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사랑에 빠질 때-19화 (19/87)

19화

“덕분에 많은 걸 알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뭘요.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또 물어보세요!”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나샤가 웃었다. 칭찬을 받아 급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이것저것 더 떠들다가 뒤늦게 한참 시간이 흐른 것을 깨닫고 천장으로 올라갔다.

타일을 닫고 어둠 속에서 해죽해죽 웃고 있을 때 문득 그녀는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어제 일에 대해 묻는다는 것이 그냥 올라와 버렸다. 아나샤는 다시 타일을 들어내고서 오전 햇살로 물든 집무실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반듯한 자세로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나중에 쉴 때 다시 말해야겠다.’

차마 방해는 할 수 없어 그녀는 다시 천장 타일을 바르게 원위치에 놓았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한 나중은 오지 않았다. 세 시간 뒤에도, 여섯 시간 뒤에도, 심지어 그가 퇴근할 때까지도 말이다. 그 주제를 꺼내려고만 하면 그가 말을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별 의심하지 않고 곧잘 대답해 주던 그녀도 삼 일 연속으로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잡지 못하자 의심이 들었다.

‘설마, 우리 단장님이 의도하고?’

아무리 봐도 그런 얍삽한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은 고상한 얼굴이었다. 차분한 인품에, 항상 솔직하게 자신을 대해주는 단장님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요리조리 말을 돌려가면서까지 피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아나샤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뚫어지는 시선을 코앞에서 받고 있던 리히르트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무슨 용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아니, 사실 있어요! 그… 저번에 말인데요.”

“아샤 경. 저번이라고 해서 생각난 것입니다만, 혹시 저번에 준 쿠키는 어땠습니까?”

“역시 말 돌리는 거죠?!”

아나샤는 이젠 확실히 알겠다며 그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무례한 부하의 행동에도 리히르트는 화를 내기는커녕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한 호수 같은 태도였다.

“단장님 실망이에요. 이런 얍삽한 수를 쓰실 줄도 아시고! 전 완전 좋게 봤는데, 마냥 청렴한 분은 아니었군요?”

“…그대 말대로입니다.”

푸른 눈을 내리깔며 리히르트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아나샤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보다 큰 사내일 텐데 아름다운 외모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련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마치 자신이 모질게 괴롭힌 것만 같은 그런 죄악감이 드는 것이다.

“아, 아니에요. 역시 단장님은 청렴하시고, 누구보다 좋으신 분이에요.”

“아닙니다. 저는 그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못난 상관일 뿐입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전혀 안 못났어요. 안 불편해요. 단장님을 의심한 제가 나빠요.”

아나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가 금방이라도 단장직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전 지금의 단장님이 너무 좋은걸요. 그리고 저번에 주셨던 쿠키도 너무 맛있었어요.”

그 말에 리히르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눈은 미약하게 부드러이 휘어진 채였다.

“맛있었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단장님이 주시는 건 뭐든 맛있지만요.”

아나샤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그의 눈웃음에 조금은 당황한 상태였다. 웃을 줄 아시는구나……. 그런 무례한 생각을 머릿속에 담은 채 아나샤는 그와 마주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아나샤는 몰랐다. 이것이 얼마나 진귀한 광경인지. 그의 이런 얼굴을 본 사람은 아나샤가 처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심지어 리히르트 본인조차 거울로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도 자각 없이 지은 표정이었는지 곧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갔지만, 아나샤는 생각했다. 단장님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면 적의 검도 내려놓을 수 있겠다고 말이다.

* * *

무도회 날은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간 리히르트는 최대한 아나샤와 무도회에 관련된 얘기를 하는 것을 피해왔었다.

그녀가 거절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공식적인 행사 중 하나일 뿐인 그곳에 그녀와 함께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다른 이와 함께 참석하는 것에 왠지 마음이 답답하고 불편했기에 얘기했을 뿐이었다. 물론 털어놓는다면 편할 거라 여겼던 마음은 그 뒤로 그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지만.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운 것일까.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기에 더 두려웠다. 지금껏 그녀의 대답을 듣는 것을 회피하고만 있던 그였지만 이제는 더는 미룰 수 없는 처지였다.

리히르트는 맞은편에 앉아 차를 홀짝이는 아나샤를 바라보았다. 맛을 보듯 짧게짧게 들이켜던 그녀가 곧 동그랗게 떠진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다.

“이 차 뭐예요? 엄청 맛있어요.”

“달달한 차로 준비해 달라고만 해서 저도 이름은 모릅니다. 다음에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보다 아샤 경.”

그는 잠시 닫았던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목 안쪽이 막혀있는 것처럼 쉽사리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야 그는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저번에 얘기했던 무도회 동행 말입니다.”

“아. 맞다. 무도회가 내일이죠?”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 같은 태도였다. 이에 그의 꽉 쥐어져 있던 주먹이 절로 느슨히 풀어졌다. 알 수 없는 허무한 기분이 그를 덮쳐왔다.

“내일 동행할 의사가 있다면 나와주십시오.”

리히르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물론 오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는 기다리겠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부담이 될까 봐, 더는 아무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이젠 그 자신도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 * *

무도회 당일이 되었다. 무도회장 문이 개방되는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이른 시간 리히르트는 이미 나와있었다.

연미복을 차려입은 그는 넓은 마차 안에 홀로 앉아있었다. 약간의 기대감과 긴장감이 서린 굳은 얼굴로 그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물을 예의 주시했다. 다름 아닌 그가 매일 출근하는 기사단 건물이었다.

남성이 여성 파트너를 직접 데리러 가는 것이 무도회의 관례였다. 보통은 파트너의 저택에 찾아가겠지만 아나샤가 사는 곳이 기사단 숙사이다 보니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숙사 앞에서 직접 기다리고 있으면 그녀를 난감하게 만들까 봐 기사단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차를 대기시켰다.

동행할 의사가 있다면 나와달라고만 했으니 이 정도가 적당한 것이다. 아직 그녀에게서 확답을 받지 못한 그로선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리히르트는 눈을 거의 깜빡이지조차 않고 건물 쪽을 응시했다. 연미복에 구김이 가지 않게 미동 없이 앉아있기를 한 시간째였다.

얼마나 더 긴 시간이 흐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자 이미 30분을 넘기고 있었다. 애초에 휴일이라 건물에서 나오는 이는 없었다. 그녀가 나온다면 어찌 됐든 이 문으로 나올 테니 자신이 그녀를 놓쳤을 리 없었다.

소리 없이 조용히 움직이던 은으로 된 분침은 어느덧 반 바퀴를 더 돌아있었다. 이미 출발해야 할 시간을 넘긴 지 오래였다. 초조함을 느낀 그는 괜스레 손목 아래를 더듬었다가 손을 내렸다.

그는 반시간만 더 기다려 보자는 생각으로 하염없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넘게 기다렸지만 결국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 * *

웨일그레슬 공작의 때늦은 등장은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가 공식적으로 처음 수도의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도 사실이지만, 무려 파트너를 동행하지 않고 홀로 참석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쏠린 것이다.

물론 혼자 참석하는 귀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성의 경우 약혼자가 없으면 그러기도 했다. 남성의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누군가. 수도에 온 이후로 이미 모든 미혼 영애들의 신랑감으로 점찍힌 상대였다. 화려한 삶을 선호하는 수도의 여식들이 한평생 지방에서 지내는 것을 달가워할 리 없었다. 그렇기에 신분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혼사의 상대로 거론되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수도에 정착한 후로는 모든 쟁쟁한 귀족 남성들을 제치고 당당히 신랑감 후보 1위에 올랐다. 그 당사자도 모르게.

신분도 신분이지만 알려진 외모에 수많은 여인들의 관심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멀리서나마 그의 실물을 본 여인들은 좀처럼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감정이라곤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그녀들에게는 더욱 이질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북쪽의 설산을 덮은 눈처럼 새하얀 백금발은 윤이 흘렀고,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 아래 푸른 눈은 겨울 호수보다 시리고 깊어 보였다. 날카로운 턱선이 돋보이는 옆얼굴은 차가웠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저런 매력적인 분이 계셨다니, 왜 이제까지 몰라뵀던 걸까요?”

“저도 그래요. 정말 수도 밖의 남자들은 쳐다도 안 봤는데…….”

“듣기로는 검술 실력도 뛰어나시다던데, 검을 다루시는 모습은 또 얼마나 황홀할까요.”

무리 지어있던 영애들은 황홀한 탄식을 흘리기에 바빴다. 멀리서만 봐도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 차마 가까이 다가갈 용기가 없었다.

그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질 만도 할 텐데 리히르트는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상석에 앉아있는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서 황태자가 있는 자리로 향했다.

황태자 에르디온은 그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제 옆에 있는 황녀 엘리시아를 그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반가워요.”

부드럽게 물결치는 은색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고 앉아있던 황녀는 눈앞의 사내를 향해 사근사근히 웃어 보였다.

“그보다 공의 파트너는 어디 있지? 함께 오지 않은 건가?”

에르디온의 물음에 리히르트는 “네.” 하고 짧은 대답을 내놓을 뿐이었다. 감정이 배제된 얼굴이 일순 딱딱하게 굳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에르디온은 “저런.” 하고 아쉬운 탄식을 흘렸다.

“함께할 파트너가 없다면, 내 여동생의 파트너가 되어주는 건 어떻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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