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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23화 (23/87)

23화

그 순간, 감겨있던 눈이 떠지며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곧 상황을 파악한 리히르트가 흠칫하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죄송해요! 제가 깨웠죠. 자세가 불편해 보여서 고쳐준다는 게…….”

“아닙니다. 얘기 중에 잠들어서 미안합니다…….”

그 말에 아나샤는 두 눈에서 보이지 않는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헛소리를 묵묵히 들어준 것도 고마운데, 진지한 고민인 줄 알고 열심히 경청해 준 그에게 감동스러운 마음마저 느꼈다.

“아니에요. 사실 들을 필요도 없는 얘기였어요. 그보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잠깐이라도 눈 붙여요! 제가 베개 해줄게요.”

그렇게 말한 아나샤는 리히르트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두 귀를 감싸자 그의 눈이 제게로 닿았다. 눈빛이 살짝 떨리는 것이 많이 피로한 모양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치민 아나샤는 그대로 그가 누울 수 있게 살짝 힘을 주어 당겼다. 붕대로 감긴 왼손으로 자신을 잡으니 리히르트는 차마 그녀의 손에 무리가 갈까 거부하지 못한 채 순순히 그녀의 손에 따라 움직여야만 했다.

이윽고 그의 머리가 아나샤의 무릎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는 가시방석 위에 머리를 댄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은 낯이었다.

“괜찮…습니다. 이러지 않아도.”

“사양 말고 베고 누우셔도 돼요. 머리 하나 정도야 무겁지도 않다구요.”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에이, 괜찮아요. 무릎 정도는!”

한사코 거절하는 그를 아나샤는 외려 말렸다. 확실히 자세가 편하긴 한지 그는 곧 침묵을 지켰다.

“보세요. 편하죠?”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너무 다정하게 느껴져 리히르트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정면에는 그녀의 말간 얼굴이 가까이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히르트는 차마 계속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어 눈을 감았으나 그것은 그를 더욱 고역에 시달리게 했다.

이상하게 자꾸만 의식하게 되었다. 그녀의 뜨거운 체온이나 부드러운 향이 무의식중에도 느껴져서 본인이 이상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편히 감은 듯해도 조금씩 떨리는 긴 눈썹에 아나샤는 흘러내린 앞머리가 불편해서 그런가? 넘겨짚었다. 손을 들어 하얀 실타래 같은 금색 머리칼을 조심스레 피부에 닿지 않게 옆으로 쓸어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 손길에 그는 고문 아닌 고문을 받는 기분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몽롱했던 정신은 어디 가고 온몸의 모든 감각이 맑게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강제로.

심장박동 소리는 원래 귓가를 가득 메울 만큼 컸었던가. 단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뿐인데도 흉부를 강하게 억눌린 것처럼 힘이 들었다. 귓가가 달아오르고, 입 안이 자꾸만 말라오는 것이 이상했다.

그리고 이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태연한 척하는 것은 괴로웠다. 금방이라도 기침이 나올 것처럼 폐 속부터 피부까지 모든 감각이 간질거렸다.

처음 겪는 이상 현상이었으나 그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제는 제 마음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5장 두 사람의 거리 (1)

해가 중천에 뜬 시간 아나샤는 느지막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느긋하게 하품까지 터뜨리며 방 안에 딸린 작은 욕실로 들어갔다.

평소라면 어푸어푸 소리가 날 만큼 요란한 세수를 했겠지만 한 손으로만 씻으려니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결국 고양이 세수로 대신하고서 욕실을 나와야만 했다.

옷을 갈아입는 것도 평소보다 두 배는 더 걸렸다. 고작 왼손 하나 쓰지 못하는 것뿐인데도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대충 준비를 마친 아냐사는 별관 건물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은 점심을 먹기 위해 온 기사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나샤는 배식을 받기 위해 서있는 기사들 중간에 끼어들며 말했다.

“오늘도 스튜야? 난 감자 수프가 더 좋은데.”

“어딜! 그런 식으로 은근슬쩍 끼어들면 모를 줄 알고?”

“그래. 오늘은 안 봐준다. 맨 뒤로 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삼촌들이 한마디씩 보태자 아나샤는 비장의 수단을 꺼내 보였다.

“한 번만 봐줘. 나 손 다쳤어.”

“뭐…, 너 손이 왜 그래?!”

붕대로 감긴 왼손을 발견한 기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눈을 부릅떴다.

“진짜 다쳤네! 어쩌다가 다친 거야?!”

“누가 다쳤다고?”

“아샤가 다쳤대! 한 손을 아예 붕대로 못 쓰게 해놨는데?”

“어디, 어디 봐!”

앞에서 배식을 받고 있던 기사들도,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던 기사들도 일제히 아나샤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개중엔 냅다 다가와 아나샤의 손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아니, 누가 애를 이렇게 만든 거야!”

“누가 그랬냐! 아주 잡히기만 해봐라, 혼쭐을 내줘야!!”

“혼쭐은 무슨! 그냥 나 혼자 착지 잘못해서 삔 거야. 그만들 모여!”

웅성웅성 하나둘 모여드는 기사들에 아나샤는 부담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이래서 삼촌들 앞에서는 엄살도 못 부리겠다 싶었다.

“일주일이면 다 나을 거야… 뺨은 조금 긁힌 거고.”

“정말 긁힌 거 맞아? 어떤 천하의 호로 잡놈의 새끼가 칼로 덤벼든 건 아니고?”

“붕대 감을 정도면 일주일은 더 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착지했길래 손목이 다 나가?”

“그러게 조심 좀 하지, 녀석아!”

동료 기사들의 걱정이 담긴 위로를 뒤로하고, 삼촌들의 잔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귀가 따가웠지만 반대로 몸은 몹시 편했다.

“이럴 때가 아니라 애 밥 좀 먹여야지. 너 좀 비켜봐.”

크리스가 근처 식탁에 앉아있던 기사 하나를 쫓아내었다. 덕분에 아나샤는 줄 설 필요도 없이 바로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한 입 맛보기도 전에 강제로 식판을 빼앗긴 기사의 억울한 눈빛이 느껴졌지만.

“빼짝 말라가지고, 이래서 금방 낫겠냐? 더 먹어.”

“그래. 많이 먹어야지 금방 낫지.”

삼촌들의 배려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자신이 좋아하는 과일이나 빵을 식판 위에 손수 놓아주기까지 했다. 산처럼 쌓인 그것들을 먹어치우느라 아나샤는 어느 때보다도 배부르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좀 편리할지도?’

이런 장점이면 일주일은 편히 지낼 수 있겠다고 아나샤는 생각했다.

* * *

그 생각은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말끔히 사라졌다. 왼손을 사용하지 못해 발생하는 생활 속 불편함은 생각보다 컸다. 소소한 것 같아도 쌓이고 쌓이니 꽤 답답했다.

그리고 현재 가장 큰 불만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이동할 때였다.

아나샤는 남들처럼 일일이 걸어 다니는 것에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단장실 창문까지 벽을 오르면 단 10초면 도착할 것을, 건물 정문까지 빙 돌아가 계단을 타고 긴 복도를 지나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훨훨 날던 새가 바닥을 총총 걸어 다니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아나샤는 나무 밑에 서서 본관 건물의 3층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오르면 금방인데…….’

휴, 하고 한숨을 내쉰 아나샤는 창문에서 시선을 뗐다. 어쩔 수 없이 정문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여기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애옹.”

위에서 들려온 소리에 아나샤는 고개를 쳐들었다. 나무 꼭대기에 자라있는 푸른 잎들이 흔들리더니 얼마 안 가 하얀 털의 고양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 왜 거기 있어!”

익숙한 고양이의 모습에 아나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지 혼자 나뭇가지 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앵앵 울고만 있었다. 마치 그녀에게 도와달라는 양 그녀만 빤히 내려다보며 말이다.

기사 중 한 명을 불러올까 싶었지만 훈련 시간이기도 했고, 그사이 고양이가 떨어져 다칠까 걱정이었다. 결국 아나샤는 빠르게 붕대를 풀었다. 부목과 붕대를 바닥에 내려두고서 오른손으로 나뭇가지를 단단히 붙잡았다.

나머지 왼손으로도 나뭇가지를 붙잡은 그녀는 나무를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손목이 살짝 지끈거렸으나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잠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 정돈 가능할 것 같았다.

아나샤는 거친 나무 표면 위에 단단히 발을 디디고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이윽고 야옹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아나샤는 고개를 들었다.

“이리 온. 착하지.”

아나샤가 손을 뻗자 고양이는 냉큼 그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무서운지 발톱까지 세우고서 옷에 매달려 있는 고양이의 모습에 아나샤는 작게 웃었다.

“그러니까 왜 올라갔어. 떨어지면 어쩌려구.”

“먀아옹. 먀옹.”

“그래그래, 얼른 내려갈게.”

왼팔로 고양이를 감싸 안고서 아나샤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을 실은 채 나무에 튀어나온 부분을 밟으며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디딜 때였다.

오른발을 지탱하고 있던 나무껍질이 순간 부러지며 발도 함께 미끄러지듯이 아래로 쑥 꺼졌다. 아나샤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으로 머리 위의 나뭇가지를 붙잡아 매달렸다.

몰론 한 손으로는 오래 버티기엔 무리가 있었다. 어떻게든 발 디딜 곳을 찾기 위해 발로 나무 표면을 훑고 있는데 반갑게도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나샤는 아래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금발이 눈에 들어오자 더할 나위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저 좀 받아주세요!”

그 말을 하기 무섭게 힘겹게 버티고 있던 오른손에서 힘이 풀렸다. 떨어져 내리는 아찔한 느낌이 드는 동시에 자신을 가뿐히 받아주는 든든한 품이 느껴졌다.

리히르트는 그녀를 땅에 내려주었다. 이에 아나샤는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내뱉고는 품에 안겨있는 고양이가 무사한지 확인했다. 놀랐는지 고양이는 얌전히 매달려 있었다.

“단장님 덕분에 살았어요. 고마워요.”

“…….”

“너도 감사하다고 해야지?”

“애옹.”

아나샤는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고양이는 잠깐 아나샤의 다리 주변에서 떠나지 않다가 곧 리히르트가 다가오자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무리하지 않아야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자상하면서도 어딘가 단호했다. 아나샤는 머쓱하게 왼쪽 손목을 감싸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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