나샤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더욱 짙은 미소를 보였다.
“이분을 제 호위 기사로 데려갈 생각이에요.”
“네? 네?! 저를 호위로요?!”
아나샤는 설마 자신을 말하는 것이냐고 깜짝 놀라 되물었다. 눈동자는 놀라움에서 점차 기쁨으로 번져갔다.
“여기사라면 저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호위할 수 있고, 또…….”
“그녀는 기사가 아닌 첩자입니다. 호위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엘리시아의 말을 끊으며 냉담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에 아나샤는 그를 돌아보았다. 평소와 달리 서느런 얼굴의 단장님은 자신은 조금도 보지 않고 황녀님에게 눈길을 고정한 채 말을 잇고 있었다.
“그날 일로 아직 부상이 낫지 않은 상태입니다. 다른 이를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구하려다 부상을 입었다는 거 알아요. 그래서 더욱 아샤 경이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황녀님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었다. 아나샤는 이러다 두 사람이 언쟁이라도 벌일까 긴장이 될 정도였다.
“저기, 단장님.”
결국 아나샤가 나서서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오도록 만들었다. 리히르트는 언제 단호하고 날카로운 기세를 띠고 있었냐는 듯이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은 무르게 눈빛을 바꾸었다.
“아직 한 손이 다 낫진 않았지만 황녀님께 작게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요! 비록 전투는 힘들어도 위험한 인물이 접근하면 바로 튀어나가서 알릴 수도 있고, 황녀님 말씀대로 저는 여자니까 항상 붙어서 다른 인기척은 없나 감시할 수 있어요. 밤새 침실에서 잠복도 가능하고, 또, 또…….”
“정말 듬직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