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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22화 (22/87)

22화

* * *

속눈썹 사이를 찌르는 햇살에 아나샤는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느껴진 욱신거리는 통증에 그녀는 왼손부터 확인해야 했다. 하얀 붕대로 감긴 제 손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뒤늦게 들어온 방 풍경에 눈을 크게 떴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넓은 객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나샤는 어찌해야 될지 몰라 일단 몸을 일으켰다. 이전에 한번 이곳에서 잔 기억이 있어 이곳이 어딘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어쩌지? 창문으로는… 못 나갈 것 같고.’

예전엔 누가 볼세라 다음 날 아침 바로 창문으로 몰래 빠져나갔다지만, 지금은 손 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이 높이에서 떨어졌다간 즉사할 게 틀림없었다.

아나샤는 창문을 다시 닫고 불안하게 방 안을 돌아다녔다.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기상하셨다면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네? 네!”

아나샤는 경례라도 올릴 것처럼 바짝 긴장한 채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회색 머리를 틀어 올린 중년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발목 위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긴 치마 위로 하얀 앞치마가 둘러져 있었다.

“주무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셨는지요?”

“아, 아뇨, 전혀요.”

“시장하실 테니 아래층에서 식사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세안과 환복을 도울 시녀를 붙여드릴 테니 준비가 끝나시면 아래로 내려오시면 됩니다.”

“아니요. 그렇게까지 해주시지 않으셔도!”

태어나 한 번도 시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아나샤가 부담감에 허둥지둥할 때, 이 저택의 시녀장인 마를린은 차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기사님의 모든 편의를 봐드리라는 가주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왼손에 부상을 입으신 것 같은데 모쪼록 편히 맡겨주십시오.”

“그렇다면 뭐… 부탁드릴게요.”

괜히 거절하기도 뭐하자 아나샤는 얌전히 수락했다. 그녀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좀 더 젊어 보이는 두 명의 시녀가 들어왔다.

“원래 입고 계시던 검은 복장은 깨끗이 세탁하여 말리는 중입니다. 야외 외출복으로 적당한 옷이 셔츠와 바지뿐인데 이걸로 갈아입혀 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괜찮아요.”

다른 사람 앞에서 제 맨살을 드러내는 것이 조금 부끄러워 아나샤는 뻣뻣하게 옷시중을 받아야 했다. 부드러운 린넨 셔츠와 편한 바지로 갈아입은 아나샤는 시녀의 안내를 받아 저택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혼자 앉기 뭐할 만큼 긴 식탁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식탁 옆에는 집사로 추정되는 중년 남성이 서있었다. 직접 의자를 빼주는 그의 행동에 아나샤는 왠지 부끄러워 고개만 꾸벅 숙였다.

“식사 중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저기, 그보다 단장님은요? 같이 먹는 게…….”

“가주님께서는 현재 자리를 비우신 중이십니다.”

“안 계신다고요? 혹시 지금 몇 시예요?”

“두 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태연한 집사의 대답에 아나샤는 눈이 튀어나갈 것만 같았다. 아침 식사라고 생각했는데 아침은커녕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언제 나가셨는데요? 아니 그보다 왜 안 깨우고 가셨대요!”

“그것이…….”

아나샤의 말에 집사는 조금 곤란한 듯 뜸을 들였다.

“어젯밤 기사님을 저택에 데려오신 후 바로 나가셨습니다.”

“어젯밤에 나갔다고요……?”

“네.”

밤새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에 아나샤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장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은 것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다섯 시간 전쯤 기사단에서 근무 중이라고 서신을 보내오셨습니다.”

집사는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금방이라도 기사단으로 달려갈 것 같은 그녀를 달래듯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사단으로 가시는 것이라면 마차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식사를 하고 계시겠습니까?”

그동안 마차를 대기시켜 놓겠다는 말에 아나샤는 별다른 거절의 말을 찾지 못한 채 얌전히 앉아야만 했다. 기껏 차려놓은 음식을 한 입도 먹지 않고 가면 실례일 것 같아 한 스푼 맛본 순간이었다.

아나샤는 머릿속이 작은 충격으로 번쩍이는 기분을 느꼈다. 입에 넣은 고기 요리는 혀 위에서 녹아내릴 것처럼 맛있었다.

주인 없는 저택에서 혼자 이렇게 먹고 있어도 되나 조금 죄책감이 들었으나 유혹을 이겨내긴 힘들었다. 결국 평소보다 많은 양을 먹고서 마차에 올라야 했다.

기사단에 도착한 아나샤는 곧장 단장실로 향했다. 벽과 나무를 탈 수 없으니 계단을 타고 복도를 달려서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단장님!”

업무를 보던 상태 그대로 리히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문을 닫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제 피로에 찌들어 있었냐는 양 그의 눈은 오로지 눈앞에 서있는 그녀를 걱정스레 살폈다.

“몸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왼손만 빼면 완벽할 정도로 좋아요. 그보다 밤새우셨다면서요? 안 피곤해요?”

“조금 피곤하지만 괜찮습니다. 한 달간은 무리하지 말고 쉬십시오. 왼손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도록…….”

“저 말고 단장님이 쉬셔야 할 것 같은데요……?”

여전히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라지만 그 위에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햇살에 물든 금빛 머리칼이 바스라질 것처럼 힘없이 반짝거렸다. 하얀 피부는 평소보다 더 창백한 것 같았고, 눈가 아래로 희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일이 많은 거예요? 얼마나 남았는데요?”

대체 하루 동안 무슨 업무가 그렇게 많이 쌓였기에 철야로 처리해도 남아있나 싶었다. 여기서 아나샤가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그가 업무 자리에 앉은 지는 고작해야 여섯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 리히르트는 황녀를 위협하려던 복면인을 잡는 것에 모든 시간을 할애했었다. 황태자에게 직접 이번 사건을 맡고 싶다고 부탁하여 모든 수사 권한은 그에게로 넘어온 상태였다.

리히르트는 아직까지도 어젯밤 일이 생생하기만 했다. 나뭇가지처럼 가는 손목이 심하게 꺾인 채 잘게 떨리던 모습을 다시 생각하노라면 머릿속이 분노로 하얗게 변해버리는 것이다.

서느런 분노는 여전히 가슴속에 응어리진 채였다. 복면인을 잡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는 터라 잠시 눈을 붙여야겠단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저 단장님?”

“…미안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있었습니다.”

그는 평정심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으나, 아나샤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단장님, 정말 안 주무셔도 돼요? 잠깐이라도 소파에서 눈 좀 붙이는 게 어때요? 네?”

“아직 버틸 만합니다.”

‘그렇게 버티다 큰일 난다니까요!’ 우리 단장님… 쓰러지시면 어떡하나. 아나샤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를 잠깐이라도 자연스레 재울 만한 무슨 좋은 생각이 없을까. 한동안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그의 주변을 겉돌던 아나샤가 책상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활활 타오르는 충성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문득 기가 막힌 작전 하나가 떠오른 것이다.

“예전에 저랑 기사단 뒤편에 산책 나가도 좋을 것 같단 얘기 했던 거 기억나세요?”

“…산책 말입니까?”

“네. 지금 잠깐 바람 쐬러 갈래요? 계속 앉아있었잖아요. 어디서 들었는데 오래 앉아있으면 오히려 일에 더 집중이 안 된대요. 몸 찌뿌듯하지 않으세요?”

제법 그럴듯한 말이었는지 그는 순순히 몸을 일으켜 주었다. 아나샤는 말갛게 웃는 얼굴로 먼저 문으로 걸어갔다. 그녀를 아는 다른 사람이 봤다면 뭔가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 같다고 얘기할 표정이었으나, 리히르트 그의 눈에는 마냥 해사해 보이기만 했다.

두 사람은 기사단 뒤편의 산책로를 따라 함께 걷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는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었고,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했다.

리히르트는 그녀 말대로 나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조금 피로하긴 했지만 탁 트여있는 풍경 덕분인지 확실히 기분 전환은 되었다.

“우리 잠깐 앉았다 가요.”

먼저 달려가던 아나샤가 들판 위에 편하게 두 다리를 펴고 앉았다. 그리고 그를 돌아보며 옆자리를 토닥였다. 리히르트는 그녀 옆에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앉았다.

두 사람 다 잠시 말없이 앉아있을 때였다. 아나샤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요. 가끔 생각해요.”

“무슨 생각 말입니까?”

“사는 거요.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고…….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 걸까요. 그리고 산다는 건 무엇일까요? 살아있기에 행복한 걸까요, 행복하기 위해 살아있는 걸까요. 애초에 행복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이런 소소한 여유와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요.”

그녀를 아는 다른 이가 듣는다면 ‘얘가 미쳤나?’ 하고 생각할 얘기도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잠잠히 들어주고만 있었다.

아나샤는 그 모르게 속으로 사악하게 웃었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진지하게 굳힌 채 인생 얘기를 끝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먼저 자리를 뜰 수 없도록 무겁게 분위기를 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날씨 좋은 날, 한가로이 들판에 앉아있다 보면 나른한 기분에 취해 눈이 감기기 마련이었다. 거기다 얘기까지 지루하면 졸음을 견디기는 더욱 힘들 터였다. 그리고 아나샤의 예상은 적중했다.

‘계획대로군…….’

그가 서서히 눈을 감았다. 이에 아나샤는 횡설수설하던 목소리를 작게 낮추며 그를 살폈다.

단순히 눈만 감은 건지, 진짜 조는 건지 의심이 들 때였다. 그의 머리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불편해 보이는 그 모습에 아나샤는 고민했다.

그가 잠시라도 편히 잠들 수 있게 자신의 어깨를 빌려줄까 했지만 어깨가 너무 낮다 보니 오히려 기대는 게 불편할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아나샤는 조심스레 그의 옆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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