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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질 때-20화 (20/87)

20화

처음부터 이것을 노리고 한 말이었다는 듯이 그는 매끄럽게 제안했다. 물론 곧바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에르디온은 제 여동생을 돌아보았다.

“엘리시아, 너 또한 싫지 않다면 말이야. 너도 춤을 춰야 하지 않겠니?”

엘리시아는 눈길을 살며시 내렸다. 그녀는 아직 약혼자가 없었다. 그러니 매번 함께 춤을 추는 상대는 오라버니인 에르디온이나 2황자 일리예스였다.

두 사람 다 아무런 말이 없자 에르디온은 낮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싫어 보이진 않는 것이 둘이서 대화를 나누도록 자리를 비켜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에르디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파트너에게 향했다. 황태자가 약혼녀 브렌시아 공녀와 함께 댄스 플로어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자 귀족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손을 맞잡고 댄스 플로어로 향했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선율에 맞춰 춤을 추는 남녀들을 리히르트는 멀찍이 떨어진 채 지켜보았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엘리시아가 몸을 일으켜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수많은 귀족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몰렸다. 훤칠하리만큼 잘생긴 공작과 아름답기로 유명한 황녀의 조합은 멀리서 봐도 눈에 띌 정도였다.

설마 아무하고도 동행하지 않은 이유가 황녀의 파트너였기 때문인 것일까. 놀라움과 선망이 담긴 시선들이 쏟아졌으나 뛰어난 무신경함을 자랑하는 리히르트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와 함께 춤을 추시겠어요?”

리히르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미안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 같은 대답을 내놓고서는 그녀를 두고 자리를 떠났다. 리히르트는 댄스 플로어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를 향해 고정되어 있던 시선들도 시간이 흐르자 점차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미동조차 없이 서있는 그를 관찰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던 것이다.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던 리히르트는 비운 술잔을 내려놓기 위해 구석진 곳에 자리한 테이블로 다가갔다. 새 술잔을 쥐려다가 그는 무의식중에 손을 뒤집어 보였다. 그리고 매끄러운 테이블보 위를 두 번 톡톡 두드렸다. 업무 중에 그녀를 부르고 싶을 때마다 하던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소리에 그녀는 항상 어김없이 제 앞에 나타났었다.

이젠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모양이었다. 늘 곁에 있다시피 했던 그녀가 없으니 홀로 있는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리히르트는 이런 제 변화가 신기하기만 했다. 혼자 있는 것을 허전하다고 여기게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그녀가 아니었다면 느껴보지 못했을 감정들이었다. 그래서 소중했고, 더욱이 지금의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았다.

처음으로 가까워진 자였다. 더 가까워질 수 없다면 더 멀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리라. 다물린 입가 위로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번진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톡, 하고 작은 무언가가 그의 어깨 위로 떨어진 것은.

리히르트는 제 어깨에 맞고 바닥에 떨어진 물체를 응시했다. 부서진 호두 조각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치자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드높은 천장 위에 달린 샹들리에 사이로 또 한 번 작은 견과류 조각이 떨어지자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곳에 그녀가 있다. 그 사실에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다. 그는 이름 모를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나가겠습니다. 당장.’

리히르트는 소리 없이 입술을 벌려 말했다. 자신에게는 너무 멀어 그녀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저곳에서 자신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는 빠르지만 조용히 회장을 벗어나 복도로 나왔다. 푸른 달빛이 내려앉은 넓고 어두운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적당한 곳에 멈춰 서서 벽을 두 번 두드리자 곧이어 그가 서있는 천장 끄트머리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달그락대며 타일을 들어 올린 아나샤가 구멍 사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까만 단발머리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단장님!”

“아샤 경. 대체 언제부터 거기 위에 있었던 겁니까?”

“음, 무도회 시작되고 나서요? 아슬아슬하게 도착하긴 했지만요. 그래도 단장님과 동행한다는 약속은 지켰습니다!”

칭찬을 기다리는 듯한 그 얼굴에 리히르트는 자신과 그녀 사이에 오해가 있었단 것을 알아차렸다.

“그보다 시키실 일은요?”

아마 그녀는 동행을 개인적인 임무로 이해했던 모양이었다. 동행하자고 했을 뿐 파트너로서 함께 참석하자고 말한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일단 거기서 내려오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돌아서 오려는지 거꾸로 매달려 있던 그녀가 다시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조차 그는 기다릴 수 없었다.

“아샤 경.”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아나샤가 다시 구멍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받아주겠습니다.”

리히르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냥 제 위로 뛰어내려도 좋다는 뜻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아나샤는 난감한 기색을 띠며 머뭇거렸다.

“어…, 물론 대리석 바닥보다는 단장님 몸이 훨씬 물렁물렁하겠지만, 그러면 단장님 뒤통수가 아작 날 텐데요.”

“안 넘어질 자신 있습니다.”

“그치만요. 제가 단장님이 보시는 것보다 훨씬 무거울 수 있어요. 음, 많이 불안한데…….”

“제대로 받아낼 테니 한번 믿어주겠습니까?”

강경하게 나오는 그의 말에 아나샤는 잠시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천장 구멍 사이로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최대한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천장에 매달려 있다가 손을 놓았다.

‘단장님 뒤통수, 뒤통……!’

질끈 눈을 감은 지 2초도 되지 않아 아나샤는 다시 눈을 떴다. 어느새 제 코앞에는 그의 부드러운 금색 머리칼이 위치해 있었다.

머리가 살짝 흐트러진 것 빼고는 그는 전과 비교했을 때 미동조차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의 몸이 생각보다 많이 다부져 조금 놀랄 정도였다. 안정적으로 자신을 받아내다 못해 엉덩이 아래를 받친 팔뚝은 강철처럼 절대 부러지지 않을 것 같았다.

“보십시오. 믿길 잘했지 않습니까?”

별안간 그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며 말했다. 푸른 눈동자가 소리 없이 아래로 나긋이 휘어져 있었다. 아나샤는 그의 품에 안겨있다가 쥐고 있던 그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었다. 그제야 리히르트는 자세를 풀어 그녀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뒤통수 안 깨져서 다행이네요.”

“어쩐지 제 뒤통수가 무사해서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요. 그냥 뭔가 좀, 암튼 뭔가 그래요.”

아나샤는 순간 그 때문에 당황한 것을 필사적으로 숨겼다. 왠지 그래야 될 것 같았다.

“근데 아까부터 술만 드시던데 취하신 거 아니죠?”

“…취해 보입니까?”

“조금은요?”

그답지 않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던 것을 그녀는 그가 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취하면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하거나 유독 기분이 들뜨는 유형인 것 같았다.

“시킬 일은 뭐예요?”

“저와.”

“……?”

“놀아주었으면 합니다.”

순간 그가 장난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것치곤 그의 태도는 진지했다.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어디서 쉬고 싶습니다. 경도 함께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 절 부르셨단 말이에요?”

아나샤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테윌러에게는 단장님이 그날 시킬 일이 있으신 것 같아 파트너가 되어주지 못하겠다고 거절했는데 말이다. 물론 거절할 생각이긴 했지만 거짓말을 친 것 같아 마음이 찔렸다.

“저는 동행하자고 엄청 진지하게 말씀하셔 가지고 중요한 일인 줄 알았단 말이에요. 이럴 줄 알았으면 쉬는 거였는데!”

째릿 하고 상관을 쏘아보는 눈빛이 당돌했다. 다른 기사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겠지만 아나샤는 투정이란 투정은 다 부릴 기세로 말을 덧붙였다.

“이래 봬도 저 꽤 비싼 인력이라구요. 제가 매일 놀아주니까 아주 쉬워 보이죠? 심심하면 막 불러내고.”

“그럴 리 있겠습니까.”

조용히 미소만 머금고 있던 리히르트가 대답했다. 그녀를 대하는 것은 조금도 쉽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게 대하게 되는 상대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어떻게 하면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줄 겁니까?”

“역시 이렇게 나와야죠.”

“원하는 건?”

“음, 뭘 부탁할까… 아! 일단 목이 마르니까 음료가 필요하겠네요.”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다. 리히르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이 작은 부하의 투정이라면 뭐든지 다 받아들일 기세였다.

“연회장에서 마실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입고 당당히 돌아다니긴 좀 그러니까 전 여기서 기다릴게요.”

“알겠습니다.”

“넵! 전 달달한 음료로.”

아나샤는 무도회장으로 걸어가는 그를 바라보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 시간 넘게 잠복해 있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었다.

‘한 십 분은 더 걸리려나.’

통통 다리를 두들기며 그가 언제쯤 돌아올지 추측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사라졌던 방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아닌지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복도 위로 울리고 있었다.

아나샤는 잽싸게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새카만 옷차림을 하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모르는 사람이 저를 보면 놀랄 것 같았다. 복도 끝에서 조용히 걸어오던 인영이 이윽고 옅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몰래 지켜보고 있던 아나샤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달빛이 고인 복도 위를 홀로 조용히 걷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황녀님이었다.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얼굴은 천장 위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머리카락은 은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은은히 빛났고, 도톰한 입술은 과즙처럼 붉었다. 세상에 요정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숨을 죽인 채 황녀님이 지나가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중 희미하게나마 또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머리 위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쥐의 움직임이라 하기엔 컸다. 기척을 좇아 천장을 올려다본 순간이었다. 어둠을 가르고 무언가가 아나샤를 향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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