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제껏 피하고 싶어서 질질 끌었던 일이 맞나 싶을 만큼 마음은 편안했다. 떨리는 것과는 별개로 안정됨을 느꼈다.
어서 대답해 줘야 테윌러의 마음도 편할 것 같았다. 상쾌한 기분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들뜬 사람이었다.
아나샤가 홀가분한 얼굴로 걸음을 옮길 때, 한편 그 모습을 복도를 지나다 우연히 창문을 통해 보게 된 자가 있었다.
“단장님?”
갑작스레 걸음을 멈춘 그를 이상하게 여긴 행정관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혹시 뭐 빠뜨리신 거라도…….”
“…….”
“아, 아닙니다. 제가 다시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먼저 회의장으로 가시죠.”
안 그래도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이라 눈치를 살피는 게 일인 행정관이었다. 비스듬히 그늘진 얼굴이 크게 굳어있기까지 하니 더 불안했다. 중요하게 뭐 빠뜨린 것은 없나 행정관은 서둘러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가 간 후에도 리히르트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서있었다. 뒤늦게 걸음을 내딛긴 했지만 걸음걸이는 전보다 확연히 느려져 있었다.
* * *
리히르트는 본인 스스로를 둔감하다고 여겨왔었다. 기분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거나 의욕을 상실해 본 적은 없었고, 사소한 일 때문에 고민을 해본 적도 없었다.
한평생을 무디게 살아왔을 텐데, 처음으로 아무것도 집중이 되지 않고 있었다. 단순히 초조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업무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아까 스치듯 들은 그녀의 얘기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녀는 오늘 저녁에 대답하고 오겠다고 말했었다. 보나 마나 파트너에 관한 얘기일 게 뻔했다. 최근 들어 그녀가 이 문제로 끙끙 앓았었으니까. 그리고 밝아 보이는 목소리는 마침내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문제는 왜 이것에 본인이 초조함을 느끼는가였다. 몇 개의 가설을 세운 그는 하나씩 따져보기에 이르렀다.
첫 번째는 그녀의 고민을 실시간으로 들었던 입장으로서 그녀가 잘 얘기할 수 있을지 걱정이 돼서.
하지만 리히르트는 본인이 그렇게 사려 깊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애초에 그런 것이라면 처음 고민을 들었을 때부터 감정적으로 이입했어야 성립할 수 있는 것인데 지금에 와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조금 어긋났다.
두 번째는 그녀를 보고 자신도 빨리 파트너를 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확실히 조급하긴 했다. 하지만 그래서 조급하다면 왜 자신은 서류철을 펼치지 않는 것일까. 애초에 한시 빨리 파트너를 정해야 한다는 건 예전부터 자각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세 번째, 그녀가 정말 파트너로 참석할까 봐.
하지만 그녀가 제안을 수락하고 파트너로 참석하는 것이 왜 초조함을 느껴야 하는 일인 것인가. 리히르트는 이에 대한 답을 여전히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어찌 됐든 이 초조함도 한순간의 감정일 뿐이니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될 거라 여겼다.
‘…아홉 시인가.’
그러나 그의 판단은 틀렸다. 해가 지고 건물의 불이 하나둘 꺼져가는 동안에도 그의 기분은 그대로였다.
반밖에 처리하지 못한 서류가 그의 책상 오른편에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리히르트는 펜을 놓았다. 오늘은 되지 않는 일이리라. 간혹 길게 이어진 훈련에 쌓인 피곤함이 클 때 일찍 서류를 놓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겼다. 저택에 가서 마저 업무를 보고 일찍 잠자리에 들면 다음 날 해결될 것이다.
그는 서랍을 열어 한동안 쳐다보지 않았던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저택으로 향하는 동안 그는 마차 소파에 앉아 서류철을 펼쳤다. 리히르트는 세 명의 후보를 두고 종이를 넘겨가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업무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는 그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서류철을 덮은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깥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비쳐 들어온 노란 불빛에 그는 눈길을 따라 옮겼다. 어둑어둑한 가운데 가로등이 길게 이어지는 아치형 다리가 보였다. 수도에서 가장 큰 교였다. 그 밑에 흐르는 강 위로 주홍빛 얼룩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문득 예전에 보았던 풍경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날 제 옆에 있었던 그녀의 모습도. 서류철을 쥔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갈 때였다. 그의 시야 속에 다리 위를 지나는 작은 인영이 포착되었다.
어딘가 익숙하다 싶어 유심히 그 모습을 좇기 시작하던 그는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자 확신할 수 있었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샤 경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자신을 이토록 초조하게 만들었던 범인은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걸음이 가벼웠다. 밤바람에 가볍게 흐트러진 머리칼은 금방이라도 어둠에 스며들 것처럼 까맸다. 그녀의 모습이 눈 밖에서 사라질까 뚫어져라 지켜보던 그는, 뒤늦게 그런 자신을 눈치챘다.
‘어째서.’
무엇이 이리도 자신을 초조하게 만드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사실은 인정하고 싶었다.
‘그녀가 가는 게 불만인 건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 초조함은 그런 사람 좋은 걱정이나 새삼스러운 초조함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그저 불편했던 것이다. 마음이.
그녀가 그런 상담을 해온다는 게, 지금 대답을 하기 위해 다른 사내에게 가고 있다는 게, 그리고 내일이면 신이 나서 어떻게 됐는지 얘기해 줄 그녀를 마주한다는 게, 이 모든 과정을 본인은 그저 타인으로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게 불편했다.
이렇게 숨어서 초조해할 바엔 적어도 자신도 솔직하게 한마디 꺼내보기라도 했다면 좋았을 테다. 그리고 그 마지막 기회가 지금 그의 손에 달려있었다. 리히르트는 가만히 손에 힘을 주고 있다가 결정을 내린 듯 마차 천장을 두드렸다.
막 다리로 진입해 달리던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그녀와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리히르트는 문고리를 붙잡아 그대로 문을 열고 내려섰다.
“아샤 경……!”
다리 한복판에서 갑작스레 불리게 된 아나샤가 뒤를 돌아보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자신에게 급히 달려오는 남자가 보였다. 그녀는 크게 놀라서 멍하니 서있다가 그를 맞이하기 위해 발을 뗐다.
열 걸음도 남기지 않은 거리에 있을 때였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서류철이 땀에 의해 미끄러지며 손끝을 빠져나갔다. 바람에 의해 펼쳐진 서류철은 이내 돌로 쌓아진 낮은 난간에 부딪쳤다. 그대로 난간 아래로 떨어지려는 서류철을 아나샤가 다급히 붙잡기 위해 뛰어가던 순간이었다.
제 손을 붙잡는 뜨거운 손에 아나샤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몸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그가 서있었다.
“…어…….”
그대로 칠흑 같은 강물 속으로 사라져 버린 서류철을 바라보던 아나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거 중요한 거 아니에요? 다시 건져서 말리면 될 거 같긴 한데, 건져올까요?”
“중요한 것은 아니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보다,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습니다.”
그가 손을 놓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의 모습은 단장실에서 봐왔던 모습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풀어진 모습이랄까, 아나샤는 시선을 내렸다. 뜨거운 온기가 사라진 손등 위로 시원한 밤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쩐지 허전하게 느껴졌다.
“무도회 날, 저와 동행해 줬으면 합니다.”
“…네?”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상관으로서의 강요도 아닙니다.”
아나샤가 다시 시선을 들어 그를 보자, 반대로 리히르트는 시선을 내렸다. 어두운 강 표면과 그림자가 진 돌난간 위 사이에 비스듬히 시선을 걸쳐두고서 그가 입을 열었다.
“그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선택지는 어떤지에 대해…….”
“…어, 네?”
여전히 아나샤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리히르트는 목이 타는 기분에 같은 말만 재차 반복했다.
결국은 하려던 말의 반도 꺼내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다가 그녀를 마차에 태웠다. 그리고 직접 문을 닫아주고 물러섰다.
“저기, 이 마차는, 단장님?”
“밤이 늦었습니다. 목적지를 얘기하면 그곳까지 바래다줄 겁니다. 타고 가십시오.”
“그치만 단장님은요?”
창문 밖으로 다급히 얼굴을 내민 아나샤가 물었다. 리히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재 그는 아나샤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는 상태였다. 같이 탈 수 없으니 자신이 내리는 수밖에.
“내일 봅시다. 아샤 경.”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으나 그의 얼굴에는 티 나지 않을 만큼 조용한 미소가 스며있었다. 아나샤는 정말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그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출발한 마차에 실려 그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던 리히르트도 뒤늦게 걸음을 떼었다.
4장 자각의 순간 (2)
아나샤는 묻고 싶은 게 많아 아침부터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왜 어젯밤 저 혼자 마차에 태워 보낸 건지부터 시작해서 무도회 동행 얘기는 또 뭔지 말이다. 물론 그 덕분에 테윌러와 얘기를 잘 끝내고 기사단까지 빠르게 마차를 타고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고마운 것과 이상한 것은 별개였다. 아침부터 단장실에 눌러앉아 그를 기다리던 아나샤는 문이 열리기 무섭게 쏜살같이 자릴 박차고 일어났다.
“단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차분한 무표정이었다. 곧 그의 얼굴에는 조그마한 의문이 피어올랐다. 두 팔을 벌려 그의 앞을 막아선 아나샤 때문이었다.
“얘기 좀 해요! 어제는 대체 왜…….”
“혹시 마상 시합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습니까?”
“마상 시합은 왜요?”
“관심이 생겨서 말입니다.”
하지만 주변에 얘기해 줄 사람이 없다고 그가 말끝을 흐리자 아나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마상 시합에 대해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마상 시합을 보려면 대회로 보는 게 좋다는 얘기를 시작으로 수도에서 1년에 한 번 열리는 큰 대회가 있는 얘기, 참가 자격과 작년도 우승자에 대한 얘기까지 모조리 다 얘기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