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사랑에 빠질 때-17화 (17/87)

17화

* * *

“요즘 감기가 유행인가 봐.”

“웬 감기?”

“단장님도 그렇고, 테윌러도 그렇고, 다들 감기네.”

아나샤는 중얼거리며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무장 나무 근처에서 몸을 풀고 있던 크리스가 슬쩍 운을 뗐다.

“그보다 너 그 친구랑은 어떻게 됐어?”

“친구 누구……? 하핫, 내가 친구가 한두 명이야?”

“시치미 떼기는, 녀석! 다 티 나거든?”

네가 감히 날 속일 수 있을 것 같냐는 눈이었다. 아나샤는 합죽이가 되어선 조용히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리스는 얄밉게 말을 이었다.

“그 친구, 너한테 관심 있어 보이던데?”

“사, 삼촌이 그걸 어떻게 알아?! 테윌러한테 들었어? 아니잖아!”

“너는 감 하나는 죽이게 좋으면서 왜 이런 쪽으론 둔감해 터졌냐…….”

딱 봐도 알겠다며 크리스는 혀를 찼다. 이러니 연애를 못하지.

“적어도 내 눈엔 나쁜 녀석으로는 안 보이던데, 성실하기도 하고.”

“테윌러가 나쁜 애가 아니란 건 나도 잘 알아.”

“그럼 제대로 마주해 봐. 뭐가 문제야? 잘해보란 소리까지는 아니어도 생각 정도는 해보라고. 꽤 진심인 것 같던데.”

“나도 몰라. 묻지 마, 그런 거.”

“어쭈? 부끄러워하는 거냐?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 악!”

크리스는 머리 정중앙으로 날아온 작은 돌멩이에 소리를 질렀다. 언제 내려왔는지 나무 아래에 서서 아나샤가 그를 잔뜩 쏘아보고 있었다.

“남은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그렇다고 던져! 네가 애야?”

“애다 왜! 난 아직 삼촌처럼 안 늙었다고!”

씩씩대던 아나샤가 그대로 뒤를 돌아 달려가 버렸다. 이내 사라진 뒷모습에 크리스는 “아직도 애네, 애야.” 하고 중얼대며 욱신거리는 머리를 문질렀다.

* * *

“어떻게 된 게 조언해 줄 사람이 한 명도 없냐…….”

숙사 지붕 위에 앉은 채 청승맞게 달을 바라보고 있던 아나샤가 습관적으로 중얼거렸다. 연애는 해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했다. 이런 쪽으로 조언을 해줄 친구가 필요했다. 주위엔 아저씨 아니면 또래 남자밖에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까 난 왜 여자인 친구는 없지? 한숨을 내쉬던 아나샤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애초에 만남 자체도 없었다. 이 흙먼지나 풀풀 날리는 기사단에서 또래 여자애를 만날 확률이 몇 퍼센트나 될까.

‘소개시켜 달라고 할까?’

또래 여자애를 알 만한 삼촌이 있었던가, 한동안 머리를 굴리던 아나샤가 짝 손뼉을 쳤다.

‘단장님한테 부탁해 봐야겠다!’

그도 무도회 파트너로 아가씨를 데려갈 것이 분명했다. 단장님과 그 아가씨를 도와주면서 자신도 자연스레 아가씨와 친해지는 상상을 해보았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봐도 완벽한 작전이었다.

내일 부탁해 봐야겠다. 그렇게 깔끔하게 고민을 털어낸 아나샤는 자신의 방 창문으로 쏘옥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아나샤는 다음 날 아침 해가 밝아오자마자 단장실로 들이닥쳤다. 아직 그는 출근하지 않은 상태였다. 소파에 편히 누운 아나샤는 그가 올 때까지 눈을 붙이기로 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곯아떨어졌을까. 단장실 문이 열렸다. 아나샤는 그 작은 소리에 눈을 떴다. 거의 야생동물과도 같은 반응이었다.

“단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아샤 경. 한데 거기서 밤을 새운 겁니까?”

“아뇨. 여기선 한 시간밖에 안 잤어요. 그보다 단장님께 부탁할 게 있어요!”

여전히 놀란 기색이 가시지 않아 보이는 리히르트를 향해 아나샤는 무작정 돌진부터 했다. 들어서다 말고 그는 다시 반걸음 주춤 물러섰다.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무도회에 같이 갈 아가씨 누구예요?”

“아직… 안 정했습니다만. 왜 그럽니까?”

“그럼 잘됐네요!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으면 제가 슬쩍 가서 밀어드릴게요.”

손바닥으로 미는 시늉을 하며 아나샤가 씰룩 웃었다. 그 모습을 담은 벽안이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네? 어째서요? 단장님도 파트너 구하셔야 되잖아요.”

“…그대는 파트너 신청을.”

“네?”

리히르트는 순간적으로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에 미간을 슬며시 접어야 했다. 그 자신도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큰 실수를 한 것 같다는 느낌만 강하게 들 뿐이었다.

조용한 눈길로 그녀의 얼굴을 살피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 들어왔다. 리히르트는 일순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아닙니다. 어제부터 머리가 복잡해서 헛말이 나왔습니다.”

“아, 네…….”

그렇게 대답했지만 아나샤는 간만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파트너에 대한 단어를 거론한 순간, 그의 얼굴 위로 떠오른 낙담한 기색을 생각하면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혹시… 파트너가 되어줬으면 하는 아가씨와 잘 안 되고 있는 건가?’

아픈 상처를 후벼 판 것 같아 미안한 한편, 그의 모습에 묘하게 테윌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나샤는 머리를 붕붕 휘저었다. 여기서 왜 테윌러가 떠오르냐고 스스로를 타박하던 그녀는 문득 자신을 향해 닿아있는 눈길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 왜 계속 서계세요?”

고개를 내젓는 그 작은 모습 하나 놓치지 않고 지켜보던 리히르트는 그제야 그녀를 지나쳐 책상 앞에 앉았다.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가 일을 시작하자 아나샤도 천장 위로 올라갔다.

한동안 서류를 넘기던 리히르트는 사위가 조용해지자 아래 서랍에 손을 가져갔다.

여전히 서랍 깊숙한 곳에는 붉은 벨벳으로 덮인 서류철이 놓여있었다. 무도회까지 앞으로 일주일 정도 남은 상태였다. 늦어도 내일까지는 결정해야 했으나 그는 소리 나지 않게 다시 서랍을 밀어 닫았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저 마음만 이상하리만치 답답할 뿐이었다.

* * *

저와 상관없다고 여겼던 무도회 날이 다가올수록 아나샤는 사형일에 가까워진 죄수처럼 시들시들해졌다. 크리스는 남모르게 혀를 찼고, 이 사실을 모르는 기사들은 마냥 그녀를 걱정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나샤는 화창한 날씨에 들판에 앉아 주위에 난 식물들을 죄 뜯고 있었다.

‘좋아한다, 안 한다, 좋아한다, 안 한다, 좋아……!’

아나샤는 마지막 남은 잎을 뜯지도 않고 바로 안 보이는 곳으로 던져버렸다. 다시 그 미친 짓은 계속되었다.

‘간다… 안 간다… 간다, 안 간다, 간다, 안 간다……!’

드디어 만족스러운 대답이 걸렸는지 아나샤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물론 어떻게 거절의 말을 해야 되는지로 자연스럽게 고민이 넘어가자 그녀는 또다시 우울한 상태로 접어들었다.

마냥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테윌러에게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본인도 그 답을 내놓을 수 없는 상태였다. 같이 답을 의논해 줄 여자 친구 만들기 작전은 실패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무도회장이 부서지면 무도회 날이 미뤄질 수도…….”

“완전히 미쳤네, 미쳤어. 그러다 황실 반역이라도 일으키겠다.”

근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크리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번만 더 이런 이성적인 접근이 찾아왔다간 멸망론을 진지하게 읊어댈 것 같았다.

“이게 다 삼촌 잘못이야! 괜히 이상한 말 해가지고!”

“내가 뭘?”

“마주하라느니, 꽤 진심인 것 같다느니 했잖아!”

“그거야 뭐, 그렇게 보였으니까 그랬지.”

크리스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에 아나샤가 눈을 부릅뜨며 일어서자 그는 그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너 무도회 파트너 신청받았지?”

“……!”

“속일 걸 속여라.”

“어떻게 알았어?”

“내가 널 몇 년이나 알고 지냈는데 그걸 모를까? 최근 무도회 얘기만 나오면 혼자 날이 서가지곤.”

벌써부터 바짝 경계의 날을 세운 아나샤를 크리스는 우습다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파트너 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잖아?”

“하기 싫은 건 아냐. 무도회장 가고 싶기도 했고, 테윌러랑 같이 가면 재밌을 것 같으니까. 문제는… 테윌러가 날 좋아하는 여자로서 데려가는 건지, 그냥 친구로 데려가는 건지 모르겠다는 거지.”

“그럼 가서 물어봐.”

“그걸 어떻게 물어! 물을 수 있었으면 진작 가서 물었지!”

아무리 철면피라도 그 짓은 못 할 것 같았다. 아나샤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외치자 크리스는 짓궂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나샤가 주위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가 없는지 확인하자 그제야 그는 웃음을 그쳤다.

“흠! 그 친구도 널 부담 주려고 한 얘긴 아니었을 거야. 그러니까 편하게 얘기하고 와. 애당초 무도회 파트너가 친구를 데려가는 자리겠냐? 눈치껏 적당히 둘러대면서 거절하란 말이야.”

“역시… 그렇겠지? 그런 거겠지? 나 혼자 과대망상하는 거 아니지?”

“한때 내 별명이 독심술사였어. 그 친구 성격상 괜히 거절했다고 해서 더 마음 불편하게 만들 것 같진 않지만, 만약 그런다면 그냥 확 걷어차 버려! 그건 친구도 아니다!”

“…삼촌. 웬일로 도움이 다 되고… 고마워.”

“방금 엄청 거슬리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아니야, 고마워.”

아나샤는 은근슬쩍 웃으며 넘어갔다.

삼촌에게 털어놓길 잘한 것 같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히 감이 왔다. 삼촌의 말이 도움이 되는 날도 있구나, 아나샤는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 가는 길이 같았기에 아나샤는 크리스와 함께 기사단 본관 쪽으로 걸어갔다. 이야기는 여전히 같은 주제로 이어졌다.

“역시 뭐든 정했으면 빨리 끝내는 게 좋겠지?”

“암, 질질 끌어봤자 좋을 게 뭐 있겠어? 인생은 실전, 그리고 한 방이지.”

“엄청 아저씨 같고 구려. 아무튼 나 오늘 대답하고 올래! 테윌러 일하는 곳에서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그거야말로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근무 끝나는 시간 맞춰서 적당히 늦게 가.”

“휴, 그래도 대답해 줄 생각 하니까 떨리긴 떨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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