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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25화 (25/87)

25화

“어쩌면 할아버지도, 삼촌들도, 그냥 제가 하고 싶다고 하니까 시켜준 게 아닐까 싶고… 차라리 나보다야 힘센 사람이 이 일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게 기사단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막 드는 거 있죠.”

나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온 일은 사실 남들이 하면 더 잘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몰랐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그게 현실일지도 몰랐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쯧.”

그때 맞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나샤는 고개를 들었다. 평소 자신을 혼낼 때처럼 진심으로 어처구니없는 눈빛을 한 부단장이 보였다.

“경이 상식에서 좀 벗어난 면이 있고 기사단 체제에 맞지 않는 자유분방한 인간이라지만, 경의 실력만큼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칼리프는 2년 전, 기사단에 부단장으로 첫 부임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날 겪었던 충격의 중심에는 아나샤 그녀가 존재했었다.

근엄한 모습의 기사단장은 어디 가고 단장실에는 조그마한 여자애와 말다툼을 벌이는 중년 사내만 있을 뿐이었다. 단장뿐 아니라 기사들도 그랬다. 군기는커녕 여자애 하나를 둘러싸고 가족 같은 장난스럽고 친근한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거기다 그 조그마한 여자애가 기사단의 직속 첩자라는 사실에 더더욱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상황에 따라 가장 위험할 수도 있는 직종이 첩자였다. 적지에 숨어드는 일인 만큼 위험부담이 큰 것이다.

솔직히 많이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동시에 상식을 파괴하고 다니는 조그마한 여자애가 좋게 보이지도 않았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첩자직에서 내보내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녀의 실력 때문이었다. 매번 여기저기 쏘다니기 좋아하고 매사 가볍고 계획 없이 행동한다지만 저래 봬도 한 번도 임무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

고지식한 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분명했다.

“임무를 실패한 것도 아니고 사적인 전투에서 졌다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애초에 사적으로는 실력 발휘하지 말라고 귀에 닳도록 얘기했을 텐데요.”

“암살자가 먼저 검 빼 들고 공격하는데 어떡해요 그럼…….”

“피하십시오. 그런 일에는 되도록 휘말리지 말라는 겁니다. 경은 용병이 아니라 엄연한 황실 소속입니다. 황실을 위해서만 검을 쓰십시오.”

‘황녀님 구하려 한 거니까 황실을 위해서이긴 한데…….’ 아나샤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황녀님이 암살자에게 위협을 받았다는 사실은 황실 사람과 단장님을 포함한 소수만 알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고작 한 번 진 걸로 관두려 하는 거면 실망할 겁니다.”

“관두다니요! 절대 안 관둬요.”

빨개진 얼굴로 도리질 치며 아나샤는 서둘러 반박했다. 푸념하기도 무섭다며 폭 한숨을 내쉰 그녀는 칼리프를 쳐다보았다.

“부단장님 처음 기사단에 왔을 때 저 엄청 구박했었잖아요. 단장님한테 호칭이 왜 그러냐, 기사들이랑 농땡이 피우지 마라, 진짜 잔소리 엄청 해댔었는데…….”

지금도 잔소리 듣는 건 여전하다지만. 오래전 일들을 회상하는 아나샤의 입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래도 인정해 줘서 고마워요.”

술기운 덕분인지 솔직하게 말이 흘러나왔다. 물론 낯간지러운 기분을 이겨내지 못하고 빠르게 맥주를 더 시켜 들이켜 댔지만, 아나샤는 간만에 가슴속이 후련해진 기분이었다.

* * *

해가 진 거리는 제법 어두웠다. 칼리프는 아나샤를 업은 채 기사단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뒤에서 자신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대로 등에 착 달라붙는 행태에 칼리프는 인상을 구겼다. 왜 이렇게 사람에게 달라붙는 걸 좋아하는지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부울 줘어… 딸꾹.”

“다 왔습니다. 정신 좀 차리십시오!”

깊은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칼리프는 걸음을 옮겼다. 많이 마시지 못하도록 제지했어야 했다. 취하지 않았다며 계속 술을 쏟아붓는 꼴을 보고만 있는 게 아니었다.

기사단에 도착한 칼리프는 조용히 본관 건물을 지나쳐 걸어갔다. 누가 이 모습을 보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최대한 빨리 아나샤를 숙사 방에 내려놓고 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건물 외벽을 돌기 무섭게 마주친 기사단장으로 인해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멈춰 선 칼리프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이었다.

“…내려줘어, 딸꾹.”

그보다 먼저 등에 업혀있던 아나샤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누가 들어도 술에 잔뜩 취해 꼬인 발음이었다. 동시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칼리프는 서느렇게 가라앉는 눈과 마주치기 무섭게 온몸이 굳어버렸다. 변명의 말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뒤늦게 기사단장인 그가 먼저 걸음을 떼 제게로 걸어오자 칼리프는 머리를 숙였다.

“단장님께 추태를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아나샤 경을 대신해 사과드리겠습니다. 부상을 입은 것이 꽤나 속상했는지 조금 과음을 해버렸습니다……. 부디 깊은 아량으로 헤아려 주시길.”

대하기 어렵기로 소문난 단장님과 유일하게 사이가 가까운 아나샤였다. 눈감아 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으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제 말은 들리지도 않는단 듯이 저를 지나쳐 갔다.

그의 걸음은 정확히 자신의 뒤에서 멈추었다. 아나샤의 어깨를 붙잡아 뒤로 물린 것인지 등에 닿아있던 따스한 몸이 떨어졌다.

“아샤 경, 정신이 듭니까?”

“으음…….”

나직한 저음은 분기는커녕 그녀를 향한 걱정마저 담겨있는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정말 그녀에게 너그러운 모양이었다. 물론 자신은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그의 태도에 안도해야 되는 건지, 기분 나빠 해야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들지.”

그때 처음으로 들려온 말에 칼리프는 황급히 대답을 내놓았다.

“…아닙니다. 아나샤 경은 제가 방에 데려다 놓겠습니다. 단장님께서 굳이 수고를 하실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 했으나 칼리프는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마주친 시선에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가 불쾌해하고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안 가고 뭐 하냐는 듯이 냉랭하게 바라보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지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칼리프는 예를 취하고서 한발 물러섰다. 누구한테 업혔는지도 모른 채 졸리다며 연신 꿍얼거리는 아나샤를 한번 쳐다보았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 * *

단장실로 돌아온 리히르트는 아나샤를 소파에 앉혔다.

그녀가 숙사 어느 방에 머무르는지 모르는 데다 그녀의 허락 없이 함부로 방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자신의 저택으로 가 객실을 내어주는 방법도 있지만 그사이 술이 깰 수도 있으니 일단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으으음…….”

“춥습니까?”

리히르트는 입고 있던 제복 겉옷을 벗어 그녀의 상체에 덮어주었다. 그리고 바로 물러나려는 순간, 두 팔이 뻗어져 와 그의 허리를 와락 끌었다.

“…아샤 경?”

잠시 숨까지 참고 있던 그는 이윽고 그녀를 제게서 떨어뜨리기 위해 작은 어깨를 쥐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밀어내려 하면 그녀는 더욱 달라붙어 왔다. 얼굴을 파묻고서 따스한 어미의 품에 파고들려는 새끼 짐승처럼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리히르트는 가슴 아래 위치해 있는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낮게 숨을 흘렸다. 도저히 이 간지러운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한동안 굳어있던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여 눌려있는 그녀의 뺨을 제 품에서 떨어뜨렸다. 어느새 잠이 든 것인지 눈을 감은 채 색색대는 뽀얀 얼굴이 드러났다.

손바닥에 닿은 분홍빛의 뺨은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몰래 한번 만지작거려 보고 싶은 충동이 들 만큼.

‘…….’

리히르트는 퍼뜩 손을 거두며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머리 한 부분이 이상하게 된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이런 저 자신이 지나치게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품은 감정이 인간적인 호감 이상이라는 것을 인정한 지도 며칠이 지났다.

받아들이면 그것으로 끝일 감정이라고 여겼다. 그녀와 어떻게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서로 신뢰하고 편히 지낼 수 있는 지금 이 관계가 최선이라 여겼다. 무엇보다도 드러낸다면 그녀가 불편해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마음은 숨길 수 있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다. 그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그녀를 보는 시선이, 손길이 절로 달게만 변하는 것이다.

리히르트는 다시 한번 흘러나오려는 숨을 삼키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마음이 커져선 안 된다고 결심한 지 몇 초도 지나지 않았을 때다.

“리온…….”

잠결에 흘러나온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었으나, 그의 귀에는 그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 * *

평소처럼 노크를 하고 단장실에 들어선 행정관은 묵직한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맨 위에 있는 서류들은 오늘 중으로 처리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달러스 지역 파견에 관해서……. 저 단장님?”

행정관은 무표정한 얼굴의 기사단장을 불렀다. 그제야 다른 곳을 바라보던 푸른 눈이 행정관을 똑바로 응시했다. 어딘가 흐트러진 표정이, 매사에 빈틈없고 냉정하며 차분한 그답지 않아 보였다. 행정관은 당황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달러스에 파견 보낼 기사 명단은 일주일 안으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처리한 서류들은 왼쪽에 두었다.”

“아, 네.”

행정관은 황급히 왼쪽에 쌓인 서류들을 집어 들다가 서류가 이상하게 깨끗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죄송하지만, 이건 아직 처리 전인 것 같습니다만…….”

조심스러운 그 말에 리히르트는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대답 대신에 눈길을 오른쪽으로 옮겼다. 행정관은 그의 눈길이 닿은 책상 오른편에 쌓여있는 서류 탑을 품에 안아 들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행정관이 나가고 조용해진 단장실 안에서 리히르트는 눈가를 문질렀다. 무표정한 낯 위로 짙은 피로가 스며들었다. 어제도 늦게까지 업무를 보긴 했지만 평소에 비하면 일찍 잠자리에 든 편이었다. 그러나 개운하기는커녕 기분은 평소보다 저조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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