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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24화 (24/87)

24화

“방금 건 어쩔 수 없었어요. 고양이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단 말이에요.”

“절 부르면 되지 않습니까.”

“단장님께 어떻게 나무에 올라가라고 시켜요. 그리고 그렇게 무리한 것도 아니었어요.”

“한 달은 쉬어야 합니다.”

“솔직히 한 달은 너무 길어요. 로던 삼촌도 예전에 어깨에 큰 부상을 입었었는데 이 주 만에 복귀했었단 말이에요.”

어떻게 고작 손목 하나 다쳤다고 한 달을 쉴 수 있을까. 아무리 노는 것을 좋아하는 자신이라도 이건 너무하다는 입장이었다.

“답답한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대로 회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를 했다간 상태가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리히르트는 차분하게 그녀를 설득했다.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은 담담했으나 그는 속으로 매우 안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업무 중에 잠깐 그녀를 찾으러 나와서 다행이었다.

“한 달 동안은 낫는 것에만 전념하십시오.”

“하지만…….”

“쉬는 동안은 벽 오르기, 나무 타기 등의 위험한 행위는 일절 금지입니다.”

“위험하지만 않으면 낮은 곳에는 올라가도…….”

“안 됩니다.”

칼 같은 대답에 그녀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리히르트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이어 말했다.

“붕대는 새로 감는 게 좋겠습니다.”

“넵. 알겠어요…….”

“의무실까지 같이 가주겠습니다.”

“아니에요. 해야 될 일도 있으시고 바쁘시잖아요. 저 혼자 갈게요.”

그녀는 씩씩하게 웃으며 말했으나 의무실로 걸어가는 뒷모습은 왠지 힘이 없어 보였다. 리히르트는 그녀를 따라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말대로 해야 될 일이 있었다.

그는 최근 들어 매일 철야를 할 만큼 바빴다. 암살자를 찾는 일에 모든 힘을 쏟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단서는커녕 치밀하게 모든 행적을 지워 배후를 알아내기 힘들었으나, 그는 지치기는커녕 심복들까지 동원해 더욱 끈질기게 추적하는 중이었다.

타인의 감정 변화에 무딘 리히르트 그였으나 그녀에 한해서만큼은 예외였다. 그의 모든 신경은 그녀에게 향해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리히르트는 무도회 날 이후로 그녀가 남모르게 울적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자신도 여전히 그날 사건으로 기분이 좋지 못한데 당사자인 그녀는 더할 터였다. 그러니 쉬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아 자꾸만 조급해하는 것일 테다.

한동안 멀어지는 작은 뒷모습을 응시하던 리히르트는 뒤늦게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암살자를 잡고야 말겠다는 의지만이 여전히 소리 없이 불타고 있었다.

* * *

아나샤는 새 붕대로 칭칭 감은 제 왼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훈련 중이라 바쁘고, 자신만 한가하게 연무장 주변에 앉아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단장님은 한 달은 푹 쉬라고 했지만 지금 당장 할 것도 없어 갑갑한 와중에 한 달을 어떻게 보낼지 막막했다. 평소라면 단장님을 붙잡고 떠들어 댔겠지만 며칠째 철야까지 할 정도로 바빠진 그를 알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해는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아나샤는 흙을 털고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속이 답답한 게 혼자 술이라도 마실까 싶었다.

‘그래도 혼자 마시는 건 좀 그런데.’

누구 하나 꼬실 생각이었으나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삼촌들은 안 되었다. 보나 마나 단체로 우르르 몰려갈 게 분명한 것이다.

어디 한가한 사람 없나 하고 기사단 부지 안을 돌아다닐 때였다.

본관 정문에서 걸어 나오는 검은 머리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귀족’이라고 등에 딱 붙여 써놓은 것처럼 꼿꼿한 자세로 걷고 있는 이는 부단장 칼리프였다.

아나샤는 동그랗게 입을 모았다. 뜻밖에도 술 상대로 적합해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슨 푸념을 늘어놓아도 호들갑을 떨지도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그는 말이 많았다. 혼자 쓸쓸히 술을 마시는 것보단 차라리 그의 잔소리라도 듣고 있는 게 덜 지루할 것 같았다.

“부단장님!”

한달음에 달려온 아나샤의 모습에 칼리프는 상당히 떫은 표정을 지었다.

“…또 무슨 사고라도 친 겁니까?”

“사고 안 쳤으니까 표정 풀어도 돼요.”

“…….”

“아 진짜! 사람 말 못 믿어요?”

“경은 예외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네 말을 믿겠냐’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나샤는 눈매를 구기고 있다가 자신의 목적을 상기하고서 다시 동그랗게 눈을 떴다.

“어디 가세요?”

“가택으로 갑니다만.”

“오, 퇴근하시는구나. 그럼 저랑 같이 술이나 한잔할래요?”

“드디어 경이 미쳤군요. 하하.”

칼리프는 이마를 짚고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웃음소리는 뚝 끊겼다.

“절대 싫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바로 거절할 건 없잖아요. 저 부단장님 말고도 같이 술 마실 사람 많거든요?”

“그것참 다행이군요.”

진심으로 상쾌한 듯 말하는 그 모습에 아나샤는 괜한 오기가 생겼다.

“아쉽네요. 물론 저 말고 부단장님이요. 거기가 맥주 맛이 진짜 일품인데 부단장님은 평생 못 마시겠네요.”

먼저 앞질러 가려던 칼리프의 눈썹 끝이 움찔거렸다. 그것을 잽싸게 캐치한 아나샤는 그의 옆에서 계속 종알종알 말을 걸었다.

“웬만한 술집은 다 가봤지만 거기만큼 술맛이 기가 막힌 데가 없거든요. 술 좋아하는 사람이면 꼭 가봐야 될 만큼! 저도 삼촌들 따라갔다가 어쩌다 우연히 알게 된 곳인데 진짜 저만 알고 싶을 정도거든요. 거리도 가까운 편이라 걸어가도 되는데, 뭐 가신다면 붙잡지 않겠지만요. 근데 술맛도 술맛이지만 안주도 정말 끝내주는…….”

“한 번 정도라면 경과 같이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마침 물어볼 얘기도 있었고.”

“아깐 미쳤냐면서요.”

“한 번쯤은 미친 짓도 괜찮겠죠.”

칼리프는 그녀를 돌아보며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고상한 귀족처럼 턱을 치켜든 채 안내하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 아나샤는 기가 찼으나 결국 그를 데리고 술집으로 향했다.

성벽 외곽 주변에 위치한 작은 술집은 투박한 멋이 흐르는 곳이었다. 위치도 가까워서 기사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는데 오늘은 제법 한산한 편이었다.

아나샤는 맥주 두 잔과 가장 유명한 안줏거리를 시켰다. 자신의 머리만 한 맥주잔을 들고서 아나샤는 술을 들이켰다. 맥주 거품을 입술에 가득 묻히며 내려놓자 여전히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켜고 있는 부단장이 보였다.

나무 테이블을 중간에 두고 마주 앉아있는 부단장의 모습은 제법 생소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곧 칼리프가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뭡니까?”

“아니, 뭔가 이런 장소에 익숙해 보여서요. 맥주잔이 나무 잔이라고 못마땅해할 줄 알았는데 엄청 덤덤하고.”

“아카데미에 다닐 때 신분을 숨긴 채 이런 허름한 술집에 몇 번 갔었습니다.”

“네?! 거짓말!”

“믿기 싫으면 믿지 마시죠.”

칼리프는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아나샤는 왠지 모를 배신감에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까지 귀족 중의 귀족처럼 깐깐하게 굴어놓고 사실 이런 일탈을 몰래 즐겨왔었다고 하니 기가 막혔다.

“진짜 의외…, 그럼 그동안 왜 그렇게 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거예요!”

“그야 경이 기사단의 규율과 체제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니 그렇지 않습니까? 사적으로는 많이 봐준 걸로 압니다만.”

“배신… 진짜 배신!”

“사람의 일면만 보고 판단한 그대 잘못이지요.”

반박하고 싶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입술을 닫았다 떨어뜨리길 반복하던 아나샤는 결국 맥주만 연거푸 들이켰다. 차가운 맥주에 속이 가라앉자 조금은 답답함이 가셨다.

하긴 단장님도 전혀 대귀족 같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냉혹하다는 소문과 달리 알고 보면 아랫사람에게도 예의를 차려주는 겸손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캬!”

아나샤는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고 한참 술만 들이켜 댔다. 알딸딸하게 술기운이 오르자 두 뺨 위로 발갛게 홍조가 떠올랐다.

“아나샤 경, 벌써 취한 것 같습니다만.”

“아 정말! 딱딱하게 아나샤라고 부르지 말고 아샤라고 부르라고 해도 그러네요. 단장님도 저한테 아샤 경이라고 불러주는데. 그보다 저한테 뭐 묻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직 안 취했다며 부릅 눈을 뜬 아나샤가 물었다. 술집에 오기 전 물어볼 것이 있다던 그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이에 칼리프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아나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왼손에 시선을 주었다. 뭘 물으려는지 알아차린 아나샤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다시 술만 들이켜던 아나샤는 빈 맥주잔을 내려놓고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삼촌들이랑 다른 사람들한테는 착지 잘못해서 다쳤다고 했는데… 뭐, 부단장님은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닐 성격은 아니니까 말해줄게요.”

“다들 그걸 믿는답니까? 그보다 왜 다친 겁니까?”

“암살자랑 싸우다가 부상 입은 거예요. 놀리지 마세요.”

“안 놀립니다. 걱정 마시죠.”

남의 부상을 놀림거리 삼을 만큼 저질스러운 인간은 아니라며 칼리프가 점잖이 말했다. 물론 표정은 대체 자신을 뭘로 보냐고 쏘아붙이려는 것을 간신히 참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더 자세히 묻지 않고 기다리자 얼마 안 가 맞은편에서 풀이 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분해요. 나는 이것밖에 없는데… 어릴 때부터 첩자가 되고 싶어서 진짜 노력했는데도 남자들은 쉽게 나를 이겨버리잖아요. 그저 힘으로요.”

아나샤는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바람 빠지듯이 긴 한숨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아무리 실력을 쌓아도 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 같아요……. 나는 남들보다 작잖아요. 신체적인 건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 일을 못하게 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저번 사건으로 달라졌다. 언제든 이 일을 못하게 될 수 있다고 여기니 새삼 자신의 실력에 의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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