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아나샤는 황급히 기둥에서 떨어져 그것을 피했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했는지 뺨이 따끔거렸다. 눈 아래로 둘러진 검은 천은 길게 찢어져 있었다.
그사이 아래로 내려온 정체불명의 복면인은 어느새 황녀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아나샤는 곧바로 허리 뒤쪽에 매고 있던 작은 단검을 뽑아 들었다. 황녀의 앞을 막아선 순간 복면인이 아나샤를 향해 달려들었다.
“윽, 도망가세요!”
부딪쳐 온 단검의 무게에 손목이 다 지끈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물러났다간 황녀에게로 검이 갈까 봐 그럴 수 없었다.
예리한 후각은 눈앞의 상대가 위험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피를 묻힌 건지 눈앞에 위치한 단검에선 짙은 피비린내가 맡아졌다.
굳어있던 황녀가 무도회장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자 아나샤는 빠르게 단검을 흘려 보내고서 상체를 숙였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바로 공격을 시도했으나 암살자는 그 공격들을 가볍게 쳐내버렸다.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연신 울려 퍼지는 동안 아나샤는 다른 손을 뒤로 가져갔다. 그리고 숨겨놓은 다른 단검을 쥐고서 암살자를 향해 찔렀다.
양손으로 공격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암살자가 그것을 쳐내기 위해 손의 방향을 바꾸자 아나샤는 재빨리 반대쪽 단검을 움직여 암살자의 팔등에 꽂았다.
제법 깊숙이 파고들어 고통이 상당할 텐데도 암살자는 잠깐 주춤할 새도 없이 아나샤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었다. 오히려 강하게 내리치듯이 단검을 휘둘러 아나샤와의 간격을 넓혔다.
그는 자신의 팔등에 꽂혀있던 단검을 뽑아내었다. 그 찰나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아나샤가 덤벼든 순간, 굵은 핏방울이 아나샤의 얼굴 위로 튀었다. 뽑아낸 단검을 쥐고 바로 휘둘러 온 것이다.
다친 팔로 반격해 오리라곤 생각지 못한 아나샤가 물러나려 할 때였다. 암살자가 다른 한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던졌다. 아나샤가 그것을 피하기 위해 왼쪽으로 몸을 튼 순간 거대한 손이 그녀의 왼쪽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그리고 손을 빼내기도 전에 그대로 역으로 꺾어버렸다.
“아악!!”
순간 어마어마한 고통에 아나샤는 비명을 질러야 했다. 정신을 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극통에 단검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아나샤는 떨어지는 단검을 오른손으로 받아내었다. 그대로 복면을 뒤집어쓴 옆얼굴을 향해 휘둘렀으나 그는 가볍게 고개를 꺾어 피하곤 더 세게 아나샤의 손목을 꺾어버렸다.
암살자는 그대로 아나샤의 머리를 붙잡아 아래로 넘어뜨렸다. 그대로 몸 위에 올라탄 그가 그대로 단검을 세워 어깻죽지에 박아 넣으려던 순간, 아나샤가 그의 복부를 걷어찼다.
갑작스러운 타격에 암살자의 몸이 일순 미동을 보였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시도는 좋았지만 약해.”
복면 너머로 거칠거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암살자는 아나샤의 목에 단검을 가져다 대었다.
아나샤는 물기가 어려 흐릿해진 시야로 검은 복면을 노려보았다. 그 정도의 악력이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제 목을 자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더 반항할 시간이라도 주듯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나샤는 더 분했다. 힘껏 발악해도 상대도 되지 않는 것 같아서, 힘 차이로 진다는 게 너무나도 분했다.
그때였다.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이곳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암살자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자 아나샤는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암살자의 시선이 잠시 아나샤에게 머물렀다. 그는 가볍게 그 손길을 뿌리치고선 아나샤의 머리맡에 단검을 던져둔 채 사라졌다.
* * *
무도회장으로 돌아온 리히르트는 아나샤가 마실 음료부터 찾았다. 단 걸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작은 디저트가 담긴 접시까지 들고서 그는 빠르게 회장을 벗어났다.
공작인 그가 시종 노릇을 자청하고 있다지만 그는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리히르트는 이 들뜨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힘겨울 정도였다.
마신 술이라 해봤자 고작 칵테일 몇 잔이었다. 웬만한 독한 술에도 잘 취하지 않는 그라지만, 리히르트는 어쩌면 자신이 취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마음이 들뜨는 이유를, 걸음이 점차 빨라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차분한 달빛이 내려앉은 어두운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 애써 차분하려 애쓰며 그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중이었다.
맞은편 복도에서 누군가가 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나타난 사람은 그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놀란 얼굴의 황녀는 빠르게 그를 향해 다가왔다.
리히르트가 묵례를 하고 그녀를 지나치려 할 때 떨리는 손이 그를 붙잡았다.
“복도에 암살자가 있어요.”
그 말에 리히르트의 눈길이 황녀에게로 향했다.
“절 해치려는 걸… 어떤 검은 복장의 사람이 막아줘서…….”
덕분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는 말이 이어졌으나 그는 뒷얘기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검은 복장의 사람’이란 말을 뒤로하고 모든 소리가 차단된 것만 같았다.
리히르트는 들고 있던 것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달렸다. 그녀와 헤어졌던 장소로 향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연무복과 머리가 흐트러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달려간 그곳에는 아나샤 그녀가 있었다.
어두운 복도 위에 쓰러져 있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찬 순간, 리히르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불안한 예감에 크게 술렁이던 심장이 순식간에 멎은 것 같았다.
붉은 피로 얼룩진 단검이 그녀 머리맡에 떨어져 있었다. 심한 부상을 입은 것인지 그녀의 손과 얼굴도 피투성이였다.
“…단장님.”
그때, 그녀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눈물로 번진 그 눈을 마주한 순간 리히르트는 온몸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던 그는 침착하게 행동을 옮겼다.
리히르트는 그녀 옆에 다가가 몸을 숙였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 몸 위에 덮어준 후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리고 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아파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조금만…….”
“그보다 암살자가, 아직 멀리 가진 못했을 거예요.”
암살자를 뒤쫓는 게 먼저라고 말하려던 아나샤는 그의 표정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일그러진 미간과 굳게 다물린 입이 마치 본인이 다치기라도 한 것처럼 아파 보였다.
애초에 그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상태인 것 같았다. 아나샤가 포기한 채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을 때, 마침 근처 복도를 지나가던 근위병들이 먼저 그를 알아보고 멈춰 섰다.
“황궁 의무실은 어디에 있지?”
그들의 거수경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단 듯이 리히르트는 본론부터 꺼냈다.
“본궁으로 가셔야 합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회장 안에 암살자가 잠복해 있다.”
“…그게 사실입니까?”
“긴말하지 않겠다. 조속히 황실 근위대에 이 사실을 알리고 건물 주위를 포위하라 전해라.”
“네. 알겠습니다.”
시선이 마주친 기사 하나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들을 뒤로하고 리히르트는 곧장 기사의 안내를 받아 의무실로 향했다.
본궁까지 조금 거리가 있었으나 그들은 최단 시간 내에 본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말로 재촉하진 않았으나 원체 흉흉한 분위기를 띠고 있는 공작이 뒤에 서있으면 누구라도 서두를 수밖에 없으리라.
아나샤는 의무실 안 간이침대 위에 눕혀졌다. 얼마나 조심스레 내려놓는지 눕히는 소리 하나 나지 않을 정도였다. 황실 의원인 늙수그레한 노인이 다가와 그녀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덮은 옷을 치우자 피투성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저기, 이 피… 제 거 아니에요.”
심각한 분위기에 아나샤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제야 리히르트의 표정이 조금은 펴지려는데 아나샤가 이어 말했다.
“근데 손이…….”
아나샤는 울먹이며 제 왼손을 들어 보였다. 덜덜 떨리는 손은 피로 번져있어 정확한 진단이 어려웠으나 확실히 심각한 태가 났다. 황실 의원은 물을 적신 천으로 피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으읏…, 으으.”
“쯧쯧, 어쩌다가 이렇게…….”
밝은 조명 아래 드러난 왼손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얼마나 심하게 꺾인 것인지 퉁퉁 부어오른 손목은 고통에 잘게 떨리고 있었다.
“손목뼈가 아예 부러진 것 같습니다. 상태를 봐선 여러 번 꺾인 것 같은데.”
조금만 건드려도 너무 아파하는 모습에 의원은 바로 치료를 진행할 수는 없다고 여겼다. 침대 곁에 서서 여인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릴 때마다 무섭게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로 인해 그럴 수도 없었지만.
“죄송하지만, 앉아계시겠습니까.”
황실 의원의 말에 리히르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사이 의원은 말린 수면초를 가져왔다. 금방 잠이 들게 하는 효능을 가진 약초로, 너무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환자에게 처방하는 것이었다.
수면초를 씹게 하자 얼마 안 가 아나샤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감긴 두 눈은 눈물로 푹 젖어있었다.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리히르트는 잠든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항상 밝게 웃고 있던 얼굴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살면서 피를 본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핏물을 뒤집어쓴 채 전투지를 누비던 때도 있었건만 그녀의 얼굴 위에 번져있던 피를 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리히르트는 익숙한 것이 두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그 피가 그녀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은 깊게 가라앉은 채였다. 푸른 벽안 속에는 어느덧 우울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동안 황실 의원은 손목에 부목을 대고 붕대로 감아 치료를 마쳤다.
“최소 한 달간은 절대 왼손은 사용하지 않게 하십시오.”
“치료 고맙군.”
황실 의원의 주의를 들은 리히르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의 겉옷을 잠든 그녀의 몸에 다시 덮어준 후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 모습이 퍽 조심스러워서 황실 의원은 역시 숨겨둔 연인인 모양이라고 넘겨짚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